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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국가, (인터넷), 네트워크 국가, 네트워크 마을

균열, 공백, 기회. 네트워크 마을 출사표

by LibaD

저에게 네트워크 마을이란, 자기 부족을 찾아 떠나는 기나긴 여정입니다. 영웅 서사만큼 오래된 이야기지만, 음악과 배경만 바뀌었을 뿐 우리는 늘 새로운 부족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21세기 영웅 서사는 어떤 이야기일까요?


오늘의 이야기 순서입니다.


1. 국가가 힘을 잃을 때

2. 인터넷에서 국가가 피어날 때

3. 네트워크 국가와 팝업 도시

4. 네트워크 마을과 로컬 커뮤니티




국가가 힘을 잃을 때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라떼는 월요일 아침 0교시마다 국민의례를 했습니다. 십 년 넘게 읊다 보니 지금도 입에 착 달라붙습니다. 제가 외우는 건 1972년 버전입니다. 이 ‘조국’과 ‘민족’,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 같은 표현이 너무 올드하게 느껴졌던지, 2007년에 문장이 갈아엎어집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2025년 요즘 것들은 아마 이 ‘맹세’를 외우지 못할 겁니다. 너무 올드하거든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나가 죽으라면 나가 죽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나가 죽던 시절도 있었고요. 지금은 다 끝났습니다. 세계 3차 대전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국가 간 전면전을 치르기엔 다들 순국선열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전쟁도 계엄도 주식 시장 눈치 봐가며 조심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내 나라보다 내 계좌가 소중합니다.


국가는 패키지 상품입니다. 치안과 국방, 갈등 중재, 기간 시설, 사회 보장 제도, 여권, 교육, 화폐와 금융 규제, 공동체 의식과 정체성까지 한데 묶어 파는 종합선물세트였습니다.

상품화는 이런 패키지를 쪼개서 따로 팔거나, 따로 있던 것들을 다시 묶어 파는 일입니다. 국가 패키지는 해체되고 있습니다. 국방(팔란티어)부터 신분 인증(구글/애플 로그인), 소속감(SNS와 온라인 커뮤니티)까지, 국가 유저들은 어느 순간부터 국가를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국가 구독은 당장 해지하고 싶습니다.


국가뿐 아니라 근대의 제도(institution) 전반이 힘을 잃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핵가족, 언론, 주거/교육/고용/사회보장 제도 등, 산업화 시대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만들어진 제도들이 스마트폰 세상에서 불협화음을 내고 있습니다.


1. 민족 국가 모델은 끝났다
는 생각이 나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중략).. '국가'라는 걸 내가 선택할 수만 있다면, 새롭게 등장한 국가 비스무꾸리 한 하룻강아지들에 밀려 한국 중국 미국 모든 기성 국가들은 100전 100패 할 것 같았습니다. '소속감'이라는 건 더 이상 민족 국가(nation state)가 주기엔 뭐랄까... 말랑말랑하고 변화무쌍하고 재밌는 게 제일 중요하고 그런 것으로 바뀌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2. 우리가 같이 국가를 만들자
는 또라이들과 일하고 있습니다. 보다 현실적으로는 '메타버스에 Layer2(한국 같은 기성 국가가 layer1, 그 위에 크레이프 케익처럼 한 층 더 쌓이는 게 layer 2) 국가를 만들자'가 되겠습니다.

- 2021년에 썼던 글


종교와 국가 이후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국가라는 건 계속 존재할까요?

이제 무엇을 위해 나가 죽어야 할까요?



인터넷에서 국가가 피어날 때


라떼는 공유 현실(shared reality)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이랑 노래방에 가면 서로 나이를 맞출 수 있었습니다. 다들 그 시절 유행가를 꿰고 있었거든요. 누구의 신청곡이든 다 함께 따라 불렀습니다. 라디오와 TV를 통해 우리는 같은 시기, 같은 노래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유행이라는 게 없습니다. 너무 많아서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이제 원자와 분자 대신 0과 1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세계의 만유인력은 알고리즘(algorithm)입니다. 우리가 메트릭스 메타버스를 떠나지 못하도록 꽉 붙잡아둡니다. 각자의 버블 안에 가둬서요.


라떼는 종이 문서를 스캔하며 O2O(Online to Offline, Offline to Online)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파일이 쌓이자 사람들은 워드 프로세서를 거쳐 구글 독스로 옮겨갔습니다. 문서 작업이 그랬듯이, 국가도 오프라인 패키지에서 온라인 네트워크로 옮겨갈지 모릅니다. 이제 스캐너와 프린터는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


구글과 네이버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인터넷 회사들은 90년대 후반, 00년대 초반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터넷이 있던 세대가 이제 막 주류 사회로 나오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손안에 인터넷이 있던 세대는 아직 학교에 갇혀 있고요. 인터넷 원주민에게 100년도 넘은 산업 시대 제도들은 봉건 제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20세기 일과 일하는 방식> 참고)

그리고 인터넷에는 터줏대감 NPC가 있습니다. 우리의 친구 AI입니다. 인터넷 원주민(internet native)의 화폐, 인터넷 원주민의 조직, 인터넷 원주민 국가는 요즘 것들과 AI가 만들어갈 것입니다.



낡은 세계는 죽어가고, 새로운 세계는 태어나려 몸부림친다.
지금은 괴물들의 시간이다.

“The old world is dying, and the new world struggles to be born: now is the time of monsters.”

- Antonio Gramsci



네트워크 국가와 팝업 도시


네트워크 국가는 강한 결속과 집단행동 능력을 가진 온라인 커뮤니티가 세계 곳곳에 영토를 크라우드펀딩해 나가며, 결국 기존 국가들로부터 외교적 인정을 얻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다.


A network state is a highly aligned online community with a capacity for collective action that crowdfunds territory around the world and eventually gains diplomatic recognition from pre-existing states.

- The Network State


네트워크 국가는 테크 커뮤니티가 낳은 괴물입니다. 실리콘 밸리의 인플루언서 발라지 선생님께서 펌핑 산파 역할을 하셨습니다.


Screenshot 2025-12-04 at 3.42.47 PM.jpg 새로운 도시 만들기 7 계명


20세기 세계 대전과 냉전이 끝나고, 큰 형님 미국의 지도편달 아래 우리는 '규칙 기반 질서(rule-based order)'에 따라 살았습니다. 국가와 제도는 영토, 출생(birthright), 관료제를 중시합니다.

21세기에는 자본과 물류가 국경을 우습게 넘어 다닙니다. 원격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늘어만 갑니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는 수백 년간 국가가 독점해 온 화폐 발행을 유튜브 채널 개설만큼 쉽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절이 싫어진 중은 절을 바꾸기보다 떠나길 선택합니다.

어디로요? 인터넷으로요!


인터넷은 이미 세계 초강대국입니다. 우리의 소통, 거래, 협력은 온라인 세상에서 이뤄집니다. 이 세계는 코드와 프로토콜, 알고리즘으로 움직입니다. 이 '코드 기반 질서(code-based order)'의 끝판왕이 바로 네트워크 국가입니다.

온라인에서 커뮤니티를 만들고, 온라인 정체성, 온라인 경제와 화폐, 온라인 협력 구조를 갖춥니다. 차차 오프라인 거점을 마련합니다. 그렇게 커뮤니티별로 물리 세상에 거점이 생겨나고, 그들이 모여 군도(群島, archipelago)처럼 네트워크 국가가 생겨납니다. 사람들은 국가에 가입(opt-in)합니다. 태어난 곳의 좌표는 상관없습니다. 그때그때 내 버블에 맞게 내 도시, 내 국가를 고를 수 있습니다.


1111.png (AI 합성) 왼쪽 위부터 시카고 시장, 보스턴 시장, 뉴욕 시장 당선인, 미국 대통령. 대도시 세 곳의 네트워크가 주/지방정부 네트워크보다 끈끈하면 어떨까?


지금은 팝업 도시의 시간입니다.


인터넷 친구들이 한 달짜리 팝업 도시에 모여 동네 친구가 됩니다. 반응이 좋으면 퍼머넌트(영구) 도시로 진화합니다. 반응이 계속 좋으면 진짜 도시/특구/국가가 됩니다. 밤하늘 별처럼 팝업 도시들이 지구를 수놓습니다. 이제 비행기표와 암호화폐 지갑, 온라인 커뮤니티 멤버십만 있으면 세계 어디로, 새로운 질서 어디로든 이사 갈 수 있습니다.


Eh9wtB_VgAAuILu?format=png&name=900x900 규모와 지속 기간으로 나누어진 클라우드 사회 구분표


그런데 다들 이렇게 엑싯만 좋아하면 소는 누가 키우죠?



네트워크 마을과 로컬 커뮤니티


네트워크 국가의 정의를 다시 봅시다. "네트워크 국가는 강한 결속과 정렬, 집단행동 능력을 가진 온라인 커뮤니티가 세계 곳곳에 영토를 크라우드펀딩 하며, 결국 기존 국가들로부터 외교적 인정을 얻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다." 영토와 외교적 인정이 중요해 보입니다. 국가 만들기의 마지막 플레이팅 작업 말입니다. [3]


내재(內在) vs 탈출(脫出). Embody vs Exit

발라지의 '새로운 도시 만들기' 순서도는 AI 뺨치게 논리적입니다. 하지만 AI와 달리 저는 데이터 센터에 살 수 없습니다. 저는 뜨끈한 온돌 바닥과 신맛 나는 커피를 좋아합니다.

온돌과 커피를 위해서는 전기와 상하수도, 도로와 항만, 치안과 소방, 의료와 교육, 폐기물 처리 등등이 필요합니다. 접시 위 플레이팅 전에 먼저 있어야 하는 것들. 장보기와 재료 손질, 소금과 지방과 산과 열 같은 보이지 않는 작업들입니다.

누구나 팝업 도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건 유지보수(maintanence)입니다.



관심 경제와 로컬 커뮤니티


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는 중력이 셉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금방 식기 마련이고, 이 ‘시간 소멸(time decay)’ 압력이 너무 높아서 이 별의 생명체들은 자칫하면 바로 짜부라지고 맙니다. 팝업이 영구 도시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breakneck 탈출 속도(Escape velocity)를 확보해야 합니다. 네트워크의 거점을 선정하는 기준이 저렴한 물가와 온난한 기후, 사람들의 친절뿐이라면, 더 좋은 조건의 팝업이 나올 때마다 기존 팝업은 팝다운 짜부라질 것입니다.


네트워크 국가의 시간이 온다면, 이 세상 어디에서 머물지는 무척 의도가 담긴 결정 (intentional decision) 일 것입니다. 세상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는 인터넷 원주민들은 어디로 모일까요? 어디에 머물까요?


절을 고쳐 쓰려는 중들은 이 질문에 답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한국이 멸종 위기종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성격이 급했을 뿐, 어차피 북반구 동지들 대부분 출산율이 0으로 시작합니다. 유목민 유치 전쟁이 한창입니다.

이 전쟁은 미사일과 드론 대신 간편한 비자나 빠른 인터넷 같은 것들로 치러집니다. 하지만 이는 위생(hygiene factor) 같은 조건입니다. 더러우면 아무도 안 가지만, 이미 깨끗하다면 더더더더 깨끗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깨끗하다는 건 차별화 포인트가 아닙니다.

차별화는 다른 곳에는 없고 오직 이곳에만 있는 것입니다. 다섯 글자로 '로컬 커뮤니티'가 되겠습니다.


이제는 정말, 기술의 시간


저는 발을 헛디뎌 3세대 인터넷의 토끼굴에 굴러 떨어진 후 테크 부족 사람으로 10년 가까이 살고 있습니다. 기술 만능주의자로서 저는 이제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바야흐로 기술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입니다. (제발!) 우주 평화 같은 거대 담론 말고, 버블 안 진짜 사람들의 진짜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랍니다. 기왕이면 디지털 버블이 아니라 피지컬 버블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동네 문제요!


kuu village, 공(空) 마을은 일본 야마토 고원에서 열린 일주일자리 팝업 마을입니다. 로컬 협동조합 사람들과 테크 부족 사람들이 모여 우물을 파고, 삽질이 너무 힘들어 마을 예산을 포크레인 대여에 쓰기로 협의하고, 길을 만들기 위해 대나무를 베고, 동네 학교에서 출장 수업을 해줍니다. 테크 부족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자율성(soverignity)을 몸으로 구현합니다.


온라인 NPC인 AI 덕분에 0에서 1을 만들어내는(zero to one) 비용은 0에 가까워졌습니다. 문제 해결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문제를 해결할지가 문제입니다. -1에서 0에 도달하는 게 관건입니다.

어, 이거 네트워크 마을에 모여서 우리 부족 친구들이랑 고민해 보면 좋겠는데?


로컬 커뮤니티가 두터운 마을을 찾고 있습니다. 커뮤니티가 우리 동네의 문제점을 정의한 상황이면 좋고, 그 문제를 기술이 개선해 줄 여지가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내년 봄, 로컬과 외국인이 뒤섞인 일주일간의 팝업 마을을 열어보려고 합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우리는 같은 부족일지도 모릅니다.

어때요, 내년 봄에 한번 만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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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과 작가

1. <neomedievalism and transnational nobility> by Alice Maz

2. <Popups and Pipes: How the Network State Already Exists in Asia> by Chor Pharn

3. <The Network State> by Bala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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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도시 만들기 트윗

2. 클라우드 사회 구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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