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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Jul 25. 2019

[단편소설] 그 노인의 사정 (2)

그 노인의 사정 (2)


한낮의 햇볕이 가을바람 사이로 사선을 그으며 떨어졌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김 영감의 발걸음이 인사동 거리 위로 미끄러졌다. 김 영감은 셔츠 앞주머니에서 ‘효도 MP3’를 쓱 빼냈다. 며칠 전 낙원동 거리에서 주운 5만원을 몽땅 주고 산 최신형이었다. 요새 어린 애들이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크기의 몸통에 단추만한 화면이 있고 1부터 0까지 버튼이 큼지막하게 달렸다. 김 영감은 뒷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책자도 꺼냈다. 팝송, 가요, 민요 등 3500곡의 노래 제목이 번호와 함께 빼곡히 적힌 수첩이었다. 김정호의 ‘하얀 나비’는 327번. 음~ 생각을 말아요~ 김 영감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엉성하게 뒤트는 몸뚱이에 걸려 효도 MP3에 꽂혀있던 이어폰 잭이 빠졌다. 곧바로 외장 스피커를 통해 노래가 뿜어져 나왔다. 허, 이것 봐라. 이런 첨단 기능까지? 김 영감은 친구들에게 뽐내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와 오빠, 이거 진짜 끝내주네요. 노인복지센터 중앙 벤치에 자리 잡은 박 영감 주위로 여자들이 몰려들었다. 박 영감의 무릎 위에 노트북처럼 생긴 물건이 놓여 있었다. 이게 북한에도 수출하는 거여. 이거 봐. 화면도 휙휙 돌아가. 박 영감이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서 나훈아 리사이틀 영상이 흘러나왔다. 우와 오빠, 이거 이름이 뭐예요? 얼마에요? 박 영감이 가발임이 분명한 검은 머리를 옆으로 쓱 쓸더니 답했다. ‘효도 비디오’라고, 20만원밖에 안 해. 김 영감은 셔츠 앞주머니에서 꺼내려던 효도 MP3를 다시 밀어 넣은 채 멀찌감치 서서 그 풍경을 지켜봤다. 김 영감이 점 찍어뒀던 여자의 어깨에 박 영감의 손이 슬며시 올라갔다. 어때, 임자. 나랑 요 앞 탑골 벤치에서 가을바람 쐬며 영화나 한 편 보지 않을랑가? 


노인복지센터 생활 6개월 만에 김 영감은 깨달았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결국 돈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내와 오래전 이혼한 김 영감은 연애를 하기 위해 노인복지센터를 찾았다. 73세의 나이에도 이따금 불끈거리는 아랫도리가 말썽이었다. 그런데 막상 와서 살펴보니 연애를 하는 건 죄다 돈 있는 놈들뿐이었다. 돈 있는 놈들이 흥미로운 물건을 사고, 돈 있는 놈들이 좋은 식당에 가고, 돈 있는 놈들이 좋은 방을 잡았다. 여자들이 이걸 모를 리 없었다. 원각사 무료급식소나 들락날락하기 바쁜 김 영감 같은 인간은 애초에 상대도 해주지 않는 것이다. 효도 MP3는 분명 가진 사람이 아직 몇 없었는데. 최신 유행이라더니... 어느새 한물간건가?


양귀비. 시무룩해진 김 영감은 또다시 그 이름을 떠올렸다. 돈 없는 노인들을 위한 구원자라는 여자. 풍문에 따르면 그녀는 키 163cm 몸무게 50kg 정도의 훌륭한 몸매에 새하얀 피부를 가졌고 늘 소녀 같은 옷차림이라고 했다. 한번에 4만원이 전혀 아깝지 않은 황홀한 시간을 선사해주는 여자. 매일 신문이라도 훑는지 정치, 경제, 사회가 돌아가는 걸 알아 대화할 맛까지 나는 여자. 김 영감은 마음이 동하면서도 자꾸만 주저했다. 일단 은근히 소심해 낯선 여자와 마주하면 아랫도리가 말을 안 들을까봐 걱정됐다. 성병도 염려됐다. 몸 파는 여자랑 해도 될까? 그런 염려를 내비치면 노인들은 김 영감을 병신 취급했다. 비아그라, 기계, 주사 다 들고 다닌다니까. 괜히 구원자인 줄 알아? 요즘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병원 검진 결과서도 들고 다녀.


김 영감은 갖은 실랑이 끝에 효도 MP3를 반품했다. 돌려받은 5만원을 전리품처럼 의기양양하게 셔츠 앞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김 영감이 사는 돈의동 쪽방촌 하루 세비가 8000원이니 무려 6일 치의 방값이었다. 낙원동에서 파는 2000원짜리 순두부찌개나 콩나물해장국을 25번 사 먹을 수 있는 돈. 그런 계산을 하고 있자니 지방에서 30년간 이어온 공무원 시절의 쪼잔함과 무엇이 다른가 싶었다. 친구 말에 꼬여 큰돈을 벌겠다고 시작한 프렌차이즈 사업이 망하자 아내는 떠나고 자식들은 척을 졌다. 딸은 여관방을 전전하는 신세고 아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무슨 건설회사에 다닌다. 손을 내밀 수도 없는 관계지만, 내밀려고 해도 내밀 처지가 아닌 것이다.


종로3가 극장 골목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말없이 가만히 서 있는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박꽃같이 흰 피부, 달처럼 환한 웃음, 하늘거리는 옷차림. 양귀비다. 무엇엔가 홀린 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주 서자 그제야 그녀가 말을 걸었다. 나랑 연애하고 가요. 잘해줄게. 우물쭈물하고 있자 그녀가 먼저 앞장섰다. 가요. 종로의 미로 같은 골목 사이로 접어드는 그녀의 치맛자락이 살랑거렸다. 드디어 영접한 그녀를 놓칠세라 빠른 속도로 뒤쫓았다. 그녀가 뒤돌아보며 뭐라고 입을 오물거렸지만 김 영감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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