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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리여리 Apr 29. 2022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이전에 충격적인 글을 보았다. #정인아미안해 운동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근거로 든 것은 아주 새로운 내용의 성격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의 글을 읽으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와 관련이 없고,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고,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를 왜 추모하냐는 것이다. 아이가 죽은 일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잘못한 것은 뭐냐고 묻는다. 뉴스에 나오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일을 왜 끄집어내냐는 내용이었다.


  정인이 사건의 내용을 간략히 말하자면 이러하다. 8개월 된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한 집으로 입양되어 혹독한 학대를 받아 16개월에 사망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또 21세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생후 16개월의 작고 연약한 아이인 정인이가 그를 입양한 부모에 의해 죽음에 이른 사건이 있고 나서 전 국민이 분노했다. 명백히 아동학대에 의한 사망이었다. 부검 결과 장기가 파열되고 쇄골, 갈비뼈, 팔꿈치 등이 골절되어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정인이에게 정말 미안한 일이다.


  그런데 누구는 이렇게 말한다.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지 SNS에서 챌린지를 할 이유는 무엇이냐고 말이다. 미안해야 할 사람은 정인이의 양부모이지 애꿎은 사람들이 뭐가 미안하다고 난리를 치냐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목을 끌기 위해, 좋아요를 받기 위해, 연예인의 경우는 개념 있는 척 보이기 위해 깨시민 코스프레를 할 뿐이지 않느냐고 말이다. 실제로 홍보성 글에 해쉬태그를 붙이거나 굿즈를 만들어서 파는 사례도 있었지만 이는 본질이 아니다. 해쉬태그 챌린지의 본질은 정인이에게, 그리고 또 어딘가에 있을 다른 정인이들에게 미안함을 갖자는 취지다. 그런데 이 취지가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


  웬만한 일에 감정 동요가 거의 없는 나로서는 굉장히 오랜만에 놀라움과 분노를 느꼈다. 더 화가 나는 일은 이것도 개인의 선택과 취향이니 존중해달라는 말이다. PC와 아동학대가 관련이 있을까? 폭력이 다양성의 허용 아래 존재할 수 있을까? 절대적으로 아니다. 폭력은 어떠한 형태로라도 제거되어야 한다. 때로 세련과 교양의 옷을 입은 폭력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엄연히 폭력이다. 폭력의 용인은 반드시 동일한 폭력의 반복을 야기한다. 진부한 말일 테지만, 폭력은 사랑으로 이길 수 있고, 사랑은 작은 공감부터 시작된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흔히들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가족'이라 대답한다. 가정은 우리가 처음 사회화를 겪는 곳이며 어려운 일을 겪을 때 안식처가 되어주는 곳이다. 그러나 모두가 이런 가족을 갖지는 못한다. 하물며 사랑과 관심으로 순간을 채워야 할 어린아이가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죽어갔을까. 이런 생각으로 다시금 어린이날의 제정의 배경을 찾아보았다.


  2022년은 어린이날이 제정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누구나 잘 알듯이,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 선생이 제정하였다. 그는 천도교인이었는데 천도교는 '사람이 곧 하늘이고, 하늘이 곧 사람이다.'라는 선언인 인내천 사상으로 유명하다. 이 사상을 실천하여 2대 교주 최시형은 어린이도 하늘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당연한 것이, 어린이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아이를 때리는 것은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다'라고 했고, 길을 가다가도 어린아이를 보면 고개를 숙여서 인사했다고 한다. 어린아이도 한울님이기 때문이다. 천도교인으로서 소파 선생은 사람이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어린이날을 만들었다. 또 '어린이'라는 말도 방정환이 만든 말이다. 이전에는 '어린이'를 지칭하는 말이 따로 없었는데, '어린 사람'이라는 뜻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고 <어린이>라는 잡지도 출판하였다. 어린이를 존중한 최시형과 같이, 방정환도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내가 어린이이던 시절에는 어린이날이 참 좋았다. 선물을 받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당연했고 그게 참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이가 아니던 시절부터는 어린이날이 나와 관계없는 날이 되었다. 더 이상 나는 어린이가 아닐뿐더러, 어린이가 내 시야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로 어린이가 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이런 나에게 어린이날은 그저 빨간 날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방정환 선생을 기리며 어린이의 의미를 다시 새기며 이번 어린이날을 기다려본다.


  누가 어린이일까? 미취학 아동일까? 조금 더 넉넉히 초등학생까지 일까? 우리는 보통 어린이를 그렇게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어린이는 힘이 약하고 아는 것이 부족하다고 능력도 없다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성인 남성의 입장에서 볼 때 어린이는 미완의 인간이다. 즉, 인간이지만 아직 인간은 아닌 상태이다. 그런데 이 역시 상대적이다. 초등학생은 중학생이 보기에 어리고, 중학생은 고등학생이 보기에 어리다. 물론 고등학생도 성인이 보기에는 어리다. 그렇다면 '어리다'는 개념은 상대적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어린이는 '나보다 힘이 약한 사람'이다. 힘이 약한 사람은 여러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 먼저, 문자 그대로 물리적인 힘이 약한 사람일 수 있다. 혹은 나이가 적을 수도 있고 아는 것이 적을 수도, 학번이 낮을 수도, 직급이 낮을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는 경제적 수입이 적을 수도 사회적 지위가 더 낮을 수도 있다. 힘이 있는 사람이 볼 때 이런 '약한 사람'들은 '어린이'이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세상에 어린이 아닌 자는 없게 된다. 우리 모두는 어린이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린이날은 우리 모두의 날이다.


  우리는 자주 어린이를 무시한다. 나보다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이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면, 그가 그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된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수많은 어린이들을 짓밟으며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이라 여겼다. 다시금 돌아보니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했을지 몰라도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활동한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E. Levinas)라는 사람이 있다.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한 그는 윤리학이야말로 철학의 첫 번째 작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타인의 얼굴이 나에게 명령한다. 고통을 호소하는 타인의 얼굴은 바로 신의 얼굴이다.” 여기서 명령을 내리는 타자는 나보다 힘 있는 자가 아니다. 일상에서 늘 나에게 명령하는 이가 아니다. 그동안 내가 눈길도 주지 않았던 약자이다. 어린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윤리적 책임은 얼굴대 얼굴로 만나는 타자에 의해 요청된다. 즉,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누군가를 대면함으로 윤리의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얼굴의 주인은 항상 나보다 약한 자이다. 어린이다.




  몇 해 전, 우리 사회에 '노키즈존'이 화두로 떠오른 적이 있었다. 노키즈존의 취지는 위험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위험한 아이로부터 어른들의 공간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어린이를 위험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어른들의 발칙한 상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른들의 알량한 욕심은 어린이의 공간을 제약하였고, 어린이를 더욱 키우기 힘든 사회로 만들고 있다. 아이들에게 설명을 통해 금지해야 할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초기 차단으로 접근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에 어린이에 대한 어른들의 이해는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 어른들이 어린이의 공간을 빼앗고 있다. 왈가왈부할 것도 없이 누군가를 그 존재의 이유로 출입을 거부하는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폭력적인 일이다.


  노키즈존을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이 지불한 대가에 대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온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지금까지 당신은 자신이 지불한 대가로만 살아왔는지 말이다. 절대 그럴 리 없다. 우리는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렸다. 우리 이전에 있었던 좋은 어른들 덕분이다. 그러나 자기의 과거를 까맣게 잊은 어른들은 마치 자기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어른으로 태어난 것처럼 행동한다. 이보다 더 아이 같은 일이 없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아프리카의 속담으로 알려진 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씩 우리는 알 수 없는 자만심에 빠지곤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내가 스스로 컸다는 착각이다. 자신이 지불한 비용보다 더 큰 혜택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자신을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나서서 도와주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면 차별의 얼굴은 금세 누그러지고 말 것이다.


  노키즈존 이후 누군가를 배제하는 공간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당연한 수순이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은 앞으로 내가 배제를 당하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키즈존 이후에 노유스존, 노중년존 등의 배제 공간이 생겨났다. 언뜻 보기에 이런 배제 공간은 합리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를테면, 가게가 좁아서 휠체어는 출입을 금지한다거나, 외국어 소통이 불가하다는 이유로 외국인은 출입을 금지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남의 일이라고 팔짱 끼고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언제 휠체어를 탈지, 외국인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중년과 노인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아이를 학대하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망각한 채 사는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학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아이를 학대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폭력이 너무 익숙하여 폭력인지도 모르고 폭력을 휘두를 수도 있겠다. 혹은 아직도 우리 주변에 이렇게 만연한 폭력을 좌시하며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겠다. 그러나 어떤 모양의 폭력이든 간에 폭력은 폭력에 대한 무관심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적극적인 관심만이 폭력을 종식시킬 수 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할수록, 갈등이 심화될수록 우리에게 더욱 강력히 요청되는 것은 체계적인 법이나 구조가 아니다. 진부하지만 소통과 공감이고, 사랑이다. 지겹도록 많이 들어온 이 가치를 실천하는 것이 어려워 이 중요한 단어는 진부한 가치가 되었다. 100년 전 이 땅에서, 인간이지만 인간이라 여겨지지 못한 이들을 향해 소파 선생이 실현한 그 사랑의 가치를 이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린이날을 다시 맞았다. 어린이날은 분명 '어린이'들을 위한 날이다. 그러나 어른이 된 우리 곁에도 여전히 '어린이'가 존재함을 깨닫고 이들을 향한 학대와 폭력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우리 모두 언젠가 어린이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며 이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공감과 사랑이 전해지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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