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 앞에서 산다는 것에 대하여
집 앞에 해변이 있는 삶. 1년 차에는 틈나는 대로 가서 걸어 다녔지만 일이 바빠 여름에 해수욕은 그다지 자주 가지 못했고, 2년 차에는 해수욕을 정말 많이 했다. 차 트렁크에 늘 해수욕 세트를 갖춰놓고 원할 때마다 가서 했는데도 부족한 이 기분은 뭘까. 제주에 살면 가장 좋은 점 중 하나가 에메랄드 빛 해변에서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원할 때마다 해수욕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제주에 살면서 1년에 한 번도 해수욕을 하지 않는 내 여동생 같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제주도 여행을 오셨던 여행객이라면 제주의 여름이 늘 이렇게 시리듯 푸르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에메랄드 빛 바다와 하얀 백사장도 쨍쨍 빛나는 해가 있어야 하는 법! 실제로 바닷가 마을에 살아보니 흐린 날씨도 몹시 많고 가끔은 안개가 스멀스멀 바다에서 올라와 마을을 덮기도 한다.
새벽 바닷가 마을을 잠식한 물안개. 좀비 영화에서는 이렇게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사이에서 좀비가 나오겠지만, 이 사진은 평화로운 어느 새벽 우리 집 앞의 사진들이다. 아침 케이크 작업을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안개에 휩싸인 동네가 너무도 신비해서 해변까지 뛰어갔다 오고 말았다.
제주도 오션뷰를 보며 산다는 건 참 좋은 일만 많을 것 같지만(물론 좋은 일도 많지만) 자연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하는 일이 도시에 비해 좀 더 많다는 뜻이다. 집 앞 도로에서 짭짤한 대기의 향을 맡고, 태풍 후에는 자동차가 소금기로 뒤덮여 있는 것을 발견하며, 태풍 전에는 진한 노을을 보며 내일의 날씨를 유추한다. 그래서 바닷가에서는 차가 빠르게 녹이 슬며, 아름답고 진한 노을 후에는 바람이 강한 흐린 날씨가 찾아올 것을 예비해야한다.
서울에 비해 매일의 매시간의 하늘이 시시각각 다른 얼굴을 드러내니, 동네 친구 단톡방에는 그 때의 날씨가 첫 주제가 된다.
지금 하늘이 엄청 예뻐! = 지금 당장 하늘을 봐라
곧 비가 올 것 같아. = 끕끕하다 습하다
오늘 진짜 습하다! 제습기 틀어놓고 나왔어. = 곰팡이 조심!
지금 안개 낀 거 맞지?! = 오늘 날씨 좀 신기
노을 보러 일하다 나왔다. = 지금 노을 끝내준다
그림 같은 날씨가 이어지다가도 한 순간에 흐려지길 반복하기 때문에 단톡방에는 지금 이 순간의 날씨를 이야기하고 공유한다. 오늘의 날씨가 아닌 지금의 날씨.
그래서 멋진 풍경을 본다면 바로 카메라를 들어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 바다로 달려가는 그 순간에도 하늘은 계속 그 얼굴을 바꾼다. 제주에 오면 순간이 소중해지는 이유는 변화무쌍한 날씨도 일정 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제주에 와서는 핸드폰 속에 하늘 사진이 부쩍 늘었다. 하늘과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처음 제주에 내려와 바닷바람 무섭단 이야기를 주변 어른들이 하실 땐 잘 몰랐다. 소금기 스민 바람은 현수막도 금방 바래게 만들고 차도 금방 녹슬게 하고 운전할 때 안개라도 끼면 가시거리 확보도 어렵게 만든다. 날이 습하고 바람도 잠잠한 날이면, 어촌처럼 낚시 미끼 냄새같은 찌린내가 공기 중을 떠돈다.
깊은 새벽에 해무라도 낀다면 가시거리는 최악이 된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도, 짙은 밤안개가 무서워 차 없을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왔기 때문이다. 제주도 차선은 밤에 잘 안 보인다. (도료가 저렴한 거라 빛 반사가 낮다는 말도 있다.) 해무가 낀 상태로 차 많은 퇴근시간에 운전하긴 무서워서 새벽까지 기다렸는데 새벽에는 야간 할증 붙은 택시 아저씨들이 1차선, 3차선을 씽씽 달리시는 통에 한 치 앞이 겨우 보이는 안갯속을 운전하면서 엄청 쫄았다. 저 멀리 신호마저 안개가 가리는 밤거리를 달리고 집에 왔더니 등에 식은땀이 오소소 나있었다. 바닷가 근처에 살아서 안 좋다고 느꼈던 가장 짧고 강렬한 시간이었다. 이를 갈며 '제주도 정착 잔혹사'라는 글을 적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너무 심각한 제목이다. 하지만 그 새벽엔 참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온 지인들은 무섭다고 하는 동네의 어둔 골목길을 걸으며 새벽 별을 보는 일은 익숙해졌지만, 안개 낀 번영로를 달려야 하는 터프한 제주도민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번영로나 평화로에 안개가 끼면 오히려 516이나 1100 도로가 더 낫다고 하시는 실제 제주도민분들의 이야기를 군대에서 호랑이랑 마주치고 살아남았다는 류의 허세로 들어야 할지 실제 정보인지 아직 긴가민가한 나는 제주 바닷가 마을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