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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기쁨 Mar 07. 2024

일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

누군가가 챙겨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2002년은 월드컵이 열린 해이다.

그 해를 떠올리면 월드컵만큼이나 엄청난 관심과 유행을 했던 모 카드 광고가 문득 떠오른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얼마나 멋진 말인가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광고가 나왔던 시기를 생각하면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막 IMF의 충격에서 벗어난 그 시기에 많은 아버지들 그리고 그 당시의 샐러리맨들에게는 저 광고는 일종의 판타지 같은 광고가 아니었을까?


아니 내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열심히 일했으니 이젠 떠나라고?
말도 안 되는 광고인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직장인들의 판타지 실현과 함께 공감을 얻으면서도 머릿속에 물음표를 달게 하는 광고였을지도 모른다.


직장인 분들에게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에게는 그저 멋진 카피라이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한편으로 워커 홀릭 (Worker Holic)이라는 단어도 수면으로 떠 올랐던 기억이 난다.


워커 홀릭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를까?


나에게 이 워커 홀릭은 '일을 정말 잘하는 프로 일잘러'라든가 '일이 너무 좋아서 그 일을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그보다는 '일에 중독되어 멈추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게 더 크기 때문이다.


어떻게 일에 중독되었길래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다만 어떤 환경에 놓이면서 그 상황을 타계하고자 한 몸부림이 더 이상 멈출 수가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니라 생각해 볼 뿐이다.


지금같이 워라밸을 중요시하는 요즘에는 이 '워커 홀릭'이라는 이미지가 어떤지 또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하고 번아웃 (Burnout)을 야기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그날 역시 날씨가 그리 좋지 않았다.

비는 안 오고 하루종일 우중충하다 보니 내 마음도 그에 따라 우중충해졌다.


그런 날은 차라리 비가 내리면 기분이라도 좋았을지도 모른다.

비에 내 외로움이라도 어떻게 같이 흘려볼까 하는 그런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바에는 보통 남성분들이 대부분이다.


여성분이 온다고 해도 보통 동행이 있기 마련인데 일할 당시만 해도 혼자 오시는 여성분은 S가 유일했다.


흔히 말하는 톰보이 스타일의 특유의 매력을 보여주시던 S가 그날따라 유독 피곤해 보였다.


항상 존댓말로 대하시는 S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지만 몇 번의 대화를 통해서 이제 30대에 접어든 분이시고 회사에서 팀장으로 일명 '워커 홀릭'에 가까운 분이라는 사실 정도였다.


그녀는 상당히 똑 부러지는 말투로 언제나처럼 나에게 '씨'를 붙이며 인사한다.


"바스키아 씨! 오늘은 스트레이트로 한잔하고 싶은데 스트레이트에는 뭐가 좋아요?"


항상 조니워커블랙에 진저에일을 1대 3의 비율로 섞어 하이볼 스타일로 드시던 S가 자리에 앉자마자 추천을 원하셨다.


"스트레이트요? 무슨 일.. 아니에요. 기존의 마시던 S의 취향이라면 더 글렌리벳 12년산이나 15년산이 적당해 보여요."


보통 스트레이트의 경우에는 개성이 강한 싱글몰트를 추천하긴 하는데 그나마 더 글렌리벳이 그녀의 취향에 맞겠다 싶었다.


"그럼 그걸로 부탁드려요."


 향을 맡으며 음미하더니,


"음~ 이게 뭐라고요? 향이 좋네요. 스트레이트도 괜찮은데요?"


"더 글렌리벳 12년산입니다. 하이볼 스타일로 마시다 보니 이질감이 없을 거 같아서 추천해 봤습니다."


"고마워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애연가인 S는 항상 위스키 한잔을 마시고는 담배를 피우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그분과 대화는 항상 짧은 이야기만 주고받곤 했지만 그날따라 한숨을 내쉬며 대화를 이어간다.


"바스키아 씨는 남자라서 좋겠어요."


"아니. 뜬금없이 남자라서 좋다니요? 회사에서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한숨을 크게 쉬고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여자라는 게 걸리는 게 많네요.
그런 거 있잖아요.

'여자가 이 일을 할 수 있어?' 이런 시선 말이에요.
일에 여자 남자가 어디 있겠냐만은 회사에서는 항상 그런 시선으로 저를 보곤 한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일에 대해서 진심으로 열심히 했지요.
게다가 하는 일이 제가 좋아하는 일이라 성공도 하고 싶고...
남들 회식한답시고 술 마시고 있을 때조차 저는 제 자신을 회사에서 증명하기 위해 일을 했죠.

슬슬 이렇게 몇 년을 하다 보니 지치기 시작하네요.

게다가 그 일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조차 시선이 너무 불편해요.
'이 여자 독하네' 이런 시선말이에요.

못하면 또 '여자니까 안돼' 딱 이럴 거 아니에요!

웃기죠?
잘해도 못해도 이런 식이라니!
남자라면 이런 시선을 받을 이유가 없잖아요.

누가 이런 나를 위로해 줄 수 없나?


"남자 친구 있으시잖아요?"


"에휴... 남자 친구는 이런 나를 이해 못 해요."


스트레이트라서 그런가 취기가 빨리 오는가 싶더니 내가 편한 동생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데 바스키아가 날 좀 위로해 주면 좋겠네?"


"어이쿠.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런 분위기에는 당황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으면서 농담으로 받아치는 게 좋다.


"호호호. 농담이에요. 원래 오늘 남자 친구랑 데이트하기로 했는데 일 때문에 약속을 못 지켜서 그 친구한테 미안하네요."


"일 때문에 미안하다고 연락은 하셨고요?"


"아니요. 전화하면 바로 화낼 텐데 차라리 내일 연락하는 게 오히려 좋아요. 그 친구도 알 거예요. 이제는 이런 상황이 오면 연락도 안 해요. 뭐 내가 안 받을 거라는 걸 잘 아는 거죠."


"음... 솔직한 제 생각을 말하자면 여기 오실 바에는 차라리 남자 친구분한테 가보시는 게 더 좋았을 거 같은데요?"


"그런가요?"


Ray Bryant Trio - Django (1957년 음반 Piano Piano Piano Piano)


그러더니 문득 그녀가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재떨이를 비워주고 다른 손님분들의 주문을 받으며 내 일을 하다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테이블에 엎드려 위스키 잔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저러다가 잠이 들면 정말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번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인 그녀다 보니 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몇 분이 지났을까?

어떤 남성분이 들어오시더니 S를 깨웠다.


"S! 여기서 이렇게 자면 어떻게?"


"우리 자기 왔네? 나 보러 온 거야? 나 너무 힘들어."


하더니 우는 게 아닌가?


지금까지 일하면서 처음 맞닥뜨린 상황이라 순간 나도 모르게 당황을 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할 때 남자 친구분도 당황하셨는지 옆자리에 앉고선 등을 토닥여 준다.


"바텐더님 물 한잔만 부탁해도 될까요? 아 이거 참 죄송하네요. 사실 여자 친구가 요즘 힘들어하는 거 알고 있는데 제가 이해를 못 해준 게 아닌가 싶군요.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시원하게 얼음물을 한잔 건넸다.


"여기가 골목이라 모시고 가시기 힘드실 텐데 택시 잡아드릴까요? 아는 기사분 연락처가 있거든요."


"아! 그래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 부탁드려요. 정말 고마워요."


그 남성분이 그녀를 걱정하면서도 사랑스럽게 보는 눈빛을 보니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셨다.


그래도 그녀는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을 소중하게 챙겨주는 남자 친구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말이다.


때론 일에 미쳐있는 것도 좋다.

하지만 자신을 추스르지 못해서 번아웃이 온다면 그것만큼 큰 손해일 것이고 힘든 일일 것이다.

오히려 그런 것이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데 방해물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일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을 좀 더 챙기시길 바라며 건배!



Ray Bryant 하면 가스펠 영향을 많이 받은 연주를 선보이는데 특히 블루스에 굉장히 특화된 연주를 맛깔나게 보여주는 피아니스트이다.


이 작품의 타이틀은 과거 LP를 보면 <Piano Piano Piano Piano>로 적혀있지만 실제로 <Ray Bryant Trio>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물론 Epic에서 발매한 동명의 타이틀 <Ray Bryant Trio>도 있지만 보통 Prestige에서 발매한 이 작품을 지칭한다.


그의 음반은 대게 트리오 형식의 음반이 많지만 피아노 솔로 음반도 상당수 많다.


Coleman Hawkins, Kenny Burrell, Betty Carter 등 정말 많은 뮤지션들과도 협업을 하기도 했고 특유의 블루지하면서도 경쾌함이 정말 잘 묻어나는 연주를 보여주기 때문에 은근히 Ray Bryant를 좋아하는 재즈 마니아분들이 많다.


'Django'는 피아니스트 John Lewis의 곡으로 약간은 진중한 원곡과는 다른 그만의 특유의 경쾌함이 귀를 자극한다.


쟈켓도 참 뭐랄까?


벤치에 홀로 앉아있는 어느 누군가의 모습을 배경으로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저 커버는 왠지 모르게 간지가 흐른다고나 할까?


많은 재즈 마니아분들이 Ray Bryant 하면 이 음반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그만큼 많은 재즈 팬들에게 회자되는 음반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손에 꼽는 음반이기도 하다.


Label: Prestige

Title: Piano Piano Piano Piano

Released: 1957


Ray Bryant - Piano

Ike Isaacs - Bass

Specs Wright - Dru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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