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육아의 외주화

당신의 아이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필요한 그것

by 게으르니스트

사실 고백할 것이 있다.


'혐오'까지는 아니었지만, 오전 11시 무렵 아파트 단지 주변의 까페에 앉아 커피 한 잔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여성들(feat. 가정주부들)을 고까운 눈초리로 보는 사람들의 무리에 나도 한 발자국쯤 들여놓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아니, 애들은 어디다 던져놓고 저렇게 까페에 앉아서 노닥대고 있는거야 ?'


통계는 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꽤 많은 사람들이 이 여성들에게 이와 같은 논평(?)을 내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한심하기 짝이 없네'라는 식은 아닐지언정, 아이들을 남의 손에 맡겨놓고 대신 얻은 시간을 친구들과 보내는데 쓰는 그녀들을 그동안 그리 아름답게만 본 것은 아니었으므로.


우리 사회에는 '직접 육아'에 대한 어떤 오래된 신화 같은 것이 은근히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최고액권인 5만원 지폐의 모델에 신사임당이 당당히(?) 선정될 정도로 '현모양처'에 대해 찬양하는 문화적 환경 때문이 아닐까.


게시판이나 까페의 글들을 보면 많은 부모들이 아이를 직접 돌보지 않고 위탁하는 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을 지니고 있음을, 그리고 그 부모를 둘러싼 수많은 시선들에 '영유아의 올바른 성장과 훈육은 부모의 몫이다'라는 생각이 두텁게 깔려있음을 발견한다. '직접 육아'가 '24시간 밀착 육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부모가 직접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해 은근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나 또한 부지불식간에 내 정신에 스며든 사회적 스테레오 타입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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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부모가 아이를 돌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과연 부모의 그 돌봄이, 한 날 한 시도 누락됨이 없이 부모가 항상 아이의 곁을 지켜주어야 성립하는 것일까.


이미 핵가족을 넘어 한부모가정 등 새로운 가정의 형태가 일반화된 우리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손에 내 아이를 맡긴다는 것은 우리 부모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할까.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며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범벅이 된 얼굴로 돌아서는 워킹맘 엄마에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괜찮은 엄마랍니다 ~'라며 마음을 어루만지는 감성 케어는 부모들의 가슴 한 켠의 그늘을 지워주기에 충분한 것일까. 혹은, 전업주부의 삶을 선택한 아빠 엄마는 아이를 보육기관에 맡기는 것이 그렇게 뒤가 켕기는 일이어야 하는 것일까.


뭔가 조금 더, 이성적으로 만족할 만한 위탁 보육의 당위성은 없는걸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던 2022년 초.

그것 말고는 달리 코로나를 막을 도리가 없었던 탓에, 그리고 마침 타이밍 좋게 육아휴직을 개시한 덕택에 두 달여간 아들을 어린이집에 거의 보내지 않고 직접 돌보게 되었다. 덕분에 아들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그리고 육아와 집안일에 꽤 진심이었던, 그래서 자기 아이인데 집에서 키우는 게 뭔 대수냐며 가정 보육에 자신만만했던 어떤 한 아빠(바로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아들과 엎치락 뒤치락 밀착하며 지낼 수 있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직접 보육의 신화는 추앙받아야만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아들래미와 함께 직접 '임상 실험'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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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이런 저런 육아 사이트를 시간 날 때마다 훑었기에 아들의 흥미를 유도하는 데엔 꽤 내공을 쌓았다고 자신했다. 아들의 신체 발육을 도와줄 '아빠들의 전문 분야'인 다양한 체육활동은 물론이거니와, 한글, 영어, 숫자, 과학탐구 등 어느 영역 하나 빠지지 않고 관련 책자로 단단히 무장을 완료했다. 네가 두 돌이 채 되기도 전에 한글 읽기, 영어 알파벳, 글자 쓰기까지 섭렵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이 아빠의 빈틈없는 노력 덕택이었다고, 그래서 네가 집에서 아빠랑 24시간 같이 있더라도 너의 올바른 성장엔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아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바라보며 그렇게 어깨에 자신감의 뽕을 뿜뿜 집어넣었다.


그렇게 시작된 가정보육 1주차.


(오전) 자는 게 너무 싫다며 밤새 꾸물거리다 열한 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드는 아들은, 아침 열 시가 다 되어서야 스멀스멀 방에서 기어나왔다. 이렇게 푹 자고 일어나서 포동포동 토실토실해진 아들의 뽀얀 뺨은 아빠로써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자칭 육아만렙 아빠는 '애착육아'에 필수적인 '스킨십'을 시전하기로 하고, 뽀시래기 같은 귀염 터지는 아들을 꼭 껴안고 한참동안 데굴데굴 집안을 굴러다녔다. 누가 아들 키우기가 힘들다고 그랬어 ! 이렇게 이쁜데 ! 팔불출 아빠의 자뻑과 함께 그렇게 오전 반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오후) 아들의 애교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점심을 차려 먹였다. 아들은 맛있게 밥을 먹고 한참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슬슬 심심해 하는 눈치다. 드디어 머릿속에 잘 아카이브 해둔 육아 노하우를 정해진 시간표에 맞춰 대방출할 타이밍이 되었다.


"동글아 ! 오늘 아빠랑 신나게 놀자. 어때 ?"


"좋아 ! 뭐하고 놀껀데 ?"


"일단 아빠랑 신나게 체조를 하고, 동글이가 좋아하는 기차를 가지고 멋진 마을을 만들어 보는거야. 그리고 나서 좋아하는 책을 한 권 보고, 여기 아빠가 새로 사온 '으쌰영어' 책을 보면서 같이 영어 단어 찾기 놀이도 하자. 그 다음엔 네가 엊그제 궁금해 한 인체의 비밀에 대해 아빠가 그린 그림으로 알려준 다음에, 마지막엔 동글이가 오늘 한 것 중에 제일 재미있었던 걸 그림일기로 표현해 보는거야. 어떤 것 같아 ?"


"좋아 ! 얼른 해보자 !"


기차마을도 만들고 쑥쑥 체조도 하는 아름다운 칩거. @ 우리 집


아들의 활기찬 호응에 아빠는 마치 슈퍼챗이라도 받은 양 마음이 웅장해졌다. 게다가 모든 프로그램에는 나름의 편성의 이유까지 갖춰 놓았다. 캐릭터 동영상과 함께하는 아들의 성장판을 자극해 줄 체조, 마을과 마을 사이에 기찻길을 놓으면서 '연결'이라는 수학 개념을 알려주는 기차 마을 놀이, 매일 한 권 독서습관 길러주기, 주변 사물을 영어 단어로 알아보는 스며드는 생활 영어, 호기심을 백배로 키워줄 아빠가 직접 그림으로 그려 설명해 주는 '아빠의 과학시간', 그리고 표현능력과 예술감각을 키워줄 그림일기까지. 오 모 박사님이 실직 위기에 봉착할 만큼 화려하고 사려깊고 다채롭기까지한 프로그램이지만 이 정도야 나 같은 베테랑 아빠한테는 일도 아니지.



아들은 예상대로 베테랑 아빠의 치밀한 설계에 맞춰 신나게 오후 시간을 보냈고, 그날 밤 아빠는 자칭 육아전문가 뽕이 두 배로 자랐다. 그렇게 완벽하게 설계된 밀착 가정보육의 첫 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하루, 또 하루, 또 다시 하루가 지나갔다. 의외로 밀착 가정보육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아이의 모든 호기심에 애정을 담아 설명해 주는 '육아계의 설명충 스피드왜건' 타이틀을 은근하게 탐내왔던 아빠는 미리 준비한 방대한 양의 컨텐츠를 폭풍처럼 쏟아내었다. 이야기 보따리를 끊임없이 풀어내는 아빠에게 아들은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반짝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체력과 노력이 방전될 때쯤 아들의 애교와 호응이 부스터샷으로 투여되면 아빠는 합체한 메칸더 용사라도 된 양 다시 분연히 일어나 계획했던 프로그램을 착실히 이어나갔다.


최고의 아빠가 되었다는, '자뻑'내 흠씬 풍기는 자긍심과 함께.


아들을 앉혀놓고 스케치북에 혼신의 힘을 쏟아 설명한 '아빠의 과학시간'. 비이과 계열 아빠가 여기까지 했다면 영혼을 갈아넣었다고 봐야한다. 다행히 아들의 호응도는 최상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일주일이 지나가는 동안 너무 집에만 갇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금요일 즈음 집 근처의 놀이터에 아들을 데리고 나가 놀기로 하였다. 코로나19가 기승이었지만, 사방이 개방되어 전염 걱정이 덜 한 놀이터에는 마스크를 쓰고 뛰어노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아들은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니며 여러 친구들에게 같이 놀자는 싸인을 보냈고, 다행히 동갑내기 친구들 몇몇이 거기에 호응해 주었다. 놀이터 한 구석에 여섯살 꼬마 서너명이 올망졸망 모여든 모습은 너무나 귀여웠다. 이윽고 아들래미는 모여든 친구들과 함께 손발을 휘저으며 뭔가 열심히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아들의 모든 순간을 사진으로 남긴다'는 사명감으로 충실한 베테랑 아빠는 아들의 사회성을 목도할 수 있는 이 소중한 순간을 행여나 놓칠세라 꼬마들 근처로 슬며시 다가갔다. 아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 내가 알려줄께 !"


... 음 ? 뭘 알려준다는 거지 ? 이름이랑 나이를 알려준다는 걸까 ? 하지만 이어진 아들의 말에 의문은 금새 풀렸다.


"미끄럼틀은 중력 때문에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거야 !"


... 베테랑 아빠는 잠깐 당황했다. 이건 여섯살 꼬마들이 놀이터에서 할 만한 대화는 아닌 것 같은데. 같이 모인 친구들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지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의 일장연설은 계속 이어졌다.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서 내려올 땐 한 명씩 앞의 사람이랑 부딫히지 않게 내려와야 해 ! 아래로 갈수록 빨라져서 앞에 있는 사람이 다치게 돼 !"


아들은 목소리를 높이며 열심히 친구들에게 미끄럼틀과 중력과 가속도를 '설명'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또래들과 모였으니 신나게 뛰고 소리치고 깔깔거려야 할 타이밍에, 아들내미는 꼬마 스피드왜건이 되어 있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아드님이 똑똑하네요 ! 그거 자랑하시는 건가요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중력과 가속도를 아들이 제대로 이해했을 리 없다. 그저 미끄럼틀을 예로 들어 '물건은 왜 높은데서 낮은데로 떨어질까'를 설파했던 나의 열의 넘친 설명 내용을 그대로 '암기'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차 싶었다. 아이는 부모의 모든 것을 보고 배운다고 하는데, 그 부모와 24시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다면 부모가 의도하지 않은 부분마저 배울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말았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세상 모든 진리를 다 깨우친 듯 술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아빠의 모습이 아이에겐 세상 멋진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빠의 밀착 육아는 겨우 그 일주일 뿐이었음에도, 아들은 친구들과 만나서 새롭게 놀이를 시작하는 방법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 결국 아빠의 몹쓸 설명충 버릇에 물들고 만 것이다.


결국 호응해 주지 않는 친구들에게 몇 번 아쉬움을 어필하다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아들은 놀이터를 휘젓는 친구들 뒤를 쫓아 후다닥 달려갔다. 어찌보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아들이 사회에 적응해 나가는 시련의 과정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자칭 육아전문가인 아빠는, 그날 오후 놀이터에 서서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빠에게 물든 몹쓸 스피드웨건 행세를 그만 두고 다행히 아이들과 신나게 놀기 시작한 아들.




언젠가 길거리에서,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라는 현수막 표어가 눈에 깊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그렇지. 애 키우는 거 진짜 힘들어 ! 대가족에 마을 사람들까지 다 같이 도와줬던 옛날 사람들은 애 키우기 좀 수월하지 않았을까 ?' 라고 생각했었는데, '스피드왜건' 이벤트 후에 생각해 보니 그 말의 의미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부모가 아이를 종일 품고 있으면 아이의 관점이나 생각의 방식들이 부모의 그것을 그대로 닮을 수 밖에 없다. 물론 부모의 사랑이야말로 아이가 잘 자라는 데 가장 중요한 자양분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이가 언제까지나 부모의 품 안에서 살 수는 없다. 내 아이가 더 넓은 시각을 갖고, 다양한 생각의 물꼬를 트고, 그래서 어엿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나아가야 하는 때는 반드시 온다.


하지만 부모가 품 안에 껴안고 말로 일러주는 것으로는 결코 그 때를 준비할 수 없음을, 이번의 '밀착보육 임상실험'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육아를 남에게 맡기는 '육아의 외주화'는 부모가 가진 육아의 의무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닌, 부모에게 편중된 아이의 관점과 생각을 다양화 해주기 위한 아주 당연하고 필요한 교육의 한 모습일 뿐이라는 것. 아이를 키우는 데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은 바로 그런 '육아의 외주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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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침마다 어린이집 현관에서 대성통곡하는 아이를 떼어놓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 부모들은, 우는 아이를 안아주지 못하는 마음은 인간적으로 약간 아플지언정 굳이 그 뒷모습이 쓸쓸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것은 당신이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아이를 위해 제공되어야 하는 당연한, 필요한, 그리고 올바른 교육적 조치이므로.


다행히 아들은 아빠 닮기가 친구를 사귀는데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그 이후로는 친구들에게 과도한 설명은 자제하는 한편, 아직도 설명충 버릇을 버리지 못한 아빠가 물어보지도 않은 것에 과도한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때면 심드렁한 표정으로 '뉘예뉘예 ~'하면서 한 귀로 들어 넘기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이렇게 평화롭게, 육아휴직의 하루는 흘러가고 있다.



※ 나중에 알아보니 이 말은 표어가 아니라 미국의 어느 교육학 박사님이 쓰신 책 제목이었다. 시간이 된다면 한 번 읽어 보아야 겠다.



그래도 만 네 살 정도 되면 어느 정도 말귀도 알아듣는 나이여서 조금 덜하긴 합니다만, 아침 시간 바쁜 와중에 아이까지 어린이집 앞에서 울어대면 정말 난감하기 그지 없지요. 왠지 아이를 곁에 두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드는 것 같구요. 그래서일까요. 보육시설에 아이를 맡기는 것을 스스로 불편해하는 아빠 엄마들도 몇 번 보았습니다.

아이를 늘상 옆에 끼고 있는 것이 정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빠 엄마보다 더 크고 넓은 사람으로 자라기 바란다면, 그리고 이것만큼은 우리 아이가 배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게 있다면, 아이와의 물리적 거리를 두고 다양한 보육자들이 아이와 상호작용하는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다양한 어른들과의 교감 안에서 아이가 생각의 외연을 더 넓일 수 있게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보육 행위를 남에게 맡기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아빠 엄마도 정답은 아닌 것 같아요. 거리두기와 가까이하기, 그 중간 어딘가의 균형을 찾는게 필요해 보입니다.

아들의 방과후 교실에 수업시간 중 자주 졸려하는 같은 반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수업에 참여하는 동안 그 엄마는 건물 1층의 까페에서 다른 엄마들과 수다를 떨다가, 수업이 끝나면 올라와서 아이 손을 끌고 나가기 바쁩니다. 아이가 수업시간에 잘 참여하는지, 어떤게 재미있었는지, 그런 것들에는 관심이 전혀 없어 보였어요. 아이도 끌려 들어왔다가 끌려 나가기 바쁜 것 같아 보였구요.

반면 저희 아들은 그 방과후교실에 가면 신나서 난리가 납니다. 수업시간 내내 선생님과 조잘조잘 이야기하고, 수업이 끝나면 학원 안을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놀기도 합니다. 물론 그 가정의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수업시간 만큼은 저희 아들이 더 넓은 세상과 만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하는 일은 그저 수업시간 앞뒤로 오늘은 어떤 걸 배울지, 수업에서 어떤게 재미있었는지 십 분 정도 밀도 있게 이야기 나누는 것 밖에 없는데도 말이죠.

짧고 굵게 아이와 교감한 후 살짝 떨어져 있기. 그리고 그걸 계속 반복하기. 비법이랄 건 없지만, 아이가 앞으로 자라면서 가정과 사회 가운데서 균형있게 서있을 수 있도록 연습해주는 저의 방식입니다.

사실, 아이랑 너무 진득하게 붙어있다 보면 지치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하하하.


동글이에게,

아빠가 동글이에게 알려주고 싶은게 많아서 여러가지를 준비하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아빠가 아빠 스스로 '혼자서도 이만큼이나 준비한 좋은 아빠'가 되었다는 자기 만족을 느끼려고 그랬던 걸지도 몰라. 네가 어떤 것에 더 관심이 많고 어떤 걸 더 좋아하는지 보다는, '이건 꼭 해야 해', '저건 빼놓을 수 없지' 하면서 아빠의 기준으로 모든 걸 준비했거든. 그게 너에게 꼭 최고의 선택은 아닐 수도 있는데도 말이야.

너는 '주도자'가 아니라, 네 아이의 가장 면밀한 '관찰자'가 되어야 해. 아빠도 가끔 너를 들여다보기 보단 너에게 아빠의 생각을 밀어붙이는 때가 있어. 항상 너의 표정, 너의 감정, 그런 것들을 더 많이 관찰할 수록 네가 스스로 답을 주는 걸 알면서도, 사십년 넘게 아빠의 생각으로 살다보니 그렇게 되고 만단다.

아빠가 좀 더 동글이를 잘 들여다볼께. 한 발자국 떨어져서, 하지만 네가 필요로 할 때는 같이 이야기도 나누면서 그렇게 말이야. 만약 그 시간들이 마음에 들었다면, 너도 네 아이에게 그렇게 해준다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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