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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자영 Nov 01. 2020

혹시 이 책이 나를 부르는 건 아닐까

지금, 나에게 필요한 문장을 찾는 방법


2011 아마도  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시절,  없고 힘없고 아는  없고 다만 꿈만 있었던 그때 나에게 안식처가 되어준 유일한 공간이 있다면 '서점'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들었던 첫 전공수업을 (그 인상 깊었던 순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모든 것이 생소하고 호기심 가득했던 우리에게 나긋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교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시간이 날 때면 서점에 가 보라고. 그리고 베스트셀러 코너를 쭉 둘러보라고. 지금 베스트셀러라는 말은 곧 현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결핍된 부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때부터 나는 시간이 남으면 주변에 서점이 없나 찾아보고 시작했고 서점에 들어가면 무조건 베스트셀러가 진열되어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베스트셀러 코너는
지금, 우리 시대의 결핍을 보여주는 곳


베스트셀러를 단순히 '잘 팔리는 책'이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의 결핍된 부분'이라는 해석으로 바라보니 꽤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얼마 전, 베스트셀러 코너를 갔을 땐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등의 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IMF 이후 끊임없이 경쟁 논리에 시달리던 우리가 더 이상 이렇게는 못살겠다며 내 방식대로 살 거야,라고 세상에 부르짖고 있는 듯했다. 세상이 원하는 정답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정답을 찾아낼 거야 아니 찾아 내고야 말 거야, 라는 울부짖음.


나는 이 책들을 보며 조금은 측은했는데 지금의 내 삶을 비추어 봐도 부단히 소확행이라느니, 시발 비용 이라느니, 먼 미래를 바라보기보다는(그렇게 보면 아득하고 막막하니까) 현재의 즐거움을 찾아 삶의 의미를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치환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은 멈추고 시장은 포화상태이고 우리는 또다시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경쟁상황에 내버려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겠다는 의지. 지금의 베스트셀러는 우리의 그런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의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지금의 나는 어디쯤 살아내고 있을까?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베스트셀러 섹션이다.


베스트셀러 섹션을 둘러본 뒤에는 그야말로 어슬렁거리며 서점을 배회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습관이 하나의 믿음을 안겨주었는데 바로 “인간은 반드시 필요한 때에 필요한 책과 만나게 되어있다.”는 믿음이다.






낭만적 사랑을 꿈꿨지만 그러지 못하던 시절, (고백하자면 나의 전 남자 친구들의 이야기다. 남편 미안하다.)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부딪혀봤지만 산산이 깨져버리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도대체 사랑이 뭔데'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엔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그 시절엔 취업 걱정 말고 이런 무용한 생각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낭만 정도는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워 보일지 몰라도 나는 꽤나 진지했다. 풀리지 않는 이 질문을 안고 하루하루 시름시름 앓는 사람처럼 우울함에 빠져있을 때, 그때 나는 양귀자의 <모순>이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친구와의 약속 시간이 대략 30분 정도 남았다. 나는 당연스레 광화문 교보문고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일단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 요즘 유행하는 책들을 본 뒤, 교보문고 안을 어슬렁 거리 시작했다. 자연스레 내 발길이 닿는 곳은 소설과 시 코너. 그리고 한국 소설 코너에서 아주 희한한 책이 눈에 띄었다. 요즘 책 답지 않게 너무 심플한 겉표지. 무심한 듯 적혀있는 책 제목과 소설가 이름. 왠지 모르게 이 하얀 책에 마음이 끌렸다. <모순>이라는 제목에서 풍겨 나는 무게감,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 같은 이 책을 들고 서점을 나왔다. 하지만 제목에 비해 소설의 내용은 너무 가벼웠다. (초반에 내가 느끼기엔 뻔한 연애소설이었다.) 뻔한 대사와 술술술 넘어가는 책장. 도대체 내가 찾는 이야기는 언제 등장할까.


이상하게 나를 끌어당기던 이 책에 속아 넘어간 느낌이었다. 그렇게 차 락 차 락 책장을 넘기다 정확히 10 챕터에서 나는 슬쩍 속도를 늦췄다. 무심한 듯 글에 점점 무게가 실리고 있는 것이다. 참 신기한 책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 책과의 첫 만남부터 마지막까지 다른 책에게선 느껴보지 못한 묘한 감정들이 등장했다.



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이름을 자꾸 불러 줘야 해.
이름도 불러 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냐.


나영규에게 없는 것, 그것이 확실히 김장우에게는 있었다. 나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 있다. 끝까지 달려가 보고 싶은 무엇, 부딪쳐 깨어지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깨어져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장렬한 무엇, 그 무엇으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힘이 사랑이라면,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의 손을 잡았다.

p.176-177


사랑에 관한 짧은 단상. 그리고 내가 경험한 길고도 짧은 사랑의 찰나. 양귀자는 조심스레 그러한 단상들을 소설 속에 옮겨놓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묵직한 이야기를 훡! 던지지 않았으니 나는 이 작가가 아주 영리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독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전하고 있다고 믿는다.) 사랑의 몽상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아주 달콤하지만 때론 현실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일 수 있는 몽상.


나처럼 이렇게 누군가 발목을 붙잡고 잡아당기고 있는 느낌,
가슴에 구멍이 뚫려 눈물이 나도록 외로운 느낌이
혹시 있었느냐고 의논하고도 싶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주인공은 자신이 김장우라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느낀 그 순간, 밀려오는 허무함과 감정의 쓰러짐에 허우적댄다. 그리고 그녀는 사랑과 함께 찾아오는 외로움이란 존재의 모순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또 가끔은 자신이 가장 경멸하던 것 때문에 사랑이 시작되기도 한다. 나는 이 소설의 제목이 왜 <모순>인가에 대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사랑이 뭔데라는 나의 철없는 낭만적 고민은  순백의  위에 쓰여진 제목으로 시원하게 끝낼  있었다. 사랑이 곧 삶이라는 것. 인간의 삶이란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이라는 말로 하늘 위에 떠있던 나를  세상의  위로 차분히 내려주었다.



종종 ‘우연’이 정말 우연일까 라는 생각을 한다. 과거의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 듯, 어쩌면 오늘의 우연은 과거 내가 지내온 시간을 통해 만들어진 하나의 짜여진 각본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무언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어디든 지식과 지혜가 가득히 쌓여있는 곳으로 가보는 것은 어떨까. 그 순간 눈에 띈 문득 집어 든 책이야말로 인연이 있는 책일 테니.


인간은 반드시 필요한 때에 필요한 책과 만나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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