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 걷고 또 걷다

SCBD, 유일한 도보 가능 구역

by 레이리


우기인 요새 여느 때보다 비가 더 자주 오고 많이 내린다. 줄곧 비가 억수같이 내린 후 이 날은 오랜만에 화창한 햇살이 비췄다.


금요일 오후로 기억되는데 어김없이 아이 손을 잡고 따스한 햇살 아래를 걸었다. 퍼시픽 플레이스몰에 도착해 지하서점과 켐칙스 마트, 샤토레제를 들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손은 아이 손을 잡고 있어서 다른 한 손으로 찰칵 찍었다. 햇살을 머금은 풍경이 너무 예뻐 찍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집에 와서 사진을 확인해봤는데 사진이 너무 예쁘게 담겨 행복했다.



햇살 아래를 걷고 있으면 늘 생각나는 전혜린의 글이 있다.


금빛 햇빛이 가득 쪼이는 건조하고 맑디 맑은
한국의 가을 속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 나에게 미칠 듯한 환희의 느낌을 준다.

산다는 일, 호흡하고 말하고 미소할 수 있다는 일,
귀중한 일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지금 나는 아주 작은 것으로 만족한다.
한 권의 책이 맘에 들 때 또 내 맘에 드는 음악이 들려올 때, 또 마당에 핀 늦장미의 복잡하고도 엷은 색깔과 향기에 매혹될 때, 또 비가 조금씩 오는 거리를 혼자서 걸었을 때,

나는 완전히 행복하다.

맛있는 음식, 진한 커피 , 향기로운 포도주. 생각해 보면 나를 기쁘게 해 주는 것들이 너무 많다.

독일 민요에 ''햇빛에 가득 찬 하루는 행복하기에 충분하다''라는 가사의 노래가 있다.

햇빛이 금빛으로 사치스럽게 그러나 숭고하게 쏟아지는 길을 걷는다는 일, 살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괴로워하는 일 죽는 일도 다 인생에 의해서 자비롭게 특대를 받고 있는 우선권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스러운 무엇일 것 같다.

괴로워할 시간도 자살할 자유도 없는 사람은 햇빛과 한 송이 꽃에 충족한 환희를 맛보고 살아 나간다.

하루하루가 마치 보너스처럼 고맙게 느껴진다.

또 하루 무사히 살아 넘겼구나 하고 잠들기 전에 생각할 때 몹시 감사하고 싶은 -우주에, 신에 - 마음이 우러난다.

그리고 나는 행복을 느낀다.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구절이

더욱 와 닿는 요즘이다.

오늘 하루 무사히 살아 넘겼구나,

요즘 같은 코로나 일상 속에서

무탈하게 보낸 하루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지,

감사한 마음이 절로 우러나온다.




요 며칠 억수같이 퍼붓던 비가 그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선명한 빛깔을 보여준다.


필터를 사용한다 한들 이 빛깔을

온전히 담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은은한 햇살을 머금은 하늘과 나무,

사람들과 건물들 모습.

자카르타 SCBD Pacificplace 몰 앞의 차 없는 거리
인라인 스케이트 수업을 받는 아이들


자카르타 SCBD 구역은 유일한 도보 가능 지역이다. 자카르타의 대부분 지역은 인도 상태가 좋지 않고 그마저도 중간에 끊기거나 큰 나무나 주차된 자동차가 가로막고 있다. 그 옆으로 오토바이들이 쌩쌩 달려 사실상 자카르타에서 걷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 곳은 유일하게 도보가 널찍하니 잘 되어 있고 횡단보도와 신호등도 있다. 휴일에는 이렇게 차 없는 거리가 되니 더욱 걷기 편하다. 이 곳으로 이사 오면서 매일 새로운 자카르타를 발견하고 있다. 또 다른 도시에 이사 온 기분이다.


주말이면 아이와 함께 ASHTA 몰을 지나 퍼시픽 플레이스몰까지 걷는다. 이 곳이 서울 삼성동이나 여의도인가 싶을 정도로 도보가 참 잘 되어 있다. 땅을 밟고 맘 편히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다시금 느낀다.


이 날은 이전과는 다른 코스로 걸어봤다. 구글맵에 찍어두었던 곳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왠지 더 설렜다. 유달리 화창한 날씨 덕분에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Elysee SCBD


지난 2년간 자카르타에 지내면서도 미처 몰랐던 풍경들, 장소들..

'이렇게 멋진 곳이 있었구나'

하마터면 모르고 돌아갈 뻔했구나, 지금이라도 이렇게 만나게 돼서 참 반갑다.


몰랐던 새로운 장소를 찾아내면 여전히 기쁘다.

플라자 스나얀의 신년 장식


@ASHTA 몰


걸으며 마주하는 풍경들. 아무 생각 없이 걸어도 좋지만
가끔 잠시 멈춰 아름다운 풍경들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근사한 일이다.



인생 뭐 있어?


누구나 가끔 아니 자주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순간들을 사진으로 담아두면 찾아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좋은 순간을 저장해 두어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행복을 만드는 것. 똑같은 시간도 무엇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 마음에 담느냐에 따라 그 시간은 즐거울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다. 기왕이면 즐거운 것들을 많이 기억하고 받아들이고 싶다.

나의 기억 창고 안에 행복했던 순간들을 차곡차곡 저장해 두고 되뇌고 싶다.


인생은 저마다 각자의 즐거움이 있고 슬픔이 있다. 슬프고 아팠던 것들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보다는 즐겁고 좋았던 것들을 마음에 새기고 떠올리며 그런 행복한 기억 안에서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가고 싶다.



24시간 하루 중, 당연히 웃는 일만 생기지 않는다.
속상한 일도, 답답해지는 순간도 분명 있지만
기분 좋았던 순간을 더 많이 기억하고 담는다면
좋을 것 같다.


매일 행복하진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곰돌이 푸의 말-


그리고 이제 곧 만 4세가 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어느새 이렇게 자랐나 싶어 뿌듯하다. 아쉬움보다는 뿌듯함이 크다. 아마도 지금껏 아이를 기관에 보내지 않고 줄곧 함께 해 왔기에 나의 만족 같은 걸까, 아이가 좀 더 크면 같이 하고 싶은 것들을 그려보고 그 날들을 기다린다.


오전 산책

이 곳에 왔을 때 만 1세였던, 아장아장 걷던 아이가 어느새 만 4세 생일을 앞두고 있다.


너에게도 슬라맛 빠기로 시작해 슬라맛 말람으로 끝나는 이 곳에서의 시간들이

아름답게 기억되길 엄마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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