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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자영 Aug 04. 2020

무례한 질문들

어른의 말 | 나를 화나게 하는 질문에 대하여

생각할 수록 거북하다.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 이 건강하지 못한 대화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왜 그는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까? 그런데 그런 말들, 그런 태도와 그런 질문들이 어색하지 않은 걸 보면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무수한 편견과 맞서온 것이리라. 하루종일 도대체 왜이리 기분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봤는데 그 기저에는 이런 건강하지 못한 질문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이런 게 참 좋아.


수사학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학자처럼 달라붙어 공부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생존의 문제가 걸려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사학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1년에 2번 혹은 1번일지라도 2017년부터 꾸준하게 한국수사학회에 나가 교수님들의 빛나는 이야기를 주워담고 교수님들이 하시는 활동을 곁에서 지켜보며 작은 문장들을 수집한다. 내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고전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일상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축복이다. 그래서 바쁜 일상 속에서도 수사학 논문을 읽어보려 노력하고, 또 일상의 많은 사람들이 수사학회에 나가서 이야기를 듣길 바란다. 자칭 홍보대사 역할을 해오다가 2019년부터는 정말 한국수사학회의 사외홍보이사가 되었다.


철학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모든 철학자들의 연보와 계보를 알지 못한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철학적인 삶' 혹은 '철학적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 맞겠다. 철학이라는 학문의 본질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가 어떤 이론으로 어떤 생각을 펼쳤는지 외우지는 못해도 그들이 던진 질문들을 종종 보며 내 삶에 적용해보는 것을 즐긴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는 사람을 좋아하고 조금 더 깊이있게 자신의 현재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보여지는 내가 아닌 그 안에 있는 진짜 나의 모습을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란다. 그저 내가 지향하고 바라는 것들을 누군가가 오해없이 함께 바라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이다. 나의 삶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아한다.


쉽게 감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작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허투루 넘기지 않고 바라봐주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베풀어주었을 호의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감동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수많은 글, 수많은 책 중에서 나에게 다가온 한 문장을 기록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문장수집 노트인 <콜렉트북>까지 직접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모여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준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수집한 문장을 쭉 훓어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건 정말 싫어.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것으로 누군가를 판단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것을 잘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것이 나의 업이자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정작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스킬도 물론 중요하다고 하지만 나는 왜 자꾸 그것을 부정하고 본질로만 파고들려고 할까? 스킬적으로 잘 다듬어진 나의 능력을 왜 등한시하고 감추려 하는 걸까?




어제도 나를 흔든 대화를 하며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나는 어떤 편견과 맞서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수사학을 좋아한다고 말히니 "그래,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누구인지 아니?"라고 물었다. 플라톤.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질문이 왜 지금 나오는 걸까. 지식의 자랑만을 늘어놓던 과거의 사람들이 생각났다. 나는 지금 지식의 자랑을 한게 아니라 그 내용 안에 들어있는 생각이, 철학이 너무 좋았다고 말하는 건데. 나는 철학자들은 잘 모르지만 단지 그들이 남긴 수많은 문장들 중 몇 문장이 내 삶을 크게 흔들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모르면 좋아한다고 말하면 안되는 걸까?


꾸준히 나의 성장과정을 함께 해준 사람들이 있다. 지금 내 곁에서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에게 늘 감사함을 느낀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해보면 매번 고군분투하며 현장에서 고민하고 싸워나가는 나의 모습을 그저 솔직하게 드러냈기 때문인 듯 하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모이고, 우리는 그 고민을 혼자가 아닌 함께 하기 시작한다. 대학생 시절부터 나를 봐온 먼 지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돌아오는 질문은 이거 하나였다. "남자니?"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를 뛰어넘어 인간적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힘. 나와 대화를 나누고 교류를 하는 사람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같은 고민을 하고 있고 ‘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내가 맞선 무례한 질문들


어제의 그 대화로 내 안을 들여보기 시작했다. 이 불쾌한 기분을 들여다보니 나는 어릴 적부터 '얼굴이 어느정도 예쁘니까'로 시작하는 수많은 편견과 맞서 싸워왔다.


중학교때 한 담임 선생님은 입학 첫 날 나를 보자마자 "공부도 안하게 생겼네"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생각보다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오기가 생겼다. 첫 번째 중간고사에서 반에서 8등을 했다. 그렇게 10위권 안에 들어가니 선생님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저 매섭고 무서운 분인줄 알았는데 꽤나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그 전에는 '얼굴이 예쁘니까' 공부 안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으로 낙인을 찍어버린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나중에 나는 부반장까지 했는데 성적 한 번으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그 선생님을 바라보며 적잖은 공포를 느꼈다.


고등학교 때 일이다. 나는 한번도 마주앉이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는 친구였는데 뒤에서 "채자영 싫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나는 그 친구를 알지도 못하고 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는데 의아했다. 의아함보다도 컸던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나를 알지도 못하는 친구가 나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것이 싫었다. 다른 친구를 통해 알아보니 정말 이유가 없었다. 이유없이 싫다는 것이 이유였다. 시샘과 질투라는 단어가 두려웠다.


나에 대한 어떤 성과를 말할 때, 누군가는 그것을 외모로 일반화 시켜버릴 때가 있다. 내가 이런 것을 경험했고 느꼈다고 하면 누군가는 "네 얼굴이 예뻐서 그래. 네 얼굴처럼 나도 하루라도 살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할말을 잃었다. 외모 때문에 내가 노력한 수많은 시간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허무했다. 그 허무함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욕심이 많은 아이'가 되었다. 홀로 그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나는 더욱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던 거 같다.


외모로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외모로 누군가를 평가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지금의 나이가 되어서야 '그래, 외모도 중요하지'하고 말하곤 한다. 내가 중요하다가 말하는 외모는 예쁘고 잘생김을 떠나 누군가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동그랗고 따뜻한 얼굴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따뜻하고 동그란 얼굴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사납고 근엄한 얼굴보다는 나이가 들어서도 동그랗고 친절해보이고 다가가기 쉬워보이는 얼굴이고 싶다.


진지충이자 본질주의자인 나.

지금의 나에는 수많은 과거의 경험들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그러니 이제 무례한 질문들, 그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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