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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가 되려면

아지랑이가 무지개가 되려면

아지랑이를 라틴어로 네불라 nebula라고 한다.

인후염을 달고사는 나에게는 익숙한 단어다.

검진 후 처방이 내려지는 동안 네불라이저를 켜고 

간질간질하고 촉촉한 연기를 들이마신다.

'취익~'하는 소리와 함께 

컵컵한 목구멍에 흰색 아지랑이가 피어들면 한결 숨쉬기가 편하다.


아지랑이 같은 큰 비중이 없는 단어도

얼마나 오랜시간 동안 변형, 차용되었는지 모른다며 

"학생들에게 스스로의 아지랑이를 찾으라"한 

저자의 속내가 궁금해서 이 글을 시작한다. (<라틴어 수업> 중)



봄의 시작을 알리는 아지랑이


아지랑이는 봄이 시작되면 

꽃가루와 함께 여기저기서 피어올라

봄이 본격적으로 도래했음을 알리는 전령이다. 


지구로 봄볕이 들기 시작하면 

겨우내 얼었던 땅이 달궈진다. 

따뜻해진 지면 위의 공기는 위로 상승하고,

차가운 공기가 아래로 내려오는 대류현상이 발생한다.

성질이 다른 두 공기가 움직이면서 생기는 

공기의 밀도차이 때문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육안으로 보기에 아지랑이는 봄처럼 간질간질하고 평온해 

한참을 보고있으면 졸음이 쏟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는 것은 

고온의 공기와 실온의 공기가 서로 뒤엉켜 

그 주위의 대기흐름이 복잡해졌다는 의미다.




아지랑이가 무지개가 되려면


아지랑이가 이곳저곳에서 피어오르면 

따뜻해진 공기의 양이 많아졌다는 것이고

이내 비가 내릴 징조다.


비가 온다고 늘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대기중에 비, 안개 등의 형태로 

수증기 양이 역치에 도달하지 않으면

무지개는 피어나지 않는다. 


무색, 무취인 공기의 상승인 아지랑이와

비나 안개로 대기 중으로 솟아오른 물방울과 

빛이 협업해 만드는 무지개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빛의 굴절 때문이다.

아지랑이가 여기 저기에서 피어오르면 

무지개로 대단원의 무대가 시작된다. 


무지개를 볼 수 있을 때는 태양의 고도가 낮고, 

한 쪽에서는 비가 오거나 안개 등 

대기중에 물방울이 떠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햇볕이 들 때다. 

이런 조건에서 태양을 등지고 있으면 

반원형의 무지개를 볼 수 있다. 


공기 중에 떠 있는 수많은 물방울 사이로 빛이 파고 들어

하늘 캔버스에 빔프로젝트를 쏜다. 

평소에는 노랗거나 하얀색이던 밋밋한 빛이 품고있던 

화려하고 찬란한 스펙트럼을 평면에 펼쳐 보게된다.


하늘의 신비한 힘이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3D에서 2D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



진짜를 만나다


무지개를 보면 누구나 환호하고 반가워한다. 

우리는 늘 빛을 보고 있었지만,

평소에는 희거나 뿌연 빛에 담긴 

찬란한 모습들을 무지개라는 형상을 통해 드디어 만난 것이다.


'진짜'라는 영어 단어인 Authentic은 

스스로라는 뜻의  auto와 “존재하는 자”란 뜻의 

그리스어 hentes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로 

‘주인 자신으로부터’ 기인한, 

진짜의, 확실한(reliable), 

믿을만한(trustworthy) 것이라는 의미다.  


성경에서 모세가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스스로 있는자(I am who I am)"라고 소개했다. 

진짜라는 단어 속에는 근원, 처음, 닮지않은 이라는 

속성이 내제되어 있다. 


무지개가 피어오르는 찰나는 

현현(epiphany)의 순간이다.

이 단어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상 속에서 

갑자기 경험하는 영원한 것에 대한 감각 혹은 통찰을 뜻한다. 


원래 'epiphany'의 어원은 

나타남(appearance)이란 뜻의

에피파네이아(epiphaneia)로,

'귀한 것이 나타난다'는 뜻이며, 

기독교에서는 신의 존재가 

현세에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대지가 달구어지기 시작하면

공기 중의 물입자는 상전이를 준비한다. 

소리없이 꼬물꼬물한 상태로 

에너지를 응축한다. 폭발을 준비한다.


나비가 되기 전 누에고치 속에 있는 

꿈틀거리는 애벌레

태어나기 직전 어머니의 자궁 속의 아기는 

장성한 인간이 될 모든 가능성을 품은 초고밀도 미니어쳐다. 

100m 달리기 선수가 출발선상에 있는 

폭력적인 멈춤, 튀어나오기 직전의 상태의

더 이상 가둘 수 없는 힘이다. 




아지랑이는 공기와 닫는 무언가가 

뜨거워지기 시작할 때 생긴다.

사람의 마음에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게 할 수 있다.


책을 보다 머리를 때리는 좋은 문장을 만났을 때

그 좋은 감정이 사랑이었다는 걸 확인했을 때

더 깊이 알고 싶은 무언가가 생겼을 때 

마음이 꼼지락 거리고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는 걸 느낀다. 


뻣뻣한 내 마음이 다른 성질을 가진 존재와 조우해 

새로운 깨달음과 자극을 얻어 말랑해지고 상전이를 시작한다.

변화의 시작이다. 

아지랑이가 그 조짐이다. 


아지랑이를 자주 만나고 싶다.

그 조용한 힘, 아우성, 

내면에서 몇개의 화산이 터지는 듯한 황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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