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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난 이유

시&에세이

by 여상

[맛난 이유]


햇살이 좋은 날이어야 하지

메주 만드는 날은

단단히 묶인 마음 풀리려면

하룻밤 정도는 미리 불려놔야 해


군불 지펴 푹 익히면

지난 날들 고단함까지

푸욱 익히고 나면

아, 구수한 콩내음, 온 마당에 넉넉하지


그래, 사람도 설익으면

비린내만 난다던데

솥뚜껑 들썩이게 열심히 살았으면, 이제

살살 불길 달래며

할 말 조금 뜸 들이며

모난 성정(性情) 쯤은 다스릴 때가 되었다는 뜻이지


왁자지껄 웃음소리

속닥속닥 뒷담화

서로의 안녕 챙기며

토닥토닥 엉키는 손들


징그러운 삶의 여정에

백지장도 맞들면 좀 낫다는데


앞산에는 가을 폭신 익어가고

붉고 노란 나뭇잎

고을마다 새소리

장독대에 앉은 가을 햇살까지

모두 담아보자 하네


누가 메주를 못생겼다고 하나

요래 저래 토닥이면

내 마음 이리도 훤한 걸


뉘엿뉘엿 장작불 사그라들면

발그스레 익어가는 늦가을 저녁노을


내년 된장이 맛있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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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주만 매달면 올해 할 일은 다 하는 건데..." 펜션을 운영하는 H누님이 한숨을 폭 쉰다.

"언제 하실 건데?" 안 그래도 지난주 김장할 때 무 몇 소쿠리 채질해주고는 과하게 얻어먹은 게 마음에 걸리던 차에 잘 됐다 싶었다.

"왜? 도와줄 거야? 정말? 내일은 춥고, 모레 날이 따뜻하다고 하다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확정을 꾹 찍으며 금세 얼굴이 밝아지는 H누님.


눈을 비비며 올라가 보니 사람 좋으신 K형님이 먼저 와 군불을 지피고 있다. 밤새 불려놓은 콩을 솥에 올리고 끓이기 시작한다. 콩물이 넘치도록 두 시간 가까이 끓이고 나면 끓인 시간만큼 작은 불에 뜸을 들여야 한다. 오늘 불목(불지킴이)은 K형님이 맡았다. 대두 두 말을 불려 놨으니 인내심 많고 느긋하신 K형님이 불목으로 제격이다.


콩이 익는 동안은 불 조절 외에 다른 이는 달리 할 일이 없다. 일손이 억센 H누님은 그새가 아까워 펜션 이곳저곳을 정리하고 있다. 그 옆에서 사방에 수북한 낙엽을 쓸어내고 있자니 형님이 신호를 보내신다. 드디어 콩이 다 삶긴 모양이다. 먹음직하게 삶긴 콩, 소쿠리마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마당에는 구수하고 풍미 있는 콩냄새가 한 바탕이다.


여러 차례 뒤집어가며 고르게 으깬 콩을 치대어 메주틀에 담아 꼭꼭 누른다. 나무틀에서 빼내면 이제 콩은 메주로 신분이 격상되는 것이다. 내 못난 마음도 삶고 깨고 두드리다 보면 모양이 바뀌려나? 누님이 받아 토닥거리니 빛깔도 모양도 좋은 메주가 제 모양을 찾았다.


"남자들이 도와주니 일도 아니네."

"동생하고 나하고 손발이 척척 맞아 일할 맛 나네."

"저 이는 불 피우는 게 아주 딱이네."

함께 일하니 좋았나 보다. H누님은 본래도 일솜씨가 대단하지만, 내일모레 칠순인 양반이 오늘은 끙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다람쥐처럼 뛰어다닌다. 아주 신이 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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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혼자 하기엔 조금 힘들었겠는데... 여태 이걸 혼자 하셨어?"

한 줄기 바람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듬성듬성 비어있는 나뭇가지 사이로 가을 햇살이 빗살처럼 부서진다. 부서지는 빗살 하나하나가 세파에 시달린 마음이리라.


아주 젊어서 남편과 헤어져 이 악물고 두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수십 년 후 거의 행려가 되어 나타난 전 남편의 하늘길을 오롯이 뒷바라지까지 하고 십여 년 전에 지리산으로 귀촌하였다. 그런 누님은 타지인 이곳에서 달리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또 도움을 받고 나면 생각하지 못한 불편함이 얹혀서 되돌아오는 일을 몇 번 당하고 나니, 그간 힘이 들어도 혼자 일을 처리하는 것이 더 나았다고도 했다.


"외로우셨겠네."

"응, 외로웠지."

"메주 열 번만 더 매달면 안 될라나? 열 번은 형님이랑 내가 같이 할 테니 걱정 마시오."

2년에 한 번 메주를 띄워 된장 간장을 만든다고 하니 열 번이면 누님이 구순이 될 것이다. 누님이 "정말?" 하면서 소녀처럼 환하게 웃는다.

"어마마, 뚜껑 열어요!" 솥단지가 덩달아 끓어 넘친다.


K형님은 지난해부터 허리가 많이 불편해지셨다고 했다. 건장하고 잘생긴 외모에 힘이 천하장사였던 분이 한두 해 사이에 조금 늙었다는 느낌이 든다. 10년이 넘는 우정 동안 일면 날카로웠던 내 모서리가 둥글어진 것은 K형님의 관대한 언행을 바라보면서 배운 덕이 크다. 그러다 보니 요즘 그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편할 리 없어 가끔 건강에 대한 잔소리를 해대곤 한다. 물론 강인한 그가 예전의 강건함을 되찾을 것이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는 한아름 단풍나무처럼 단단한 사람이니까.


서로 건강을 걱정하며, 자리에 없는 후배들 뒷담화를 해가며, 하하 호호 작업을 하다 보니 어느새 노을이 지고 해가 떨어졌다.


으깬 콩은 마지막 틀에 넘치지도 남지도 않게 딱 맞아떨어졌다.

"누님, 아들 하나 또 낳으셔야겠어. 딱 맞았네."

탁자 위에는 늠름한 28장의 메주가 가지런히 놓였다. 하루 저녁 바람을 쏘인 후 내일은 덕장에 매달아야 할 것이다.

"기막히네!" 메주 행렬을 바라보던 누님의 얼굴이 성취감으로 발그레 젖었다.

"이번 된장은 무조건 맛있다. 두고 봐."


치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후다닥 뒷정리를 하고 빨간 단풍잎길을 따라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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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메주 #된장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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