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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Jul 21. 2019

[단편소설] 그 노인의 노래 (4)

그 노인의 노래 (4)


김 경감은 A일보를 읽다 말고 구겨버렸다. <생전 처음 보는 아내의 고성과 욕설… 남편은 이성을 놓았다>라는 제목의 기사 끝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유명한 기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 새끼랑 통화한 사람 있어? 진술 내용이 어떻게 그대로 나왔어! 가뜩이나 브리핑할 것도 없어 죽겠구먼… 팀원들은 엄마에게 혼이 난 아이들처럼 전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기사는 앞부분에 주민 취재를 바탕으로 한 사건 경위와 노인 내외의 사연을 담았다. 범행 동기는 아내의 고성과 욕설, 그리고 그에 따른 남편의 환멸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 근거로 경찰 조사 관련 내용을 들었다. 기사는 노인이 경찰에서 내가 죽인 게 맞다, 그만하고 싶었다, 자세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고 전했다. 김 경감의 스마트폰이 기자들에게 걸려오는 확인 전화로 끊임없이 울렸다. 액정에 번갈아 뜨는 기자들의 이름을 보다 시간을 확인했다. 브리핑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김 경감은 자석에 붙은 듯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끌며 브리핑실로 향했다.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이어진 현장검증은 기자들에게 전례 없이 관대하게 진행됐다. 노인에게 밀착해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는 기자도, 사건 현장인 노인의 집 안으로 밀치고 들어오는 기자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브리핑에서의 살벌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김 경감이 브리핑실에 들어서자 기자들은 피고인을 맞이하는 재판관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브리핑 직전 배포된 보도자료는 A일보 기사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새로운 내용이라고 해봐야 피해자 시신의 상처 위치와 개수 정도였다. 브리핑 종료 직후 첫 질문이 검사의 심문처럼 날아왔다. 혹시 A일보에만 단독으로 미리 흘려 서비스한 거 아닙니까? A일보는 국내 발행 부수 1위의 신문이었다. 기자들이 오해할 만도 했지만 억울했다. 강하게 부인했지만 기자들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도대체 오늘 브리핑에서 새로운 내용이 뭡니까?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한 기자의 질문이 불씨가 됐다. 여기저기서 불만이 폭죽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한참 듣고 있던 김 경감이 잘못을 저지르고는 변명에 급급한 애인처럼 말했다. 그게… A일보 기사도 있고… 피의자가 진술도 일절 거부하고 해서… 오늘 현장검증에서 새로운 내용을 많이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60여 명의 취재진이 밀고 들어오자 노인의 집은 당장이라도 터져나갈 것 같았다. 씨발, 밀지 말라니까. 대가리 안 치워? 카메라 가리잖아! 기자들의 욕설과 고함이 오가는 와중에도 김 경감은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포승줄에 묶인 노인을 즉시 부엌으로 데려갔다. 부엌엔 어른 크기와 갓난아이 크기의 모형 인형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자, 빨리 재연해 보세요. 노인은 식칼을 들고 어른 모형 인형을 되는대로 잡아 오른쪽 손목을 두 번, 바닥에 놓인 갓난아이 모형 인형은 전체적으로 대충 내려치는 시늉을 했다. 눈을 꽉 감은 채였다. 한 기자가 소리쳤다. 왼쪽 손목 아니었나요? 김 경감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할아버지, 왼쪽이잖아요. 왼쪽! 김 경감의 호통에 놀라 눈을 뜬 노인은 급히 식칼을 왼쪽 손목에 가져다 댔다. 칼은 어디서 났어요? 노인은 부엌을 유심히 살피더니 싱크대 위 찬장을 가리켰다. 열어보니 그릇과 찻잔이 가득했다. 여기요? 거짓말하시면 큰일 납니다. 아, 거기가 아니고… 노인이 다시 가리킨 곳은 싱크대 아래 수납장이었다. 노인의 손가락이 떨렸다. 수납장을 열자 칼집이 보였다. 빈 곳에 식칼을 꽂았다가 다시 꺼내는 장면을 재연할 때였다. 김 경감 옆에 붙어있던 박 순경의 외침이 귀를 때렸다. 기자님, 함부로 여기저기 들어가시면 안 돼요! 서른 살쯤 돼 보이는 남자 기자 하나가 부엌 옆 다용도실에서 팀원들에게 끌려 나오고 있었다. 저 새낀 뭐야? 김 경감이 벌컥 화를 내자 박 순경이 대답했다. 오늘 기사 쓴 A일보 기자, 그 기자 후배인데 아직 수습기자예요. 수습? 이 와중에 또 뭔 엉뚱한 짓을... 카메라 기자들의 고함이 대화를 잘랐다. 염병할, 도대체 뭘 찍으라는 거야! 재연 똑바로 안 해요? 김 경감은 머리가 쑤시듯 아파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골목에 50m가량 늘어서 구경하던 주민 100여 명과 취재진 60여 명까지 총 160여 명. 이들과 소란을 피우느라 지체돼 총 1시간 30분이 걸렸지만, 실제 부엌에서의 현장검증은 15분 만에 끝났다. 경찰은 현장검증이 길어질 경우 안전사고 발생 우려가 있어 어쩔 수 없었다며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현장검증이 끝난 시각은 정오 무렵이었다. 복날이 막 지난 터라 날씨가 찜통 같았다. 기자들의 상의가 막 빨래를 한 듯 하나같이 축축했다. 오전 시간을 통째로 날린 그들은 앞으로 강력5팀 사건 취재는 일절 거부하겠다면서 이를 갈며 흩어졌다. 노인을 다시 차량에 태우는데 아까 부엌 옆 다용도실에서 끌려 나왔던 수습기자가 다가왔다. 수습기자가 노인에게 펜을 건네며 말했다. 할아버지, 이거 한 번 쥐어보실래요? 박 순경이 제지하려 하자 김 경감이 지겹다는 표정으로 말렸다. 수습기자님 하고 싶으신 거 빨리빨리 하고 가시라 그래. 드잡이할 시간 없어. 노인은 오른손에 펜을 가만히 쥐더니 수습기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수습기자는 눈썹 한쪽을 일그러뜨리더니 펜도 받지 않은 채 골똘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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