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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Jul 26. 2019

[단편소설] 그 노인의 사정 (4)

그 노인의 사정 (4)


김 영감의 표정이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쓸쓸해졌다. 초선은 양귀비의 말대로 확실히 유명 인사였다. 효도 MP3에 이어 김 영감이 유행에 뒤처진 인간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 왜 인제야 알았을까, 하며 노인복지센터 벤치에 앉아 씁쓸한 기분을 곱씹었다. 주변에서 초선에 대해 떠들던 노인들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근데 최근에 초선 뒤꽁무니 졸졸 쫓아다니던 양반 둘 있잖여. 필승 아저씨랑 구두 영감? 그러고 보니 그 둘 요새 안 보이네. 그니까 말여. 아니, 필승 아저씨는 그렇다 치고 구두 영감은 내가 뭔 소식을 들었는디... 필승 아저씨와 구두 영감이라면 김 영감도 잘 알았다. 젊었을 적 공군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뭔 일을 겪었는지 군모를 쓰고 다니며 시도 때도 없이 필승을 외쳐대는 필승 아저씨와, 족히 30년은 된 듯한 낡아빠진 구두를 사시사철 신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구두 영감. 초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면 두 사람을 만나야 했다. 김 영감은 문득 긴장한 탓인지 망신살만 뻗치던 양귀비와의 시간이 떠올라 아찔해졌다. 초선은 어떤 여자인지 속속들이 알아보고 여유있게 만나리라.


필승 아저씨는 온데간데없었다. 탑골공원의 손병희 선생 동상 앞에서 시도 때도 없이 경례를 올려붙여 비둘기보다도 자주 보이던 양반이었는데. 필승 아저씨가 즐겨 찾던 팔각정을 훑어봐도 후문 커피자판기 앞을 찾아가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필승 아저씨? 나도 못 본 지 오래됐는데. 동네 소식통인 이발소 골목 노인들에게 묻어봐도 행방이 영 묘연했다. 그의 마지막 흔적은 낙원상가 4층 실버영화관에서 발견됐다. 2000원으로 고전 영화를 볼 수 있는 곳. 전쟁영화가 내걸릴 때마다 필승 아저씨가 발 빠르게 찾아 포스터를 향해 필승을 외치던 장소다. 필승 아저씨가 가장 좋아하던 영화는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지옥의 묵시록’이었다. 특히 그는 킬고어 중령이 나오는 장면마다 필승을 외쳐댔다. 영화에서 킬고어 중령 일행은 마치 소풍을 떠나는 듯한 표정을 한 채 헬리콥터를 타고 베트콩 마을을 공격하러 간다. 동년배인 매표소 영감에게 최근 필승 아저씨를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필승 아저씨의 군모를 꺼내 보였다.


풍이 왔다니께. 풍? 그래, 중풍. 일주일 전인가. 허파에 바람 든 표정으로 초선인가 하는 년을 만나고 왔다며 자랑하드라고. 그리고는 표를 건네받다가 갑자기 픽 하고 쓰러지는 거여. 놀래서 뛰쳐나가보니 바닥에 자빠져서는 눈이 삐뚤어져 있드라고. 괜찮냐고 흔들어봐도 말도 못 허고... 놀라긴 했지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이 거리의 노인들에게 갑작스레 질병이 들이닥치는 건 흔한 일이니까. 그래도 필승 아저씨는 의외였다. 정신머리는 없어도 몸 하나는 건강해 보였는데... 김 영감의 마음속에 수많은 상념이 어지럽게 적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구급차 불러서 태워 보냈제. 바닥에 군모가 놔뒹굴길래 주워놨고. 영화가 상영 중이던 때라 주변에 사람도 없었네. 김 영감은 칠판을 지우듯 상념을 걷어냈다. 이번엔 구두 영감의 거취에 대해 물었다.


그 영감은 얼마 전 죽었잖여. 죽었다고? 그래, 벌써 한 3주 됐네. 그건 소문 좀 났을 텐디? 구두 영감은 김 영감처럼 돈의동 쪽방촌에서 홀로 살았다. 시신이 발견된 곳도 거기였다고 했다. 구두 영감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도 아마 나일겨. 한 달 전쯤에 눈이 이만해져선 초선인가 그년 만났다고 난리를 피웠는디... 그러고 보니 그 영감도 마지막에 초선 타령을 했구먼? 구두 영감의 시신은 발견 당시 바닥에 엎드린 채 누워있었고 이미 꽤 부패한 상태였다고 했다. 모르지 뭐, 왜 갑자기 죽었는지... 그때 나도 전화 받고 쪽방촌에 구경 갔잖여. 구급차가 실어서 데려가드라고. 구두 영감은 기초노령연금 20만원이 나오는 매달 25일만 바라보며 살았다. 큰아들이 내로라하는 병원의 피부과 과장으로 있다는 데도 그 모양이었다. 자식들과의 관계야 들은 바 없지만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사업 실패로 아내와 진작에 갈라섰다고 하니 자식들과도 왕래가 없을 게 뻔했다. 늘 원각사 무료급식소에서 마주치던 구두 영감… 김 영감은 마치 성호를 긋듯 미간 사이를 여러 번 긁었다.


양귀비는 귀빈장에서 일을 마친 뒤 김 영감에게 4만원을 돌려주며 제안을 하나 했다. 초선이란 여자와 만나서 관계를 한 번 가져달라는 것. 그 후 자신에게 돌아와 초선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유를 설명하진 않았지만 김 영감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김 영감은 사탕 하나 사줄까, 라는 질문을 받은 아이처럼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귀빈장을 나와 생각해보니 뭔가 꺼림칙했다. 양귀비는 왜 굳이 하루 일을 허탕까지 쳐가며 그런 부탁을 했을까. 미심쩍은 마음에 초선이란 여자에 대해 알아봤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녀와 자주 만났다는 필승 아저씨에게 풍이 오고 구두 영감이 죽었다는 사실 말고는. 김 영감은 꿀꺽 침을 삼켰다. 실버영화관을 나온 그는 잠시 거리를 배회하다가 주먹을 꽉 쥔 채 종로3가 극장 골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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