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편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명 Jul 26. 2019

[단편소설] 그 노인의 사정 (7) 끝.

그 노인의 사정 (7) 끝.


귀빈장 앞에서 귀빈을 기다렸다. 귀한 손님의 이름은 바로 김 영감. 어쩐지 오늘따라 복희의 왼팔도 전혀 욱신거리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노을 덕에 온통 주홍빛이었다. 성경에선 주홍색을 죄악의 색으로 본다는 말이 떠올랐다. 처음엔 넘겨짚었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초선은 분명 죄악과 연관된 인간인 것 같았다. 몸에 칼자국을 새겨넣은 채 가격을 후려치며 몸을 파는 여자… 그런 무서운 여자가 내 아들의 미래를 훼방 놓으려 했다니. 종로3가 노인들이 겪었을지도 모를 집단적 재앙을 사전에 방지한 건 덤이었다. 어쩌면 나와 김 영감이 아니었다면 종로3가의 노인들을 큰 화를 입었을지도 몰라. 복희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이, 나 왔네. 김 영감은 어깨를 구부리고 걷던 평소와 달리 뒷짐을 진 채 턱을 한껏 세운 모습이었다. 저 어색한 팔자걸음은 또 뭔지. 복희는 조금 전까지 몸속에 충만하던 동료의식이 스멀스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오셨어요? 어서 들어가요. 복희답지 않게 김 영감에게 먼저 팔짱을 꼈다. 약속은 약속이었다. 김 영감이 소문내기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돈을 받지 않고 한 번 더 관계를 갖기로 한 터였다. 그것도 하룻밤 내내 함께 있으면서. 지난 9년을 통틀어 한 사람에게 하루에 비아그라, 기계, 주사까지 다 사용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다음 날 새벽, 복희는 동이 트기도 전에 눈을 떴다. 김 영감은 옆에서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쿡쿡 찔러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설마?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에 드리울 때쯤 김 영감의 코 고는 소리가 좁은 방을 가득 메웠다. 복희는 얼굴을 찌푸리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새날의 바깥 공기를 쐴 요량이었다. 문득 초선은 어디 있을까 궁금했다. 지금쯤이면 원래 한다던 모텔 청소 일을 하고 있으려나. 아니면 장기밀매나 인육 거래? 초선이야 뭘 하든 복희는 오늘부터 다시 돈을 모으는 데 집중해야 했다. 이제 영감들을 빼앗아 갈 초선도 없으니. 아들의 출소까지는 이제 고작 1년. 지난 9년이 그랬듯 정신을 차려보면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질 세월이었다.


복희는 프런트 데스크로 내려가 주인장에게 오늘자 신문 좀 빌려볼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 초선 일에 신경을 쓰느라 며칠째 신문도 제대로 훑지 못한 터였다. 주인장이 건넨 신문을 들고 귀빈장 밖 골목으로 나섰다. 새벽이어서 골목은 아직 어둑어둑했다. 건물 난간에 걸터앉아 신문을 펼쳤다. 종합면, 정치면, 경제면… 제목 위주로 훑으며 영감들과 대화할 때 써먹을 재료를 채집했다. 사회면까지 훑고 신문을 덮으려는데 지면 왼쪽 하단에 실린 기사의 제목이 시선을 붙들었다. <아들 출소하면 같이 살자던 어머니, 차디찬 주검으로...>란 제목. 살갗에서 소름이 일어났다. 제목 아래 달린 기사를 읽어내려갔다.


…7일 오후 주홍빛 하늘 아래서 서울 대림동 살인사건 현장을 찾은 중국동포 A씨(26)는 남편의 폭력 속에서 모텔 청소 일을 통해 힘들게 번 돈을 중국에 보내온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A씨는 지난 3일 오후 지하방에서 새 남편의 칼에 찔려 숨진 결혼이주여성 B씨(51•중국동포)의 아들이다. 숨진 B씨는 6년 전 한국인인 새 남편과 결혼해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구를 떠나왔다. 하지만 새 남편의 훼방으로 국적은 취득하지 못하고 폭력에만 시달리다 결국 살해됐다... 


복희의 목울대에 힘이 한껏 들어갔다. 모텔 청소, 51세, 중국동포, 남편의 폭력, 그리고 아들... 무언가 뜨거운 것이 눈가를 치밀고 올라왔다. 


...B씨의 사연은 기구했다. 과거 중국 현지에 살 때도 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아들 A씨가 전 남편을 살해하면서 겨우 벗어났다. A씨는 중국 현지에서 살인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아 교도소에 복역하던 중 지난달 말 조기 출소했다. 어머니 B씨가 한국에서 모텔 청소 일을 하며 힘들게 번 돈을 현지 교도소로 보내 복역 기간이 감형됐기 때문이다. A씨는 “어머니가 최근 ‘한국에서 같이 살자’며 거금의 입국 준비 비용을 중국으로 보냈다”며 “혹시 그 사실을 새 남편에게 들켜 살해된 건 아닌가 싶어 너무나 괴롭다”고 했다...


귀빈장 안쪽에서 누군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프런트 데스크의 주인장이 창구를 탁탁 치며 신호를 줬다. 복희의 시선이 기사의 다음 문장을 다급하게 더듬었다.


...B씨의 유품을 정리하던 아들 A씨는 평소 남편에게 맞고 지내던 어머니의 흔적을 발견했다. 어머니의 낡은 옷가지들은 칼로 벤 듯 찢어져 있었고, 해진 내의 곳곳엔 혈흔이 남아 있었다. A씨는 어머니 B씨가 청소 일을 했던 모텔도 찾았다. 모텔 주인은 A씨에게 “네 엄마는 신장이 좋지 않아 피가 섞인 소변을 자주 보면서도 쉬지 않고 일했다”며 “좀 쉬라고 하면 ‘아들 때문에 쉴 수가 없다’며 웃곤 했는데 네가 그 아들이구나”라고 말했다...


김 영감이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귓가에 가까워졌다. 김정호의 ‘하얀 나비’였다. 음~ 어디로 갔을까~ 길 잃은 나그네는... 음~ 어디로 갈까요~ 님 찾는 하얀 나비... 복희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신문을 구겨버렸다. 어느새 복희 앞에 선 김 영감이 노래를 뚝 그쳤다. 김 영감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아니, 왜 그려! 무슨 일이여? 구겨진 신문을 든 복희의 왼팔이 사정없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복희는 눈을 질끈 감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해가 뜨고 있는 중인지 검푸른 하늘 저 멀리 주홍빛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


매거진의 이전글 [단편소설] 그 노인의 사정 (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