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寧
[ 安寧 ]
바람이
꽃머리 흔들어
눈 내리던 그 길에
하얀 꽃잎
눈꽃처럼 날리는데
강물은
행복했던 그날도
오늘도
아무 일 없이
제 가던 길로 흘러가고 있다
사람들은 하던 일을 하고 있고
구름 사이 햇살은 여전히 찬란하니
그러면 됐다
사랑한 이여, 그럼
이제 안녕히
벌써 백목련이 지고 있다. 아쉽게도 목련의 시간은 이렇게도 짧다. 목련이 시들자 매화도 하나 둘 아까운 꽃잎을 바람에 띄운다. 산 군데군데 연초록이 물드는가 싶더니 멀리 산벚의 파스텔이 번지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어루만지고, 따사로운 햇살이 마을에 가득하다. 햇살을 하나하나 튕겨내며 경쾌하게 흐르는 개울물의 소리가 명랑하게 들려온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새들의 각기각색 봄노래 소리는 또 어떤가.
안녕(安寧)
1 : 아무 탈이나 걱정이 없이 편안함.
2 : 친한 사이에서 서로 만나거나 헤어질 때 인사로 하는 말.
- 출처 : 다음 사전 -
작별인사로서의 '안녕安寧'은 얼마나 관대하고, 배려 많고, 감정적 절제가 함유된 품위 있는 말인가. 우리는 '안녕' 하고 만나서 '안녕'하고 헤어진다. 새로이 만날 때나, 함께 할 때나, 영영 헤어질 때 조차도 상대가 아무 탈이나 걱정이 없이 편안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니, 우리말의 품격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이별해야 하는데,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할 때까지는 마음이 아프다. 헤어지기를 결심했을 때는 더 아프겠지만 마음이 결연하므로 고통의 총량을 모두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헤어짐이 실행되는 동안 담담하고 냉정해진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이별을 한다. 무언가 복잡한 업무를 잘 처리해 낸 듯 정리가 되고, 이제 아프지도 않은 것 같다. 오히려 홀가분하기도 하다. 하지만 더 큰 아픔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헤어짐이 현실임을 실감했을 때에서야 신경통처럼 스멀스멀 엄습해 오는 것이다.
고통과 회한의 시간이 충분히 지나고 나면 함께 했던 희로애락은 추억이 되고, 통증이 진정된 자리에는 그리움이 남게 된다. 처음에 그리움은 어쩌다 불현듯 찾아오는 패닉처럼 마음을 허전하고 황망하게 한다. 그런 후 더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제 그리움은 견딜만하게 잔잔해지면서 아련하고 조금 슬픈 감성의 추억으로 순화된다. 이것은 좋은 기억이 많았던 관계를 전제로 하는 낭만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아픔이 가신 자리에 정말이지 불행히도 노여움이 남을 수도 있을 테니까. 또한 시간을 함께 했다고 해서 추억이 같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나는 행복했었지만 그는 지옥이었을 수 있는 게 다반사일 테니까.
그래서 이별 후에도 서로 '안녕'을 바라는 마음은 쉽지 않다. '안녕'의 마음이 위에 인용한 사전의 뜻에 충실하다면,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만이 '안녕'이라 말할 자격이 있지 않을까.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만이 추억할 자격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움이 성립되지 않는 것을 좋은 추억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헤어져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문득 생각이 날 때, 그가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사랑을 잘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련을 뜻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말이 안 된다. 사랑을 잘했다면 끝까지 잘 지내고 있어야지.'라고 타박하겠지만, 그렇게 사랑을 지켜낸 분들은 존경받아 마땅할 인품임이 분명하지만, 어떤 인연들에게는 관계의 유지가 신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될 만큼이나 어려울 수 있다.
이 시는 사랑하고 이별하는 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사람을 화자로 하였다. 이 시의 화자는 글쓴이와 무관할까? 나도 오래전에 겉으로는 덤덤하게, 그러나 속으로는 가슴이 아픈 이별을 해본 적이 있다. 몸이 이별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기억을 지니고 살고 있다면 어느 시점에는 그리움과도 이별을 해야 할 때가 온다. 그래야만 비로소 서로 안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별한 이들이여, 모두 安寧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