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냥 옆집의 육아

TV 예능의 육아 판타지가 아닌.

by 게으르니스트

육아전문가가 스타인 시대다.


... 그래서 그분들이 전문가인 것은 잘 알겠다. 그런데 왜 그분들의 유려한 언변과 풍부한 자료 앞에서 덜떨어진 부모가 된 기분으로 남겨지고, 그렇게 뒤돌아 서면 못난 부모의 미안한 마음으로 아들을 품 속에 안아주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들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걱정하는 건 바로 아빠인 나임에도 말이다.


육아는 어렵다. 내가 낳은 아이라 내 마음대로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도, 그렇게 될 수도 없음을 안다. 한쪽으로 손을 잡아끌고 싶지만 아이 나름의 판단도 소중히 해야 함을 안다. 그 모순된 고민들 사이에서 해답을 찾아 해메이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으면, 그들을 타깃으로 육아전문가라는 솔루션을 내어줄 정도로 세상이 관심을 기울일까. 다양한 임상례와 아동심리학 이론으로 무장한 여러 육아전문가들이 '정답'을 내놓으며 TV 스타로 떠오르고, 예능이며 광고며 온갖 시장이 그에 열광하고 있으니.


육아는 TV 속 관상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걸까. Source: Pexels




물론 전문가의 분석이 꼭 필요할 때가 있다. 아이가 이상행동을 보이거나, 주변 친구와 잦은 문제를 일으키거나 할 때는 소아과 의사의 진단이 필요하다. 육아에 지쳐 번아웃이 찾아온 부모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이 필요하다.


하지만 육아전문가와 함께 하는 TV 예능이나 유튜브 채널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불편하다. 그 전문가들은 내 아이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해야 하는지, 내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종종 이야기한다. 전문가들이 가진 학위와 업력의 후광을 두른 그 말들은 때로는 부모들의 행동을 평가하고, 때로는 부모들의 행동을 수정하려 한다. 그리고 종내 그 말들은, 아이와 함께 인생길을 걷고 있는 부모들의 앞에 갑자기 콱 떨어져 박힌 표지판이 된다. 짧게는 아이가 독립할 때까지, 길게는 부모가 세상과 이별할 때까지 수많은 갈림길을 헤매야하는 그 '부모됨'의 길 위에서,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


그 표지판은 항상 부모를 내려다보며 아무 말 없이 방향만 가리킨다. 그 앞에 선 부모들은 묻는다.


"이 길이 제 아이에게도 맞는 길인가요 ?"


하지만 표지판은 대답 없이 방향만 가리킨다. 말이 된 표지판은 권위라는 힘을 얻은 후엔 말을 잃는다. 권위를 둘러 쓴 말은 해야 할 말을 권위가 대신하므로.


ⓒ Strider


결국 권위 입은 말을 대답이라 여기며, 부모들은 표지판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권위는 거짓말하지 않아', '많은 사람이 인정한 길이야'라는, 약간은 불안하지만 기대고 싶은 믿음을 가슴에 품고 발을 내딛는다. 같은 길을 선택한 수많은 다른 부모들이 덧붙인 신앙 간증 같은 댓글들을 응원 삼으니 조금 더 신뢰가 간다. 그리고 전문가의 조언대로 아이를 대해본 오늘 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작은 위안을 얻는다. 그 길이 정말 맞았는지에 대한 대답은, 아이가 좀 더 자라 있을 저 먼 훗날에 놓여 있음에도.



육아는 버겁다. 그럼에도 나의 부모됨이 맞갖은 건지 확신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아이는 점점 자라 내 품 속에서 조금씩 벗어나려 한다. 그 불안감과 조급함 속에서, TV던 유튜브던 책이던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권위 있는 전문가의 말은 분명 안심되는 마음 기댈 곳이리라. 때로는 혼내는 듯하고, 때로는 위로하는 듯한 그 말들은 우리 아이를 향한 그들의 진심인 것만 같다.


부정할 수 없다. 여러 전문가들이 시간을 들여 쌓은 지식에는 분명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뒷맛이 개운치는 않다. 그저 내 속 어딘가에 만사 불편러가 살아서 감히 전문가의 권위에 대들고 싶은 것이거나 혹은 그들이 잘 나가는 것에 배알이 꼴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60억의 사람이 산다면 60억의 개성이 존재한다던 누군가의 말을 나는 믿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같은 부모에게서 나서 자란 나와 내 동생, 같은 조부모에게서 나서 자란 내 부모님과 그 형제들이 다른 바를 보면 그 증거가 뚜렷하지 않은가. 아이가 하나이던 열이던 상관없이 모든 아이는 이 세상에 '처음'이자 '유일'이다. 그 형이 다르고 그 아우가 다를 테니까.


그래서, 그 전문가들의 말이 우리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감히 단언해 본다.


전문가는 단 한 번도 우리 가족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지 않은가. 그들이 읽은 논문 속 실험은 우리 아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몇십 명, 몇 백 명 혹은 몇 천명의 표본으로 짧은 시간 통제된 조건에서 얻어 낸 심리학 실험의 결과 위에서 이야기하는 전문가들의 말에서 안도감을 얻고 싶지는 않다.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던 적이 있다고 해서 못난 부모가 된 듯한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 그들의 가이드대로 했음에도 아이가 따라오지 않을 때, 나의 미숙함이나 아이의 무반응을 원망하고 싶지도 않다.


Source: Unsplash


우리 아이는 기분이 좋을 때 어떻게 웃는지, 화가 났을 땐 어떤 미운 눈을 하는지, 밥상머리에선 어떤 버릇이 있는지, 아침에 일어날 때 어떤 기분으로 일어나는지 전문가들은 알지 못한다. 도무지 잠재워지지 않는 아이의 생떼 앞에 아이의 감정에 귀 기울이라던 전문가의 조언이 먹히지 않을 때, 우선 상황을 통제해야겠다는 독립된 성인으로써의 존재감 대신 '우리 애는 왜 TV에 나오던 아이처럼 안 되는 거야', '나는 이것도 못하는 못난 부모인가' 같은 낙심과 함께 우는 아이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부모의 절망감도 전문가들은 알지 못한다.


만약 그 세심한 관찰이 결여된 조언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면, 그저 조언이 너무 뻔해서 어디에나 통용되는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아이에게 항상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세요'와 같은. 만약 내 아이를 그 전문가에게 데려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졌다면, 그 조언은 아마도 잘 짜인 광고였을 것이다. 조언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면 그 자체로 완결된 해답을 내놓았을 테니까.


육아로 고민하는 부모들은 어쩌면 '옳은 해답'보다는 '빠른 대답'을 찾고 있는 게 아닐까. 학창 시절 단답식 정답을 찾는 방식에 길들여진 우리 세대는 육아에서도 마주한 문제를 빨리 해결해 버리고 싶은 것 같다. 어쩌면 아이가 보여주는 새로운 매일매일에 매번 새로운 해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 귀찮고 불편할 수 있다. 그래서 그저, 지금 당장 귀 기울여도 리스크가 적은 전문가의 말을 쇼핑하듯 주워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육아휴직의 날들을 보내며 이 글들을 쓰기로 했다. 기실은 오늘, 또 이번 주, 또 이번 달을 아이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인 주제에 말이다. 물론 내 아들이 만 네 살 남자아이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육아 방법이 남들에게 내세울 만큼 훌륭한 모범이 되는 것도 아니다.


사실 고픈 것은, 다른 부모들의 육아 이야기이다.


함께 육아 고민을 나누고, 집집마다 아빠 엄마들이 감추고 있는 비장의 육아 필살기며,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질겁할 금기사항 같은 것들을 서로 두런두런 말하고 또 들었으면 좋겠다. 연구실에서 나온 잘 정제된 '권위 있는 말'이 아닌, 맘까페나 캐럿마켓에서 단답형으로 '어디 학원이 좋아요?'라고 묻는 게 아닌, 아이와 뒤엉키며 어제는 울고 오늘은 웃고 결국 내일은 따뜻한 시선을 마주할 수 있는 그런 육아. 이웃집 부모들과 아파트 복도에 서서 '우리 애는 이래요', '그 집 애도 그래요?', '아이고, 애들 다 똑같구나.', '근데 이거 해보니까 괜찮던데요.' 하는 것처럼, 옛날 우리 엄마들이 나누던 잡담처럼 푸근하지만 진또배기 사골 국물처럼 현실 육아에서 푹 고아져 나온 그런 경험칙들을 자기 아이를 정말 사랑하는 그런 부모들과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다.


서로의 팁들이 내 아이에게 통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 집 아이랑 우리 집 아이는 다르니까 그럴 수 있다 라는 생각은 전문가의 권위에 짓눌려 있는 생각보다 마음에 깃들기 쉽다. 그렇게 그런 나눔들이 겹치고 다시 겹쳐지면 우리 세대의 육아가 갖고 싶은 어떤 모습이 될 것만 같다. 우리 사회도 이제 과거와 같은 학업 중심의 획일화에서 벗어나, 성장과 성취의 다양성을 품을 만큼은 성숙해졌으니까.


Source: Unsplash


그래서 먼저 내 것을 내어놓으려 한다. 나는 '아빠의 육아휴직'이 나에게 선물한 작은 순간들을 이 글을 통해 다른 부모들에게 먼저 나누고 싶다. 아주 평범한 회사원 아빠지만, 그런 아주 평범한 아빠 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과 감성으로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틔워낸 깨달음이라는 것을 담으려 한다. 험한 세상을 여기까지 간신히 헤쳐온 평범한 회사원 아빠는 눈치와 감각이 만렙이다. 어느 하나에도 전문가는 아니지만, 전문가가 아니기에 섣부른 판단도 하지 않을 수 있다. 무 자르듯 판결을 내리는 전문가의 말 대신, 사랑이 넘치는 평범한 아빠의 그 눈치와 감각으로 내 아이의 앞에 놓인 수없이 많은 날들을 소중히 되새겨 보고 또 기록하고 싶다.


일 년이 채 안 되는 육아휴직의 경험으로 감히 육아를 이야기하며 객쩍은 글자들을 늘어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글이 있어, 부모와 아이 사이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깨달음의 소중함에 어딘가의 어떤 부모들이 눈 뜨게 된다면, 혹은 육아의 '빠른 대답'의 홍수 속에서 어딘지 모를 답답함을 느끼는 어딘가의 어떤 부모들이 있어서 서로에게서 답을 구하기 시작한다면 나의 이 글자들은 그 갈 곳을 제대로 찾은 것이리라.



@ 우리 집



네, 맞습니다. 만사 불편러 맞고요. :)

프랑스 육아처럼 해야 된다, 네 살 육아는 다르다, 애착육아를 해야 된다 등등, 육아전문가의 팁이라는 것들을 남에게 뒤지지 않게 많이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로서의 마음가짐을 갖는 데 있어 물론 그 책들과 영상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세계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도 함께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책에서는 여러 가지 사례들로 부모들과 아이들을 유형화하여 분석하고 답을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와 아내, 우리 아이를 그 유형 안에 넣으려는 시도는, 마치 혈액형이나 MBTI 성격 분석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인용한 연구 속에서는, 연구자의 목적이나 가설에 맞추어 여러 가지 사실들이 재단되어 채택되거나 혹은 버려졌을 것입니다. 저는 그 지점이 불편했습니다. 전 인류를 표본으로 하지 않는 이상 나와 아내, 그리고 우리 아이 세 가족에게 정확히 들어맞을 수 없는 여지가 있을 것임에도 '전문가'라는 권위 때문에 그 조언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게 되는 그 구도 가요.

전문가가 필요한 순간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 육아마저 전문가에 의존해야 하는 일처럼 몰아가는 최근의 경향은 저에게는 문제가 있어 보였습니다.

얼마 전, 아이의 동네 친구 가족을 초대하여 저녁을 함께 하며 서로의 육아 생활로 세 시간 넘게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보통 육아 이야기는 엄마들끼리 모여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두 집의 아빠 엄마 모두가 함께하는 그 시간은 참 좋았습니다. 아이들은 거실에서 자기들끼리 신나게 놀았고, 아빠 엄마들은 와인잔을 기울이며 이건 이게 좋다더라, 저건 이렇더라 하면서 신나게 수다를 떨었습니다. 박사님의 권위가 자리를 비운 대신, 아빠의 관점, 엄마의 관점, 아이들의 생각 모두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실험실에서, 보고서에서 정리된 아이의 행동유형이 아닌 진짜 가족의 생활, 가족의 육아가 말이죠.


동글이에게,

네가 만약 아빠가 되면 처음에는 모르는 것 투성이일 거야. 조그맣고 연약한 아기를 처음 받아 안을 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조심스럽기만 하거든. 그때는 아기가 아픈지, 배고픈지, 그런 것들을 더 많이 신경 써야 하는 시기라서, 전적으로 의사 같은 전문가들의 손을 빌려도 좋단다.

하지만 아기가 좀 더 자라서 어린이가 되어 세상에 적응해 나가는 시간이 되면, 그때는 아빠인 네 생각과 경험도 중요하게 될 거야. 너보다 네 아이를 잘 아는 어른은 찾기 힘들 테니까. 너와 네 아이가 마주할 문제들을 아빠와 너도 함께 헤쳐나갔단다. 아빠와 네가 지나왔던 그날들을 되새겨 본다면 조금은 도움이 될 거야. 그건 오래전 아빠의 친구들의 아빠 엄마들, 네 친구들의 아빠 엄마들과 함께 만들어 온 우리 집 만의 육아 노트 같은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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