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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Nov 26. 2021

나만 들리는 소리, 들리지 않게

불안한 마음을 불안해하지 않기를


삐이익-


피곤할 때만 커지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대중없다. 제멋대로다. 밥을 먹다가도 침대에 누웠을 때도 화장실에서 멍 때리고 있을 때도 예고 없이 날카롭게 내지른다. 그 몇 초의 시간 동안에는 온 세상이 그 녀석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다. 다행히 아찔한 고주파로는 횟수가 잦지 않고 길지 않기에 크게 매이지는 않는다. 평상시에는 낮게 계속 흐르고 있어 내 신세는 주방에서 하루 종일 소리를 내고 있는 냉장고와 다를 바 없다. 문제는 녀석의 소리가 나만 들린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이 소리가 세상이 본래 가지고 있는, 디폴트 된 소리인 줄 알았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들리는 줄 알았다. 밤이 되면 더욱 커지는 시계 소리보다 더 크게 '쓰으으' 들렸다.(물론 지금도). 자정 12시, 애국가가 끝나고 어떠한 프로그램도 수신되지 않는 브라운관 TV 소리처럼. 원래 있는 소리이니 그러려니 하고 잠이 들곤 했다.


예닐곱 살 때 친구네가 하는 가구점 앞을 지날 때였다. 바닥에 떨어져 녹아 진득대고 있던 사탕이 너무 탐이 나서 몰두해 있었다. 그때 내 옆으로 어떤 굉음이 지나갔고 잠시 후 커다란 화물트럭에서 기사 아저씨가 문을 열고 "괜찮냐"라고 물었다. 나는 소리 내어 울었고, 울면서 사람처럼 두 바퀴로 서서 벽에 기대어 있는 리어카 뒤편으로 숨었다. 내 울음소리에 엄마가 달려왔고 내 손에 무언가 달달한 것을 쥐어 주면서 달래주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지만 세상에서 처음 들어본 굉음에 넋이 나가 무서웠던 것 같다. 감정은 추측만 할 뿐이지만 장면들은 띄엄띄엄 생생하다. 아마 그때 그 커다란 소리가 내 귀에 둥지를 틀었던 것 같다.


녀석은 소란스러운 낮에는 얌전히 들릴 듯 말 듯 울다가 조용한 밤이 오면 까만 공간에서 가느다랗게 '삐이이', 때로는 '쓰으으' 하고 신경질적으로 울어대곤 한다. 그러나 대체로 작고 약하게 끊임없이 울었기에 나는 그 소리가 세상이 지닌 기본적인 소리인 줄 알았던 거다. 내 육체가 커지고 점점 곤해져 목과 눈이 숨어서 울 때면 귓속의 녀석은 더 큰 소리로 울어댔다. 목도하는 슬픔의 부피가 더 커져서일까, 더 큰소리로 울어대는 것은.


일만 떠다니고 나는 없었던 시절, 울음의 진폭이 커져 이비인후과에서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주파수 영역별로 청력 검사를 했지만 별다른 이상 없었다. 흐르는 시간보다 더 빠른 가속도로 영혼이 늙어가며 내지르는 소리였다.


특별한 질환 없이 오는 이명은 귀 기능 자체가 퇴화하는 것이니 노안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 한다. 치료법은 무궁무진했다. 다시 말하면 아직 뚜렷한 치료법이 없다는 것과 같다.  가장 솔깃했던 방법은 귓속 울음을 모른 척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아들이 맨날 하는 말).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 두면 '소음 차단시스템'이 뇌까지의 전달을 막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훈련을 통해 작동되는데 이는 이명이 병이라는 생각을 바꾸고, 괜찮다고 믿는 것, 혹은 그 소리를 잊는 것이라고 한다. 혹은 다른 소리를 듣거나 다른 것에 신경을 쓰면 내 귀속의 그 지겨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의식을 하면 양쪽 귀에서 계속 '쓰으으'하고 울어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니까 이 귀속 울음과의 싸움은 일종의 심리전인 것이다.


내 몸에서 원래 그런 줄 알았던 것이 또 하나 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줄 몰랐다가 알게 된 것이다. 결혼한 후 얼마 되지 않던 때이니까 20여 년 전의 일이다. 코감기가 걸려 동네 이비인후과에 갔는데 의사가 내 코를 기계로 들여다보더니 대뜸 "코뼈가 삐뚤어진 거 알고 계세요?" 했다. "네에? 아니요, 아닌데요 제 코가 그럴 리가요!" 당황한 나는 치료를 받다 말고 확인하려고 일어나려 했다. 의사가 나를 진정시키고 하는 말이 더 웃겼다. "결혼도 하셨는데 코가 삐뚤어지면 어때요."


그때 처음 알았다. 거울을 통해 내 코를 유심히 보니 얼굴 대칭축을 중심으로 코뼈가 오른쪽으로 약 3~5° 정도 휘어있었다. 그전에는 절대 보이지 않던 것이 그 후부터는 너무 잘 보인다. 신경이 쓰인다, 오른쪽으로 삐뚤어진 내 코가. 남편에게 이 사실을 말했더니 속았다고, 코가 삐뚤어진 줄 알았으면 결혼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하며 큭큭거렸다. 그러는 남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턱이 왼쪽으로 약간 틀어져 있었다. 쌤쌤이다.



나만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나 삐뚤어져 있는 코뼈에는 그러려니 무덤덤할 수 있으면서도 예민하게 매이는 것이 있다. 감정이다. 조금만 휘어져도 불편하다. 감정이 생성되는 것은 필시 어떤 상황적 계기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찾느라 골몰한다. 그러고는 감정의 객관화를 위해 책을 본다. 사전처럼 펴보는 강신주의 <감정수업>에서는 총 48가지의 감정을 다루었다. '비루함'에서 시작해 '복수심'으로 맺는다. 그런데 그가 다룬 48가지의 감정 중에 '불안'이 없다. 어쩌면 대부분의 감정이 '불안'을 기저에 깔고 있기 때문에, 아니면 감정 자체가 불안에서 비롯되기에 별도로 다루지는 않았을 거라고 나름 추측해 본다.


여러 가지 스펙을 쌓느라 휴학 중인 딸이 요즘 비실비실하다. 소화가 되지 않고 갑자기 어지럽고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내과를 갔더니 '과민성 대장증후군'이라 했고 한의원을 갔더니 '담적' 증상으로 소화기관이 제 기능을 못해 에너지가 쌓이지 않는다고 했다. 원인은 예상했던 대로 '스트레스'다. 즉, 불안이다.

딸은 불투명한 자신의 미래가 걱정되어서 불안해하고 있다. 희멀건한 얼굴빛으로 기가 죽어 있는 딸에게 무어라 말을 해 줄까.

 

"불안한 마음을 불안해하지 마, 불안한 마음은 당연한 거야. 모든 사람들은 늘 불안하지. 단지 생각하지 않을 뿐이야. 불안한 마음에 매몰되지 않도록 말이야."


늘 불안해하는 나 자신에게 중얼거리던 말이었다.


인디 밴드 '혁오'의 노래 중에 '톰보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 가사 중에서 들을 때마다 마음에서 서걱거리면서도 주억거리게 되는 대목이 있다.

난 지금 행복해 그래서 불안해, 폭풍 전 바다는 늘 고요하니까, 불이 붙어 빨리 타면 안 되잖아
나는 사랑을 응원해  
젊은 우리, 나이테는 보이지 않고, 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꺼져가는데


행복한 중에도 불안해하는 것이 사람이다. 나이테가 보이지 않는 젊음은 얼마나 더 불안할 것인가.


불안한 마음을, 낮게 흐르면서도 시끄러운 감정을 내가 평생 지니고 있는 이명처럼 여기려 한다. 그냥 내버려 두고, 괜찮다고 잊으려 한다. 가장 현명하지만 어쩌면 가장 어려운 '불안 차단시스템' 일수 겠지만. 이명 치료를 위한 '소음 차단시스템'처럼 훈련이 필요할 테지만.


한의원에서 지어온 한약을 먹으며 딸의 표정이 좀 밝아졌다.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 때문에 불안이 옅어졌을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골몰하여 불안해하지 않기를. 그저 내버려 두고 잊기를.






나만 보이는 것들도 있다. 간혹 눈앞에서 하얀 날파리들이 날아다니기도 한다.

나만 들리는 것, 나만 보이는 것들이 늘어만 간다.

남편이 옆에서 자꾸만 형광등에서 지지직 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 묻는다.



표지그림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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