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SF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존 폰 노이만과 이세돌의  소설같은 이야기에 대한 소설

벵하민 라바투트의 『매니악』을 읽고

SF인가? 과학소설인가? 아니, 소설인가?

소설가 장강명이 쓴, ‘SF’라는 장르를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제기하는 해묵은 논쟁에 대해 다룬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아, 이 논쟁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 덧붙이자면, 이 논쟁은 우리가 흔히 ‘공상과학소설’이라 부르는 장르명에 대해 많은 ‘공상과학소설가’들이 더이상 이 장르를 ‘Fantasy & Science’의 번역어인 ‘공상과학’으로 부르지 말고 영어에서 정의된 ‘Science Fiction’의 번역어인 ‘과학소설’로 부르자는 주장 및 그와 관련한 논쟁이다.


장강명은 이렇게 주장한다. ‘과학소설’이라는 장르명은 실제로 그 장르에서 추구하는 지향점이 ‘과학’이라는 단어의 엄밀한 뜻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어색하며, 차라리 ‘공상과학’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지경이다. 나 또한 (100%까지는 아니지만 90% 정도) 공감하며 지지를 표한다.


내가 10%의 반대를 표하는 이유 중 절반, 즉 5%는 장강명 작가가 쓴 SF 작품들을 스스로 ‘STS(과학사회학) SF’라고 칭하는 데에서 온다. 위의 주장과 합쳐 보면 ‘STS SF’ 즉 ‘공상-과학사회학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건 좀...그 이름이 그 장르에 너무나 적확한 명칭이라 하여도, 나로서는 좀 별로같다. (물론 나는 장강명 작가의 STS SF 기획도 100% 공감하며 그 작품들도 너무나 사랑한다. 만약 이 글을 읽으시더라도 장강명 작가께서 기분 상하지 않으시길.)


내가 반대하는 나머지 5%의 이유는 장강명이 쓴 칼럼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과학소설’이라는 말을 들으면 과학을 다룬 소설을 떠올립니다. 찰스 다윈의 비글호 여행을 소재로 한다든가, 유럽입자물리연구소 과학자들의 일상을 소설화했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SF는 과학을 제대로 다루지 않습니다. SF의 가장 큰 재료는 과학이 아니라 ‘과학적 분위기가 나는, 그러나 현실 세계의 과학과는 큰 관련이 없는 공상’입니다.

흠, 과학을 다룬 소설이라. 그런 게 이 세상에 있을까? 물론 있다. 어디든 무엇이든 있을 것이다. 개발자를 다룬 소설―「옛날 옛적 판교에서는」―도 있는데, 과학자를 다룬 소설이 없을 리가 없지! 다만 그런 소재들을 바탕으로 장강명 정의의 ‘과학소설’을 쓴다고 하면, 정의에 따라 장강명 정의의 ‘공상과학소설’과 구분되는 지점에 유의하여 써야 할 테니, 그 소설은 반드시 실존인물인 과학자의 생애에 대한 소설을 써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가상의 과학자를 등장인물로 설정한 소설이라면, 그 과학자의 생애는 분명 가상의 과학 이론을 발견한 업적을 가지고 있을 것이므로, 그 소설은 ‘과학소설’이 아닌 ‘공상과학소설’이 되어 버리니까 말이다. 그런데 실존 인물인 과학자가 등장하는, 그 인물이 발견한 실제 과학 이론을 소설화한다? 근데 그게 소설인가? 그건 그냥...과학자의 생애에 대한 전기문이나 르포르타주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그러한 ‘과학소설’은 없다는 게 나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내가 장강명에 반대하는 지점은, 장강명식 ‘과학소설’이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으므로 SF를 그냥 편하게 과학소설이라고 불러도 적어도 혼돈은 유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벵하민 라바투트가 쓴 『매니악』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이 소설은 실존 과학자 두 명과 바둑기사 한 명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다. 소설이라고 해서 그들이 새로운 뭔가를 창조해 내지 않는다. 그들은 알려진 그의 인생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는데, 물론 그에 대해 작가의 주관적 해석이 강하게 들어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과학자의 생애를 추적하는 르포르타주 장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으로 느껴졌다. 앗, 이게 바로...진정한 의미의 ‘과학소설’ 아닌가? 그런데 이 작품이 왜 소설이냐고?

벵하민 라바투트 - 매니악 (2024)

작가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소설’로 불러달라니 우리가 별 수 있나? 나는 여기에서 어떤 작품에 대한 칼같은 장르 정의―이 작품은 분명 이 장르여야만 하며 저 장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가 부질없고 허무한 작업이라고 느낀다. 벵하민 라바투트는 분명, 자신이 픽션의 의도―기승전결의 구성, 서스펜스의 유발, ‘공상과학’ 장르 법칙―를 한껏 담아 작업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글을 썼을 것이다. 그 의도는 분명 실제 있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하려 하는 르포의 목적과는 달랐다. 완성된 결과물에 그 두 가지, 픽션의 형식과 르포의 형식이 섞여 있다 할 지라도 작가의 명백한 의도가 그것이라면, 그 글의 장르는 그 작가의 의도 대로 따라간다. 『매니악』과 정확히 반대되는 케이스를 예로 들자면,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클레오파트라』라는 다큐멘터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작품에서 제작자는 클레오파트라가 흑인임을 밝히며 클레오파트라의 생애를 그린다. 놀랍게도, 클레오파트라가 흑인이 아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미 잘 정립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자는 자신의 신념, 즉 클레오파트라는 명백히 흑인이라는 허구적 사실을 너무도 신뢰한 나머지, 이 작품을 소설이 아닌 다큐멘터리―실제 사실을 보고하는 장르―의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제작했다. 우리가 역사적 사실과 어긋난 『클레오파트라』를 보며 ‘픽션의 문법’, 즉 허구성을 느낀다 해도, 그것은 작가가 다큐멘터리를 만들려는 의도대로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는 다큐멘터리이다.


같은 이유로, 벵하민 라바투트의 『매니악』 또한 소설이다. 이른바 ‘논픽션 소설’이라고 하는 장르란다. 뭐 영화 『뷰티풀 마인드』나 『오펜하이머』처럼,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하는 기승전결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세 개의 소설, 하나의 책, 작가의 필력, 결말을 기대하지 말 것

이 책 『매니악』은 세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 파울 에렌페스트라는 양자역학 시대의 물리학자를 다룬 「파울 또는 비이성의 발견」, 천재 수학자이자 컴퓨터를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존 폰 노이만의 생애 「존 또는 이성의 광기 어린 꿈」, 그리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세돌이 인공지능을 이긴 최후의 인간으로 거듭난 사건 「세돌 또는 인공지능의 망상」이다. 구성을 봐도, 제목의 일관성을 봐도 이 작품들은 하나의 장편소설의 세 파트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책을 읽어 보면 각자 어느 정도는 결말을 맞이하면서 끝나고, 또 작품 간 연계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단편 소설 세 개를 모은 단편집이라도 불러도 무방할 것만 같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나에게 “이 작품에 명백히 공통적이고 일관된 주제의식이 보이지 않는가?”라며 딴지를 걸 수는 있을 터이다. 나도 그 공통적인 주제의식이 보이긴 하는데, 그 정도의 공통적인 주제의식은 다른 단편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이렇게 생각하였을 뿐이다. 유기적인 단편집이건 옴니버스식 장편소설이건간에 작품의 평가에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항이니 빠르게 넘어가자.)


각자의 작품에 대한 평을 내리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작품인 「파울 또는 비이성의 발견」은 가장 짧은 작품이며 크게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조차 내가 몰랐던, 유명하지 않은 과학자이다. 재빠르게 다음 작품으로 넘기자. 「존 또는 이성의 광기 어린 꿈」은 존 폰 노이만의 생애, 특히 그가 만들어 낸 ‘매니악’이라는 컴퓨터를 만들어 내기까지의 일련의 사건과 내면에 대해 다룬다. 존 폰 노이만은 대단히 유별난 위인이다. 수학 천재이면서, 다른 수학 천재들처럼 무척이나 어렵고 이해조차 불가능한 수학 증명으로써 유명하지 않다. 그가 유명한 건 아주아주 쉽고 이해 잘 되는 이론인 ‘게임 이론’, 현대 컴퓨터 설계에 있어 필수적인 아키텍처가 되어 버린(그래서 그만큼 산업체의 수많은 사람들이 잘 이해해야 하는) ‘폰노이만 구조’, 그리고 냉전 시대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이 무시무시한 전략에 대해 이해했었고, 또 이해했어야만 했던 ‘상호확증파괴’의 역두문자어 ‘MAD’를 만든 사람이다. 그의 성과는 대중들이 아주 이해하기 쉬운 것들이라 소중한 것이다.


특별히 ‘MAD’라는 말을 만든 에피소드가 이 책에서 중요하다. 원 뜻은 ‘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이지만 역두문자어로 말하니 ‘미친’이란 뜻이 되어 버린다. 냉전 시대에 서로를 완벽히 죽일 수 있는 무기 수천 발을 상대방에게 겨냥하고 있으면서도 결론적으로 평화로웠던 미친 시대를 아주아주 절묘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으로 이름붙은 『매니악』이자 존 폰 노이만이 제작한 컴퓨터 ‘MANIAC’도 이 절묘한 역설을 표현하고 있다. 원 뜻은 Mathematical Analyzer Numerical Integrator and Automatic Computer Model―한국어로 ‘수학적 분석기 수치 적분기 및 자동 컴퓨터 모델’이라고 적당히 번역할 수 있다―인데, 그걸 줄임말로 표현해 보니 광기어린 미친 놈이라는 뜻이 되어 버린다. 존 폰 노이만의 그 광기어린 삶에 대한 절묘한 비유라고도 할 수 있다.


그의 생애―양자역학, 칸토어의 무한의 정의, 힐베르트의 수학의 완전성,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튜링의 튜링 머신과 엮인―를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따라가다 보면, 그의 업적은 ‘수학의 불완전함이자 이성의 광기어린 측면’을 인공적으로 구현한 ‘미친 컴퓨터 만들기’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작가의 놀라운 필력으로 읽기 짜릿하게 그린 작품이 바로 이 두 번째 작품, 「존 또는 이성의 광기 어린 꿈」이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들, 혹은 너무 이해 안되고 어려운 이야기들―양자역학, 칸토어의 무한의 정의, 힐베르트의 수학의 완전성,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튜링의 튜링 머신―을 소설로써 읽는 게 얼마나 지루할까? 전혀! 벵하민 라바투트의 글은 이 수학 천재들의 광기 어린 생애를 한 번 더, 경우에 따라서는 세 번, 혹은 열 번 더 읽을 정도로 가치 있다.


하지만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진 이야기를 그린 「세돌 또는 인공지능의 망상」은 크게 감명깊지는 않았다. 이 이야기는 단지 하나의 에피소드―이세돌이 알파고를 다섯 번 중 한 번 이기고 모조리 진 이야기―를 소설적으로 그린 이야기일 뿐이다. 물론 그 다섯 판의 경기는 놀랍도록 짜릿했다. 이세돌은 인류를 대표해 AI와 결투를 벌인다. 처음엔 이세돌 뿐만 아니라 관중인 우리조차 당연히 여전히 인공지능은 멀었으며 인간이 손쉽게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공지능 알파고는 기상천외한, 인류 바둑의 역사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수를 창조해 내며 이세돌을 세 판 내리 박살냈다. 이른바 ‘휴머니티의 위기’가 닥쳤다. 5판 3선승제로 친다면, 이세돌은 이미 졌다. 그러나 이 경기는 계약상 다섯 번의 경기를 전부 진행해야 했고, 궁지에 몰린 이세돌은 4번째 경기에 나선다. 거기서 결국 이세돌은 ‘인간을 대표해’ 한 판을 따낸다. 실질적으로는 패했지만, 우리는 이 숫자상으로 진 경기에서 무엇인가를 건졌다. 실로 드라마틱한 승리이자 한 편의 소설과도 같은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존 또는 이성의 광기 어린 꿈」처럼 한 인물의 전 생애를 걸친 여러 에피소드의 복합적인 줄거리를 통해 어떤 업적에 대해 광기어린 찬사를 늘어놓은 구조가 아니다. 이 작품은 단지 알파고와 이세돌의 다섯 번의 경기에 대해서만 다룬다. 문제는 한국인이라면 이 드라마를 다 알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드라마틱한 경기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기 때문에 굳이 소설이나 작품으로 재구성될 필요조차 없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매니악』의 세 번째 단편소설, 「세돌 또는 인공지능의 망상」은 약간 시시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논픽션 소설’이 굳이 허구의 과장과 드라마를 꾸며내면서까지 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목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약간의 재구성만을 허용해 그만의 재미를 이끌어내는 걸 목표로 하는 장르라면, 이세돌의 이야기를 이렇게 잘 정돈된 활자로 읽는 것은 그만의 가치가 있다. 만약 10년 후나 50년 후에 알파고와의 경기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다면 이 소설이 없을 때 우린 무엇을 해야 할까? 인터넷의 조각글, 짤방, 유튜브 등을 총동원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가치가 있다. 아마도 이세돌과의 일전을 그린 「세돌 또는 인공지능의 망상」은 50년 후에 읽어 보는 게 더 훨씬 재미있을 지도 모른다. 「존 또는 이성의 광기 어린 꿈」을 읽은 현 시점이 존 폰 노이만이 사망한 지 60여 년 지났기 때문에 재미있었는지도.


사족으로, 나는 ‘논픽션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해 무지했던지라 존 폰 노이만이 컴퓨터를 발명하던 장면부터 ‘분명 이세돌이 후반에 나온댔는데, 그러면 노이만의 메모를 바탕으로 설계된 AI 아키텍쳐가 이세돌과 결합하여 트랜스휴먼 알파고-이세돌 융합체가 출현할려나?’라며 뻘 생각을 하며 읽었다. 내가 결말이 극적인, 반전의 묘미가 있는, 소설다운 결말을 너무 기대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실화를 바탕으로 한 담백한 결말이 나버릴 지는 예상 못했지만, 그게 이 작품의 가치를 깎아먹지는 않았다. 작가의 필력이 워낙 좋아서 재미있게 잘 읽혔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렉 이건의 『대여금고』를 읽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