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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린다

시&에세이

by 여상

[ 들린다 ]


가만히 들어보면

사박사박 낙엽 밟는 소리

가을바람 스르륵 스치는 소리

또르르르 냇물 구르는 소리

늦가을 다람쥐 분주한 소리

겨울채비 동고비들 수다 떠는 소리

들린다


눈을 감으면

첫눈 보내려는 아련한 하늘

보송보송 털 자라는 들친구들

멀리 씨앗 날리는 마른 풀꽃과

겨울나기 준비하는 키 큰 나무들

모락모락 방 덥히는 산골 아궁이

보인다


눈 감으면

네가 마음 아파하는 것과

말하고픈 사연과 그리고

지친 너의 어깨


귀 기울이면

가만히 들어줄 한 사람

간절히 필요한

외로운 이가

술잔 너머에 앉아 있는데





essay


중년의 한 여자가 소리를 삼키며 울고 있다.

탁자 너머의 또 한 여자가 두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다.


"괜찮아. 괜찮아요. OO엄마만 아픈 게 아냐."


이층 카페의 창 밖으로 늦가을 바람에 마른 가지들이 너울거리고, 거리에는 바람을 따라 낙엽이 이리저리 날리고 있었다. 첫눈이 오려나, 구름을 잔뜩 머금은 조금 어두운 날이었다.

본업은 아니지만 타로 카운슬러를 하는 마을 후배가 있다. 이쌤으로 통하는 그녀는 가끔 카페 한쪽에서 의뢰인들의 타로점을 봐주곤 하는데, 용하다는 소문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도 있었다.


이 날도 그녀는 점괘를 풀어주기 위해서 카드를 펼친 것이다. 다섯 장의 카드를 뽑게 하여 세 줄로 세팅을 하고, 두 장을 뒤집으며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까지도 맞은편에 앉은 의뢰인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남원에서 왔으니 꽤나 먼 거리를 찾아온 여자는 나이에 비해 짙은 화장을 한 얼굴로 코 끝을 조금 들고 '한 번 맞혀봐"하는 느낌을 자아냈다.


오픈한 카드의 그림을 북유럽 신화의 상징으로 설명하며 이쌤이 몇 가지 질문을 하자 여자가 약간 주저하면서 말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자기가 한 말을 괜히 꺼냈다는 듯 도로 주워 넣기도 하며 횡설수설하는 동안에도 여자의 표정은 여전히 저항하듯 불편한 심기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 여자의 모습을 온화한 얼굴로 바라보며 이쌤은 가끔 추임새를 넣었다. 추임새는 '아, 그랬군요' 또는 '맞아, 나도 그래' 등이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쌤이 여자의 말을 한 번도 끊지 않고 온전히 듣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이 터진 의뢰인 여자는 숨이 차도록 많은 말을 꺼내었다. 두서없던 이야기들의 퍼즐이 물 잔을 채워 주러 오고 가던 나에게도 맞추어지고 있었다.

지병으로 세상을 등진 남편 이야기와 사춘기에 접어든 남편의 품성을 꼭 닮은 큰 아들에 대한 상처와 걱정, 그리고 경제적인 불안감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느 가족이나 아픈 일들이 작거나 크게 있기 마련이다. 그 속에서 아픔을 감당하는 역할의 큰 지분은 아내이자 엄마인 여성에게 할당되기가 십상이다.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한 여자는 크지 않지만 격앙된 목소리로 하염없이 말을 쏟아내었다. 다른 손님이 없는데도 누가 엿듣기라도 하는 듯 주변을 자주 돌아보았다. 이쌤은 마주 앉은 여자의 눈을 주시한 채 여전히 추임새를 넣으며 듣고 있었다. 변화가 있다면 말의 내용에 따라 이쌤의 표정이 평온했다가 찡그렸다가 슬픈 듯하면서 달라진다는 것뿐이었다.

아직 열지 않은 카드 세 장이 테이블에 깔린 붉은 매트 위에서 이쌤의 손끝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가 눈물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네 번째 카드를 열고부터였다. 작고 까무잡잡한 손으로 카드를 뒤집으며 이쌤이 들릴 듯 말 듯 신음 같은 소리를 낸 것을 들었다.

잠시 들여다보던 이쌤은 오히려 외뢰인에게 카드의 그림이 어떤 느낌을 주느냐고 물었다. 호칭은 사모님에서 OO엄마로 바뀌어 있었다. 점괘를 보러 온 사람에게 점괘를 묻다니... 약속된 1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넘어가면 카운슬링 비용을 더 받게 될 것이다.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은 OO엄마는 이제 슬픈 모드에 들어서 있는 듯 보였다. 그녀가 많은 말을 쏟아내고 나서야 이쌤은 네 번째 카드의 숨은 뜻을 펼쳐 보여 주었다. 그 비의(秘義)를 설명할 때의 이쌤은 감정의 동요가 없이 매우 차분한 어조를 사용하고 있었다. OO엄마가 비로소 이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 보였다.

이윽고 마지막 카드를 뒤집고 대화가 오고 가는가 싶더니 이쌤은 불쑥 팔을 뻗어 쓸모없는 것들을 빗자루로 쓸어 내듯이 펼쳐진 카드들을 테이블 한쪽으로 밀어냈다. 이번에는 이쌤의 호칭이 바뀌었다.


"언니, 고마워요. 이제야 좀 숨을 쉴 것 같아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여자는 두 손을 마주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시계는 4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세 시간 반이나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이를 꼭 안아준 이쌤은 어깨를 다독이며 OO엄마를 문 밖까지 배웅했다. 마음이 답답하면 언제든 다시 오라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복채는 끝내 사양했다. 그날 내가 본 것은 오직 하나, 이쌤이 남원에서 왔다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한없이 들어주었다는 것. 묘한 점괘풀이 따위는 없었다. 해답은 이미 의뢰인 본인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한사코 복채를 사양한 덕분에 나도 그날 찻값을 받지 못했다. 찻값은커녕 손님을 보낸 이쌤이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기 때문에 공짜술을 풀어 달래야만 했다. 이번에는 내가 이쌤의 말을 들어주리가 마음을 먹었지만 이쌤은 말없이, 가끔 혼자 중얼거리며 눈물만 흘렸다. "xx...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날이 저물어 가고, 멀리 하늘을 보니 아무래도 첫눈이 내릴 것 같았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며 눈송이가 떨어졌다.

3년 전 겨울이 오던 날의 이야기이다.



#경청 #공감 #대화 #위로 #치유 #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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