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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김미생 Jun 10. 2020

핏빛 가득한 피난길을 떠나온 아이들

미얀마 난민촌 이야기/1편

한 주가 끝나가던 지난 일요일 저녁, 전 세계 코로나 19 확진자 수가 700만 명을 넘어섰다는 TV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아시아, 북미, 아프리카까지 지구촌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19의 위협은 난민촌마저 덮쳤다고 한다.


얇은 비닐 하나로 만든 난민 텐트에서 생활하며, 몇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공용 화장실을 나누어 써야 하는 난민촌. 사실 그곳의 사람들은 코로나 19가 지구 상에 발병하기 전에도 이미 수많은 질병과 전염병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앵커의 목소리에 문득 2년 전 이맘때 찾았던 방글라데시의 미얀마 난민촌 아이들이 떠올랐다.


‘얘들아 안녕하니?'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고 싶은 마음으로,

그날의 출장길을 되새겨 본다.




지난 2018년, 한 언론사와의 미얀마 난민촌 동행 취재를 한창 준비하고 있던 때. 제주 예멘 난민 이슈가 불거지면서 TV 뉴스와 신문 1면이 '난민'이란 두 글자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국제적인 이슈가, 우리가 생활하는 마을과 이웃의 영역으로 들어서면서 관심과 함께 매서운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한 여론 때문인지 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출장을 떠났다.



방글라데시 해안 마을 콕스바자르(Cox’s Bazar)의 해변길을 따라 늘어선 하얀 비닐 천막들. 이곳은 2017년 미얀마에서 발생한 소요사태로 분쟁을 피해 이웃나라 방글라데시에 피난을 온 90 명의 미얀마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난민촌이다. 내가 근무하는 여의도 지역 면적의 3배에 달한다니, 얼마나 방대한 넓이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나무로 얼기설기 엮인 펜스 입구를 들어가니 난민촌이 보이기 시작한다. 빽빽하게 늘어선 비닐 천막과 열기에 숨이 훅 막혀온다. 오물과 곳곳에 고인 물 웅덩이로 질퍽한 흙바닥. 현지 직원들이 난민촌에 들어서기 전에 고무장화를 신으라고 건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고무장화 속으로 차오르는 습기와 땀, 길가의 오물에서 풍겨오는 악취, 구름 하나 없이 내려쬐는 강한 태양빛, 웅성웅성 낯선 동양인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난민촌 사람들. 순간 머리가 띵하고 쓰러질 것 같았다.


2017년 소요사태 이후 형성되어, 이제 막 1년이 채 안된 난민촌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나뭇가지와 노끈, 비닐 방수천을 엮어 만든 3평 남짓의 천막집에서 평균 6~8명의 가족이 생활한다. 전기, 물, 배수시설, 화장실, 그 무엇도 없다. 빽빽한 천막집들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2칸의 공용화장실을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함께 사용한다. '도대체 샤워는 어디서 할 수 있지? 요리는 어디서 하는 걸까?' 눈앞에 펼쳐지는 믿기지 않는 광경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인터뷰이를 만나기 위해 천막 사이사이를 지나 걷던 중 비닐과 나뭇가지를 엮어서 집을 지으며 놀고 있는 한 남매를 보았다. 난민 텐트를 만드는 것이 이곳 난민촌에선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기에, 아이들은 어른들이 천막을 만드는 모습을 본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인형이나 로봇 등의 흔한 장난감도 없는 이곳에서, 길가에 뒹구는 비닐과 나뭇가지가 아이들의 유년시절을 대신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한 소년의 집을 찾았다. 허리를 숙여서 작은 난민 텐트 안으로 들어서니, 눈망울이 반짝이는 어린 소년과 아버지가 있었다. "어떻게 이곳 콕스바자르 난민촌에 오시게 된 걸까요?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조심스레 건넨 질문에 소년의 아버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준다. (피난 당시 챙겨 온 이 핸드폰 덕분에 피난길에서 잃어버린 다른 가족들과도 다시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 속에는 불에 탄 잔해들이 보였고, 나는 이것이 무슨 사진인지 되물었다. 사진 가운데 보이는 게 이웃집 사람이라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하고 다시 들여다보니, 사진 속 불에타 알아보기 힘든 사람의 형체가 보인다.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실제로 사람의 주검을 보니 순간 몸 안에서 무언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소요사태가 나던 날 밤, 저와 아이들은 자고 있었어요. 그러다 총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놀라 뛰쳐나와 보니 이웃집이 모두 활활 불타고 있었어요. 겨우 몸을 숨기고 살아남아 아이들과 열흘 넘는 시간을 걸어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날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어요. 잊히지 않아요."



아빠의 손을 잡고 피난을 떠나온 11살 소년은 자신이 그린 한 장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우리 기관이 아이들의 심리치료와 트라우마 회복을 위해 진행하고 있는 미술교실에서 그렸다고 한다. 그림 속에는 빨갛게 칠해진 손이 보였다. '이건 뭘 그린 거야?’하고 물으니 소년은 담담히 대답했다.


"아빠랑 동생들이랑 도망쳐오면서

길가에 사람들이 죽어있는 걸 보았어요.

이 손은 잘린 채 피가 흐르고 있는 거예요."


초등학생 소년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비현실적일 만큼 끔찍한 이야기들.

그날 그곳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평범하게 회사에 다니던 직장인. 농작물을 기르던 농부. 엘리트 대학을 나와 꿈을 펼치려던 청년.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미얀마 사람들은 그날 이후로 모든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로힝야족을 비롯한 미얀마 소수 민족에 자행된 무자비한 폭력과 민족 탄압. 이런 일이 왜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두어 시간 남짓 소년의 가족과 인터뷰를 하고, 우리는 난민 텐트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텐트를 나와 갑자기 밝은 햇살과 마주하니 눈이 부셨다. 강렬한 햇빛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또다시 즐비하게 늘어선 천막들이 보인다. 천막 하나하나마다, 어떤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식량을 배급받는 시설과 보건소, 신생아 및 산모 쉼터 등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하다 보니 오후 3시 반남짓. 현지 직원은 우리 일행에게 이쯤에서 오늘 일정은 마무리하고 내일 다시 오자고 했다. 보통 해외출장을 가면 저녁 6시까지 일정이 이어지는 데 반해, 미얀마 난민촌에서의 일정은 오후 4시 전에 종료됐다. 방글라데시 정부에서 4시까지만 취재를 허가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난민촌에는 전기 시설이 없기에 해가 지고 나면 취재를 간 방문자나 NGO 활동가들이 여러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한다. 군인들이 상시로 난민촌을 지키며 범죄나 사건,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키고 있지만, 난민촌이 워낙 넓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기도 쉽다고 한다.




아쉬움을 뒤로 한채, 내일을 기약하며

우리 일행은 숙소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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