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추억의 인해전술

육아휴직을 선택한 '아빠'의 욕심

by 게으르니스트

어릴 적 놀이터에서 소꿉놀이를 하면 나는 붙박이로 아빠 역할이었다. 그 소꿉놀이 가정에서 아빠의 역할은 단순했다. 아침이 되면 집 역할을 하는 모래판에서 멀찍이 서 있는 미끄럼틀을 회사 삼아 나갔다가,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 모래판으로 돌아오면 되었다. 친구가 그렇게 해주길 원했던 것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하길 원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엄마 역할의 친구와 아이 역할의 친구는 스무 발자국 떨어진 미끄럼틀에서도 들릴만큼 재잘거리며 모래밥이며 조약돌 반찬을 먹고 또 먹였다. 아빠인 나는 미끄럼틀에서 서성이다가 엄마인 친구가 신호를 주면 모래판으로 돌아왔다. 그 시절 나는 아빠가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 지 알지 못했고, 그래서 모래판 집에서 엄마와 아이가 노는 모습을 멀찍이서 기웃거렸다. 혼자 미끄럼틀에서 놀다가 엄마의 손짓을 놓쳐 모래판 집에 돌아가는 타이밍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늦게 돌아가면 아이 역할 친구는 잠든 척을 했고 엄마 역할 친구는 늦게 온다며 타박이었다. 친구는 그 나이에 어찌 안 것인지 바가지 긁는 실력이 제법이었다.


또 그렇다고 집에 온 다음에, 아빠 역할에 어떤 임무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 역할 친구는 늦게 온다며 바가지를 긁고는 다시 소꿉놀이 셋트로 모래 요리에 열중했고, 나는 멀뚱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이제 자자 !' 소리와 함께 그냥 옆에 앉아 잠드는 연기를 했다. 사실 그것 말고는 다른 아빠 역할이 생각나지 않았다. 집에서 가장 많이 마주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흉내냈을 뿐이었다.


엄마 역할 친구는 잠들어 있는 아이에게 빨리 아침으로 모래밥과 조약돌 반찬을 먹이고 싶었고, 갓 잠든 척한 내게 빨리 다시 출근하라고 성화를 부렸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는 척 하며 다시 미끄럼틀 회사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아빠가 미끄럼틀 회사에 다녀오는 것으로 금새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갔다. 소꿉놀이 가정의 시간은 그렇게 빠르게 흘러갔다.


Source: Unsplash


어린 시절, 퇴근한 아버지는 어머니가 차려주는 고봉밥을 순식간에 비우고는 방 한가운데 누워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들곤 했다. 방 한구석에서 동생과 놀던 내가 가장 많이 접한 아버지의 모습은 하얀 러닝셔츠 바람으로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아버지의 등짝이었다.


아버지는 집에서 말수가 적었다. 흔히 말하는 '경상도 남자'도 아닌데, 집에 와서 가장 자주 하는 말이 '밥 줘'와 '자자' 였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기거나, 아버지가 내게 와 나를 번쩍 안아 올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늘 팔죽지 한 개 만큼의 거리 앞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등짝 건너편의 텔레비전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은하철도 999 대신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얇은 월급봉투를 꾸역꾸역 집으로 가져오려고 하루 종일 회사에서 분투했을 것이고, 철없이 입을 벌려대던 꼬맹이는 그 봉투가 얼마나 얇은지 모르고 그저 저 좋다는 것에만 짹짹 입을 벌려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아버지가 무엇을 하느라 내가 잠에서 깨기 한참 전 밖으로 나가 내가 잠든 후에야 겨우 집에 돌아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버지는 아침에 나가 밤에 오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아버지의 하루를 따라 소꿉놀이에서 아빠 역할을 하며 자랐다.


내가 초등학교에 가고,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에 갔을 때에도 아버지는 아침 일찍 회사로 나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왔고, 집에 있는 날은 거실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았다. 나는 출근하는 아버지의 등에 "안녕히 다녀오세요." 라고 인사했고, 밤 늦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버지에게 "안녕히 다녀오셨어요."라고 인사했다. 그것은 내가 말문이 트였을 무렵부터 했던 인사로, 입 속에 박힌 인 같은 것이었다. 밤 늦게 초인종이 울리면 집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히 아버지였으므로 내 입은 자동문처럼 안녕히 다녀오셨어요라는 인사를 내었고, 아버지는 '그래'라는 짧막한 대답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셨다.


집에서 말수가 적었던 아버지와는 하루 종일 나눈 대화가 그 잘 다녀왔느냐는 인사 뿐이었던 적도 있었다. 어쨌든 그 인사는 아버지와 나 사이에 말이 사라지는 것을 막아주었지만, 역설적으로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그보다 깊은 대화나 함께한 기억이 적었다. 아버지는 일하는 시간이 길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이 밖에서 밥벌이를 하는 대신 주부나 학생으로써의 일에 충실하기를 바랬고 그 대신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고자 했다.


그런 아버지의 책임감과 노력 덕택에 우리 집은 넉넉하진 않지만 큰 굴곡 없이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월급봉투를 끊기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의 그런 노력은 아버지를 더 긴 시간 일하게 했고,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도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 밤 늦게 집에 돌아오게 했다. 그 시간 동안 나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집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공유하는 시간과 대화와 기억이 점점 줄어들어갔다.


ⓒ Strider


그런 아버지가, 환갑을 조금 넘긴 해에 돌아가셨다.

암이었다. 평생 감기약 드시는 것조차 보지 못했는데, 한여름 어느 날 감기 걸린 것처럼 아버지는 갑자기 목에서 쉰 소리를 냈다. 여름에 왠 감기인가 싶었지만 한참 동안 병원에 다녀도 잘 낫지 않았고, 한 달쯤 지나 어머니가 '아빠 감기가 잘 낫지 않는다. 걱정이 된다'고 할 무렵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의 가슴에 있는 암덩어리가 어디서 온 것인지 몇 달간 갈팡질팡하던 의사들은 가족들이 고민할 틈도 주지 않고 수술이다 항암치료다 하며 아버지의 몸을 들쑤셨다. 병원에서 달라는 대로 돈을 아끼지 않았음에도 아버지는 하루하루 야위어 갔고 그 다음 해 봄, 한창 핀 꽃이 다 지기도 전에 우리 가족의 곁을 떠났다.


황망했다. 평균 수명이 칠십 세가 넘어가는 요즘 시대에 드물 정도로 너무 갑자기, 일찍 돌아가셨다. 뭘 어떻게 해볼 수도 없을 만큼 병마는 일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아버지를 데려갔고 대체의학이니 마음의 준비니 하는 것조차 시간의 사치였다.


그러나 그런 황망함을 압도하는 것은,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이었다.

자식들이 안정된 직장에서 넉넉하진 않지만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을만큼 벌면서 가정도 꾸리기 시작한 때였다. 일에서 손을 놓고 손주의 애교도 보고 가족들과 함께 여행도 다니며 행복한 추억을 쌓기 시작해야 하는 때였다. 아침 일찍 나가서 밤 늦게 들어오지 않아도 괜찮을 즈음이었다. 궁궐에서 호사를 누리길 바랬던 것도 아니었고 다만 여염집에서 누리는 그런 당연한 듯 평범한 행복을 겨우 꿈꾸기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그것은 결국 이룰 수 없는 꿈으로 남아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평범해 보이는 타인의 일상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한동안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 현실을 체감하게 된 것은 장례가 끝나고, 1주기가 끝나고, 2주기가 끝나고,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른 후였다. 집에서 다른 가족들과 TV를 보다가도, 아버지가 퇴근하시던 시간이면 나도 모르게 초인종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들어오실 것만 같은 착각이 몇 년이나 계속되었다. 짐짓 바라본 현관문이 그 늦은 시간엔 더 이상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가슴 아린 확신과 함께, "안녕히 다녀오셨어요"라는, 입 속에 박혔던 그 인 같았던 인사가 입 속에서 맴돌다 다시 목구멍으로 넘어 들어갔다. 그 짧은 대화가 이제는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4년, 5년 동안 스스로 마음 속에 다져야 하는 것은 명확하지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Source: Stocksnap


아버지와의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없게 되자 남아있는 기억들이 당연스레 소중해졌다. 하지만 집에서 말수가 적었던, 항상 일 때문에 피곤해 했던 아버지와의 기억은 적었다. 그리고 몇 개 안되는 그 적은 수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삶은 언제나 팍팍했고, 안쓰러운 일들 투성이였다. 왜 그런 삶을 살았는지 기억 속의 아버지에게 물어보아도, 무뚝뚝한 아버지는 대답이 없다.


앨범을 뒤적여 예전 사진을 곱씹어 보면 좀 다를까 싶었지만, 앨범 속에도 아버지와 함께 한 날들의 기록은 많지 않았다. 분명 나에게도 부모님에게 방긋대며 애교를 부리던 귀여운 꼬마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유독 귀여워했던 아버지였으니 자기 자식의 애교가 예뻐보이지 않았을 리 없을텐데. 그럼에도 기억도 사진도 충분하지 않은 것은, 그 시절의 아버지가 아침 일찍 나가 밤 늦게 들어오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러지 않고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삶을,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그래서 자식들과 즐거운 꽃놀이 한 번도 애써 나가기 힘겨웠기 때문이 아닐까.


쌍팔년도. 일주일에 6일을 출근해야 했던 피곤한 시절이었다. 아마도 꼰대들이 한가득이었을 회사에 출근한 30대 후반의 젊은 아버지는 거만하기 짝이 없는 상사들에 하루 종일 치이다가 눈치를 보며 밤 늦게 퇴근한 후 힘들게 지하철을 타고 밤 늦게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자기 좋은 것 밖에 모르는 철 없는 어린 자식들은 과자 사오지 않았느냐며 투덜거리거나, 아니면 아버지 들어오는 것도 모른 채 이부자리에 널브러져 자고 있었을 것이다. 일주일에 단 하루 쉬는 일요일에는 야유회랍시고 회사의 꼰대들한테 집 밖으로 끌려 나가거나, 일주일 간의 피곤을 주체할 수 없어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봄의 햇살이 따사로이 쏟아지는 공원을 어린 나와 함께 손 잡고 걸어보고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그러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볼 수 없었던 그런 젊은 아버지의 하루를 이제는 충분히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 때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고단한 하루를 보냈는지, 그 고단한 하루가 진저리 날 때는 없었는지, 그래도 하루 쉬는 일요일에는 아버지는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그런 아버지의 속내를 물어보고 싶어도 이젠 물어볼 기회가 없다.


Source: Unsplash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거진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 사이 나에게도 아들이 태어났고, 나는 아버지가 되었다. 아들은 감사하게도 큰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고, 나도 3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시작한 아빠 노릇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의 시간을 보냈다. 아들은 아빠 괴물 물리치기 놀이에 자지러지듯 깔깔 대고, 아빠가 주는 젤리 한 봉지에 세상 다 가진 듯한 표정을 짓는다. 아들의 그 천진한 얼굴을 바라보고 품에 한가득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에 가슴이 충만하다. 그럼에도 이따금, 아들래미가 아빠와의 이 소소한 시간들을 나중에, 아주 나중에 즐겁게 추억해 주었으면 하는 작은 욕심을 언감생심 품게 된다. 그것은 아버지와의 흐릿한 기억들을 되새김질했던 지난 10년이 마음 시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작은 욕심을 채우려 육아휴직을 선택했다.


심리학자들과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 뇌의 용량에 한계가 있기에 어린 시절의 기억은 자동적으로 지워 나가도록 우리 몸이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아들이 아빠를 추억하고자 흐릿한 기억을 힘겹게 더듬지 않아도 되도록, 더 많은 시간을 아들과 함께 보내려 한다. 더 많은 사진을 남기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줘서, 아빠가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자기의 어린 시간을 함께 보냈는지 아들이 나중에 모를래야 모를 수 없도록 만들고 싶다. 만약 정말로 우리 뇌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우도록 설계되어 있다면, 수없이 많은 추억의 인해전술이라도 펼쳐서 아들의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아빠와의 소중한 추억들 몇 조각을 선명하게 남겨주려고 한다.


웃는 얼굴 만으로도 아빠를 행복하게 만드는, 이렇게도 고마운 작고 예쁜 천사의 어린 시절을 함께할 수 있어서 아빠는 정말 감사하다고, 아빠는 너를 정말로 사랑했다고 전해주고 싶다. 나의 이 마음이 아들의 기억 어딘가에 깊숙히 파고 들어가면 좋겠다. 그래서 언젠가 아빠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없더라도, 아빠가 있어서 행복했다고, 다시 만나도 행복할 거라고 아들이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그것이 아빠로써 가지는 작은, 아주 작은 욕심이자, 육아휴직을 시작한 이유이다.



@ 춘천 레고랜드


저는 미래에 대한 계획 절반,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걱정 절반을 함께 이고 삽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돌아가신 후 바뀐 마인드셋입니다. 평균수명이 80세를 넘어가는 우리나라에서는 과잉 걱정일 수도 있지만, 의료 서비스가 좋아진 것만큼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위험요소도 그만큼 늘어났으니까요.

이런 마인드셋은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꿔주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욜로족으로 살겠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오늘 놓치더라도 내일 다시 잡을 수 있는 기회에는 큰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오늘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기회에 집중합니다. 육아휴직에 대한 결정도 그렇습니다. 물론 제가 육아휴직을 선택함으로써 회사에서의 입지가 흔들릴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복직 후 더 노력하면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고, 만약 그게 어렵다면 뭐, 이직하면 됩니다. 요즘 시대에 이직이 뭐 대수인가요. 저도 벌써 세 번이나 했는데요. (하하하) 하지만 육아휴직,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예쁜 시절을 보내는 아이의 유아기는 지금이 아니면 다시 잡을 수 없다는 말은 너무 뻔한 말일까요 ? 그런데 빼박 진실인 것도 너무 명백하네요.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게 되었을 때, 회사에서의 승진을 하지 못한 걸 아쉬워 할지, 아니면 사랑하는 아이와의 추억을 더 만들지 못한 걸 아쉬워 할지는 너무나 명백했기에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육아휴직을 선택했습니다. 우리 동글이 친구 부모님들은 어떠실까요 ?


동글이에게,

아빠가 너무 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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