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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밤의 블루스

시&에세이

by 여상

[ 어느 밤의 블루스 ]


어느 저녁의 빗방울처럼

무심한 바람처럼

또는 흔들리는 골목길 외등

불빛처럼 부서지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는

슬픔으로 남겠네


시카고의 어둑한 카페

어느 이별의 창가에

진득이 흘러내리던


커피 색깔의 상흔처럼

낮게 낮게 웅얼거리다

때론 속절없이 울부짖다가

비처럼 슬퍼하다 이내

바람처럼 놓아주던


오래전 신촌 뒷골목

빛 바랜 술집의 네온 간판에

ㄹ이 떨어진 브루스는


익숙한 이름처럼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우울증처럼

늘 마주 앉던 자리

손에 익은 지판 위로

따라가 본 기억처럼


즐거운 듯 웃다가

어느 비 내리는 밤

눈물 떨군 울타리에 갇혀 버린

고단한 근육의 경련처럼

거칠게 떨며 퍼져 가는

진한 버번 향의 블루스는




어려서 팝음악을 좋아했었다. 중학생 시절에 용돈을 그러모아 비틀즈 Abbey Road 레코드 판을 구해서 신주단지 모시듯 했던 것이 기억난다. 돈을 주고 산 첫 음악이었다.
조금 자란 고교 때에는 메탈에 흠뻑 빠졌었다. 방구석에 틀어 박혀 헤드폰을 쓰고 딥퍼플에 심취해 있는데, 저녁을 먹으라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어머니는 홧김에 헤드폰을 잡아 뽑으셨다. 뻥 터지는 스피커 소리에 어머니는 1미터 쯤 날아가 뒤로 자빠지셨다. 뒤이어 등짝 스매싱.
그날 밤 퇴근하신 아버지께 아들이 미친 것 같다고 고발을 하셨다. 지금도 나는 가끔 레드 제플린을 크게 듣는 것을 즐긴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는 블루스나 블루지한 슬로우 록 계열의 음악과 재즈, 리듬앤블루스 같은 음악들이 좋아졌다. 어려서는 잘 듣지 않던 곡들이었는데 삶의 박자가 느려진 것도 있겠고, 아마도 블루스의 슬픈 기원이 마음을 건드린 것이 아닐까 싶다. 나이가 들면 조금 착해지는 경향이 있지 않나.

강제 이주 당한 아프리카 흑인들의 노동요가 기독교 개종 등의 환경에서 백인음악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영가나 가스펠로 불리어 지던 것이 블루스의 효시이니, 이 음악의 태생은 슬프고 아프다. 1900년대 초중반에 남부의 고통스러운 인종차별을 피하기 위한 흑인들의 타의적인 대이동(Great Migration)이 일어났고, 일렉기타를 사용한 시카고의 블루스는 그렇게 또 한 번 슬픈 역사 속에서 피어올랐다고 한다. 이후 블루스는 거의 모든 팝음악의 장르에 영향을 미치며 진화하고 변화했다.

로버트 존슨 같이 아주 오래된 음악을 틀어 놓으면 세션의 단촐함, 반복되는 리듬과 멜로디가 검은 대륙의 어떤 주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B.B.킹의 히트곡인 The thrill is gone도 좋다. 할아버지 B.B.킹과 젊은 존 메이어가 즉석연주(Jam)한 영상을 유튜브에서 가끔 꺼내어 보곤 하는데, 두 세대 차이나 되는 두 프로 뮤지션의 협연은 정말 멋지다. 손자뻘인 메이어에게 킹이 엄지척을 보내는 장면은 볼 때마다 울컥,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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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블루스의 한국적 블루스도 좋아해 즐겨 듣는다. 엄인호씨가 작곡 연주하고 한영애씨가 작사한 곡 [루씰]의 '루씰'은 바로 B.B.킹이 초기에 연주하며 아꼈던 기타의 애칭이었다. 말하자면 이 곡은 블루스 대선배에 대한 리스펙이었던 것이다. 한영애의 독보적인 보컬이 담긴 이 곡을 무척 좋아한다. 또 다른 싱어 제니스님의 끈적한 [루씰]도 무척 고혹적이다.

루씰, 풀밭같은 너의 소리는
때론 아픔으로 때론 평화의 강으로
그의 마음속에 숨은 정열들을
깨워주는 아침
알고 있나 루씰
그는 언제나 너를 사랑하네


운이 좋은 나에게는 또 하나의 매력적인 [루씰]이 있다.
2년 여 전에 도시의 번잡함을 피해 산마을에 귀촌한 프로 뮤지션 A부부가 얼마 전까지 옆마을 둘레길 어귀에서 작고 소박한 카페를 운영했었다. 아주 작은 가게였는데도 한쪽 벽면에 기대어 장비와 악기를 갖추어 놓았었다. 이전 환경에서 유명세로 사람들에게 시달렸던 그는 이곳에 와서 '내가 하고 싶을 때만 연주하겠다'는 원칙을 새롭게 세웠는데, 가까이에 사는 우리는 운 좋은 날 그의 멋진 기타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 A는 [루씰]을 꺼내어 블루스를 연주했다. 그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기타 톤에 얹힌 내츄럴한 보컬에 그만 흠뻑 빠져들었던 밤, 그는 청중을 위해 몇 곡의 블루스와 게리 무어를 더 선사하였고, 특별한 콘서트에 초대된 우리 몇 명은 선택 받은 청중의 황홀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가로등 불빛 아래로 빗방울의 실루엣이 우울한 아름다움을 더하고...

거칠거칠한 버번 위스키가 어울리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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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시행착오를 경험한 A는 새로운 공간을 준비하고 있다. 어느덧 좋은 선후배 사이가 된 나는 이삿짐을 거들며 그의 새로운 무대를 응원한다. 선택받은 청중의 독점적 지위로서 A 후배님의 블루스 스테이지를 기대하는 것은 산마을에 사는 사람에게 선물 같은 즐거움이다.



#음악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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