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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곡자매 May 24. 2024

피곤한 어린이가 행복하다

동네에서 노는 게 제일 좋았어요

엄마~ 나 집에 가고 싶어!
동네에서 놀고 싶어

- 그래.. 이제 집 가서 실컷 놀자.


지친 목소리로 겨우 대답한다.




토요일 오전, 제주대학교에서 열리는 농산물직거래 장터에 다양한 어린이 체험도 있고 구경거리가 많다길래 아침부터 부지런히 두 아이를 챙겨 출발했다. 30분 거리를 다른 캠퍼스로 내비게이션을 잘못 찍는 바람에 1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임이가 힘들어하며 팔에 매달린다.


- 엄마, 어지럽고 멀미나. 그늘 가서 쉬고 싶어.

- 그래. 그럼 일단 저기 의자 가서 좀 앉아 있자.


차 안 공기까지 데우는 뜨거운 날씨에 멀미까지 한 모양이다. 그늘에 있는 벤치에 앉아 한참 쉬게 하는 동안 남편이 주스를 사다 나르고, 아주 잠깐 장터 구경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니 이번에는 배가 고프다고 한다.

외출한 김에 맛집을 찾아가고 싶지만 도저히 또 차를 태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제주대 건물 안에 있는 무인 편의점을 찾아 컵라면과 아이스크림을 사 먹이고 나니 좀 진정이 되었다. 시험을 앞둔 스무 살 대학생도 아니고 애가 둘이나 있는 네 가족이 건물 앞 계단에 쪼그려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는 모습이 우습다.


드디어 타운하우스 정문을 지나 들어오는 길, 하임이의 친구 둘이 단지에서 뛰어놀고 있다.


- 하임아~ 어디 갔다 와?

- 아줌마! 저 OO네 집에서 밥 먹고 놀기로 했어요!

- 우리 OO네 집에서 논 다음에 XX네 집에 갈 거예요!


 아이들은 우리 차 창문에 매달려 너도 나도 바쁘게 자기 이야기를 쏟아낸다.


- 엄마 나도 OO네 가도 돼?

- 그래. 집 가서 옷만 좀 시원한 걸로 갈아입고 가자.


하임이는 언제 멀미를 했냐는 듯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고 뛰어나간다. 녹초가 된 나와 남편은 그제야 커피를 한잔 하며 한숨 돌린다.

두 아이 모두 데리고 있다가 첫째가 놀러 나가면 집이 얼마나 조용하고 평화로운지. 그렇게 1시쯤 나간 하임이는 5시가 넘도록 소식이 없다.


카톡! [애들 저희 집 마당에 있어요. 벌레 잡으며 놀고 있어요]

카톡! [애들 OO네 집으로 이동했습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친구들 집을 번갈아 우르르 이동하는 아이들의 위치는 카톡 단체방에 실시간으로 공유된다. 채팅방에 올라오는 사진을 보아하니 동네 또래 친구들이 다 나와서 놀고 있는 듯하다.

이러니 외출을 하고 싶을 리가, 동네에서 노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 만도 하다. 하임이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다들 외출만 하면 그렇게 집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하던 대로 친구 집에 보낼 때마다 문 앞까지 대동해서 인사를 하고, 데리러 갔지만 곧 별 소용이 없는 짓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어차피 하루에도 몇 번씩 장소를 옮기고, 데리러 가도 놀이가 끝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채팅방에서 다 같이 데리러 갈 시간을 똑같이 정하고, 그 시간에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최종 위치를 공유해 주는 식의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하임이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올 때에는 청소도 깨끗이 해두고, 가지고 놀 장난감이 없어 어쩌나, 어떤 간식을 준비해놔야 하나 고민했지만 몇 번 겪어본 후로는 부담 없이 문만 열어준다.

아이들은 집이 더럽고 깨끗한지, 지금 먹을 것이 준비되어 있는지 없는지는 전혀 상관없다. 그저 내 집에 없는 장난감들과 책이 신기해 눈이 동그래지고, 노는 것에 정신 팔려 내가 꺼내주는 간식은 뒷전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주로 이사 온 지 100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큼직한 이벤트가 여럿 있었다.


각 집을 돌며 운동회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어린이날 행사, 후레시와 곤충채집망을 들고 떠났던 심야 곤충 탐험, 마당에 에어바운스를 대여하고 실컷 뛰어놀았던 친구의 생일파티, 친구 엄마의 재능기부로 가끔 열리는 사이언스 데이까지.

다음 생일은 우리 하임인데 어쩌나...ㅎㅎㅎㅎㅎ
후레쉬 들고 떠난 심야 곤충 채집

가끔 다른 약속이 있어 먼저 일어나야 하는 친구들은 "왜 나만 가야 하냐고!!" 억울해하며 눈물 바람이다.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고도 재미있는 날은 넘쳐난다.

죽은 나무를 파내는 집 마당에 가서 벌레를 잔뜩 잡고, 자기들끼리 룰을 정해 경찰놀이도 하고, 보물 찾기도 하고, 마당의 호스를 에어로켓에 연결해 분수쇼를 만들고.. 음악을 틀어주면 바로 댄스무대가 열린다.


현관의 제비둥지에서 새끼 제비가 떨어져 다시 올려주는 상황을 다 함께 구경하기도 하고, 누군가 분양(?) 받아온 올챙이를 집마다 나누어주어 각 집의 올챙이 어항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둥지에서 떨어져 다시 올려 준 새끼 제비
우리 집 올챙이들 (이름은 일챙이, 이챙이, 삼챙이, 사챙이, 오챙이, 육챙이) 


날씨가 좋아진 5월부터는 갑자기 인라인스케이트 열풍이 불고 있다.

한두 명이 나와서 나와 탄 날을 시작으로 너도나도 집에 처박혀 있던 스케이트를 신고 나와서 단체로 비틀거리며 맹연습이다. 다 같이 헬멧을 쓴 모습도 정말 귀엽다.



친구들과 놀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번거로움이 덜어지고 편한 것도 있지만, 나와 남편이 해줄 수 없는 눈높이의 놀이를 하며 많은 자극을 받고 배우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자기들끼리 새로운 놀이와 룰을 정하고, 팀을 나눠 작전도 짜고.. 옆에서 들어보면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은데 너도 나도 끊임없이 의견을 이야기하고, 그러다 보면 답답한 누군가 "이야기 좀 그만해. 이러다가 놀지도 못하고 집에 가겠어!" 하는 말에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갈등이 생겼을 때는 주변 친구들이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고 상황설명을 해주고, 갈등의 중심부에 있었던 친구들은 화를 삭이고 돌아와 이성을 찾은 후에 오해를 풀거나 사과를 하는 모습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하임이 역시 우리가 백날 말로 해도 안 듣던 것을 친구가 이야기하면 한 번에 고치기도 한다.


어젯밤 하임이와 함께 자려고 누웠는데 이런 말을 했다.


- 엄마, 나 피곤한데 잠이 안 와. 오늘 너무 많이 뛰어놀았나 봐.

- 그래? 오늘 많이 놀긴 했지 ㅎㅎ

- 맞아. 노는 걸 좀 줄여야겠어.

- 정말? 엄마는 요즘 하임이 많이 뛰어놀아서 너무 좋은데. 이러라고 제주 온 거야.

- 그~래?

- 응 실컷 놀아.

- 응 ㅎㅎ


아이 입에서 피곤해서 노는 걸 좀 줄여야겠다는 말이 나오다니. 설채현 수의사가 한 말 중에 "피곤한 개가 행복한 개다!" 라는 유명한 말이 생각난다. 이건 개나 애나 통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피곤한 어린이가 행복한 어린이다!


피곤하고 행복한 우리 동네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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