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받아라 ! 필살, 생활계획표 !

프로 직장러가 프로 살림러로 변신하기 위한 필살 무기, 생활계획표

by 게으르니스트

회사에서는 덜컥, 갑작스럽게 육아휴직을 통보한 듯 보였겠지만, 사실 나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육아휴직을 결심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내와 아들이 잠든 고요한 새벽시간 태블릿을 들어 생활계획표를 그리는 것이었다. 요즘은 여름방학을 맞이한 초등학생들조차 그리지 않을 것 같은, 바로 그 생활계획표.


이렇게 길게 노동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시간은 어쩌면 멋진 아빠로써 완벽히 변신할 수 있는 인생 마지막 찬스일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밤 늦게 퇴근해서 때 늦은 저녁밥을 먹는 와중에 잽싸게 달려와 놀아달라는 아들에게 '아빠도 밥은 먹어야 되지 않겠니'라며 되려 아들의 인심 없음(?)을 타박했던 못난 아빠였다. 저녁을 다 먹고 난 뒤에는 아빠랑 함께 놀거리를 찾는 아들의 등을 애써 떠밀어 침실로 서둘러 데리고 들어가는 만성 수면부족 환자였으며, 아들래미가 애정하는 '아빠 괴물 놀이'를 어쩌다 한 번 하는 날엔 출렁대는 뱃살에 지레 지쳐 금새 바닥에 쓰러지고 마는 저질 체력의 못난 괴물이었다.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것은, 이미 사십 년이 넘는 동안 깊은 고민 없이 시류에 떠밀려 살아온 인생인지라 아들의 앞날을 위해 뭘 준비해 줘야 하는지 제대로 고민해 본 적이 없는 한심한 아빠였다. 그런 너절한 나 자신을 정당화 시켰던 것은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다는 변명이었다. 한시도 태만히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어떻게 보면 아들에 대한 아빠의 의무이자 당위성의 발로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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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생활만 무려 십육 년을 넘게 했다. 길다면 긴 그 시간을 내 사업도 아닌 회사의 사업을 위해 매년, 매월을 넘어 매주 계획을 짜며 일해왔다. 이 소중한 일 년을 그렇게 허투루게 보낼쏘냐.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살뜰히 계획을 꾸려 살아가리라. 심지어 일 년 동안 수입이 끊기는 것을 생각하면, 일 년 연봉을 기회비용으로 바치고 얻은 값진 시간이다. 아무 계획도 없이 어영부영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길었던 그 회사생활이 그나마 나에게 남긴 흔적 같은 것 중에 하나는, 뭔가 중요한 것을 하고 싶을 때엔 온갖 정성을 들여 그것을 글이나 도식화된 계획표로 만드는 습관이었다.


많은 과학자들이 우리의 몸은 한 번 익숙해진 패턴에 천착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고 하며, 그것이 바로 습관의 무서움이라고 했다. 몸에 녹아든 행태를 반복해야 에너지를 덜 쓴다는 것을 세포 단위에서 알고 있다나. 따라서 그 DNA 레벨에 새겨진 습관의 족쇄를 깨부수기 위해서는 게으른 몸과 정신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줄 강력한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작심삼일을 좌우명 삼아 사십 년 넘게 살아온 나의 하찮은 육신은 바로 그 익숙한 패턴이라는 것을 너무나 사랑한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심혈을 기울여 작성하는 장대한 계획표이다. 계획표대로 살지 않으면, 그래서 그 계획표를 만드는데 들어간 정성을 스스로 저버리는 자괴감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으면 당장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라는 일종의 시한폭탄 용도로 사용하기에 좋은 멋지고 화려한 계획표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약간의 부끄러움을 알고 자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자존심이 게으른 육신을 쪼아 줄 것이 명백하기에, 나는 이 번거로운 습관을 애정한다. 그리고 나의 그 자존심은, 이번 육아휴직이 멋지고 화려한 계획표가 반드시 필요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라고 기꺼이 판단했다.


알록달록 예쁘기 그지 없는 첫 번째 생활계획표.


이러한 비장하고 분연한 각오를 거름 삼아 그려낸 육아휴직의 생활계획표는 보기에 참 아름다웠다.


매일 매 시간 단위로 톱니바퀴처럼 짜여졌지만, 꼭 필요한 것들로 충만해서 하루 하루가 축복 같은 일상... 아침마다 경제 팟캐스트를 들으며 규칙적인 운동으로 건강을 관리한 다음, 트렌디하게 차려입고 사랑이 가득한 눈빛과 함께 아들을 어린이집 문 앞까지 배웅한 후, 우아하게 토스트와 커피로 브런치를 즐기고 나서, 깔끔하게 집안을 정리하는 동시에 5대 영양소가 골고루 함유된 아들의 저녁식사까지 미리 챙겨놓으면, 남은 시간들은 평소 읽고 싶었던 책들을 읽고 우리 가족의 미래계획을 세우기 위한 학습의 시간으로 채워나가는...


만약 정말 이대로만 살 수 있다면, 육아 지침서에 '아빠의 육아휴직 이렇게 한다'로 기록되어도 부족함이 없는 모범적인 부모상을 이룩함과 동시에, 육아휴직을 기점으로 환골탈태하여 개인적으로도 커다란 발전을 이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멋진 신세계가 눈 앞에 몇 일 동안 아른거렸다.


그러나 방심은 사고를 부르고, 자만은 폭망을 부른다고 했던가. 안타깝게도, 그 고양된 충만감 아래 끈적하게 깔린 찝찝한 기시감을 매몰차게 외면한 것이 큰 실수였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마다 온갖 정성을 들여 만들었지만 언제나 '실행 미수'에 그쳤던 '이른바 생활계획표'... 알록달록 총천연색 꾸밈을 받았지만, 언제나 방학 시작과 함께 폐휴지 더미로 직행한 추억 속의 '예쁜 쓰레기'. "지키지도 않을 걸 왜 그렇게 열심히 만드냐"며 어머니에게 타박을 들었던 바로 그 생활계획표가 기시감의 정체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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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그랬을까. 생활계획표 따위, 왜 그렇게 열심히 그렸던 걸까.


16년차 직장인의 곯아터진 비루한 체력을 외면하고 의욕적으로 당겨 잡은 새벽 기상시간은 육아휴직 첫 주부터 뒷걸음질쳤고, 아침햇살 속에서 예쁜 얼굴을 생긋거리며 벌떡 일어날 줄만 알았던 사랑스러운 아들은 아빠의 인내심을 한계까지 시험할 정도로 느긋하게 이불 속에서 기어나왔다. 엎치락 뒤치락 어린이집 등원 전쟁을 치루고 나서 허겁지겁 씨리얼 한 사발을 들이키고 나면, 아들이 온갖 장난감으로 어지럽히고 몸만 쏙 빠져나간 거실은 왜 어젯밤 그대로인지. 차마 아들래미를 욕할 수 없어 거실을 정리하지 않은 어젯밤의 나에게 격하게 쌍욕 한 사발을 건네고 싶은 마음 뿐이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던 어머니의 상투적인 말은 그냥 진리의 담백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육아휴직을 시작한지 한 달, 나는 그토록 멋진 생활계획표에 파산신청을 해야만 했다.




그래. 유명한 경구가 있지 않은가. '계획은 깨라고 있는 것이다'라는.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계획표가 가능한 것은, 아마도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공식 행사에서나 겨우 가능한 것 아닐까. 사실 그런 행사들도 중간에 돌발 상황이 튀어나와 행사가 엉망이 될지 몰라 절치부심하며 리허설에 리허설을 반복하고, 행사 당일엔 수많은 스탭들이 노심초사 만전을 기한다. 하물며 아빠가 혼자 아등바등 꾸려가야 하는 가족의 일과표는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좀 더 가벼워질 필요가 있었다. 아까운 시간을 허우적대며 흘려보내며 얻은 그나마의 성과는,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심은 인정하되 그 욕심에 눌려 하루를 버겁게 끌고 가다간 육아휴직 기간 전체를 망치게 되리라는 것을 빠르게 인정하게 된 것이랄까. 그림 같던 생활계획표 아래 '삭제' 버튼을 미련없이 누르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잘 짜인 계획표를 보며 심적인 만족감을 누리기 보단, 나의 욕망에 충실하기로.


그렇게 '진실의 시간'을 마주한 지 몇일 후, '보기에 아름답던' 그 생활계획표는 성형수술급 다이어트를 거쳤다. 많은 아름다운 계획이 아름답기만 하다가 파멸(?)에 이르는 것을 회사에서 수없이 목도해 놓고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다니 스스로가 참 한심스러웠다. 좀 더 좋은 계획, 그리고 그에 이은 실행을 15년 넘게 회사 생활 내내 고민해 놓고는, 정작 스스로의 생활의 프레임을 짜는 데에는 미숙했다니.


회사 로비에 묻어두고 온 '사무직'의 영혼을 집 안 서재에서 다시 끄집어 낼 줄은 몰랐지만, 화면에 엑셀을 띄워 한참 뚝딱거려 만든 새로운 생활계획표는 이제야 좀 '나다운' 느낌이 들었다. 계획과 실행이 조화로운, '프로 직장러'다운 육아휴직 생활계획표.


새로운 생활계획표의 To Do List 관리 페이지


① 일단 매일의 시간 단위로 일과를 쪼갰던 것을 없애 버렸다. 아무리 세 명짜리 작은 가족의 생활이지만 집 안에서 벌어지는 돌발상황을 해치우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만큼 계획이 밀려버리면 나중에는 해야 할 일들이 밀린 '레드펜' 문제집처럼 쌓일 것이 명백했다.


그 대신, 휴직 기간 전체 동안 꼭 하고 싶은 것들의 리스트만 관리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하고 싶은 일들, 해야 하는 일들과 그 일정을 목록으로 만들고 '일단 이 날까지는 해보자'라는 마음을 소중히 여기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계획표가 바뀌니 매일의 상황에 맞춰 하루의 시간을 유연하게 사용하되, 하고 싶은 것들을 잊지 않고 해나갈 수 있었다.


새로운 생활계획표의 아이템별 진행 사항 정리 페이지


그리고 해야 할 일과 했던 일, 새롭게 찾아낸 정보와 거기서 파생된 새로운 할 일들을 계획표 안에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치 육아휴직 역사 기록표처럼.


사실 이 새로운 계획표는 회사에서 스스로 개발했던 업무 관리 도구 같은 것이었는데, 자잘하지만 의외로 꼼꼼히 기억해야 할 것들이 많은 집안일을 관리하는 데에도 사용하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가지의 간단한 함수만 걸어놓으면 데드라인을 알려주는 알람 역할도 해주니, 매일 30분 정도만 이 계획표를 잘 정리해 나가면 일정을 두고 꼭 해내야 하는 일들과 그것에 관련된 정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에 용이했다. 나만의 '생활 가계부'랄까.




결국 처음의 바램과는 동떨어진, 엉성한 육아휴직을 시작한지 두 달여. 누구나 가진 그럴싸한 계획은 원래 몇 대 얻어 맞으면 엉망이 되듯, 처음에 내가 세웠던 그림 같은 생활계획표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아침 기상시간은 그날 아침 체력에 따라 저절로 유연해졌고, 아들래미는 여전히 이불 속에서 꾸무럭거린다. 어린이집 등원 후 정신을 차려보면 집안은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난장판이고, 매일 세탁기를 돌리는데도 도대체 왜 빨래통에는 매일 빨래가 그득한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새롭게 하나 집어넣으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9개월의 육아휴직 기간을, 회사원 아빠다운 방법으로 잘 보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아내었다. 업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고, 관리하며 회사밥을 먹어온 시절들이 이렇게 육아휴직에 자양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엑셀과 파워포인트를 무기 삼아 회사원으로 살아온 아빠만이 할 수 있는 살림 관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오늘도 장난스럽게 반짝이는 아들의 예쁜 두 눈을 마주하며, 조심스럽게 확신해 본다. 비록 네 기대보단 완벽하지 않을진 몰라도, 다른 어떤 아빠들처럼 화려한 재력이나 특기는 없을지라도, 그래도 이 아빠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총동원해서, 세워놓은 계획대로 차근차근, 어제보단 조금 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가는 중이라고.



@ 집



'이거 하나는 그래도 내가 찐하게 할 수 있지 !'라는 기술을 가지고 오늘도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고 계신 전국의 아빠 엄마들, 응원합니다.

일터에서만 쓰시던 필살기들을 가사와 육아에 사용해 보시면 느낌이 새로우실 것입니다. 뭐라도 좋습니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긴데, 그 긴 시간이 무의미하지는 않았구나. 나도 뭔가 숙련된 사람이구나.' 하는 자존감까지 세워주는 부수적 효과도 있습니다.

저 같은 평범한 회사원은 배운 도둑질이 엑셀이랑 파워포인트 뿐이네요. 하하하. 사무실에서 지겹도록 볼 때는 몰랐는데, 그 하얀 네모칸들도 이렇게 생활을 가다듬을 때 써보니 그 나름대로의 쓸모가 있었습니다. 살림살이라는게 의외로 자잘히 기억할 게 많은데 핸드폰 속 메모장에만 기록해 두기엔 너무 복잡하고 비효율적이더라구요. 예전 어머니가 가계부에 빼곡히 적어놓으셨던 것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마 그것의 디지털 버전이라고 봐야겠지요.


동글이에게,

아빠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매일 뭐 하는지 궁금해 했던 동글아. 가계부 같은 거 쓰고 있었던 거란다.

인생이라는게 어어, 하다가는 금방 흘러간단다. 눈 앞의 일에 집중하다 보면 함께 해야할 일들을 잊는 일이 다반사지. 항상 메모하고, 기록하고, 다시 들춰보고 하는 습관을 네가 꼭 기르면 좋겠다. 이건 아빠가 어릴 때부터도 항상 듣던 조언이지만 왜인지 그대로 실천하기는 참 어려운 습관이기도 해. 그리고 아빠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귀찮아 하는 습관이기도 하고.

원래 몸에 좋은 건 쉽지 않은 법이란다. 그래도 이 어린 나이에도 운동 열심히 하겠다고 엘리베이터를 마다하고 계단으로 올라가자는 너니까, 아마 그런 점에선 아빠보다 훨씬 잘 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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