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 죽일 놈의 사랑

by 안나B

밴쿠버에 오고 나서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Why did you move to Vancouver?" (왜 밴쿠버에 오셨어요?)였다. 그 질문은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도 듣지만 구직시 면접을 볼 때도 어김없이 들었던 질문이었다. 나는 질문자가 누구든 변함없이 "For love!" (사랑을 위해!)라고 대답하고는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하고 웃었다. 그 대답이 담고 있는 낭만이 좋았다. 사랑이란 단어는 서먹하던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꾸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어느 누가 사랑 앞에서 근엄한 표정을 짓겠는가.

여행을 좋아했지만 캐나다, 특히 밴쿠버는 내 머릿속을 스쳐간 적도 없던 곳이었다. 오직 그만이 내가 밴쿠버로 온 유일한 이유였다. 만약 그가 다른 나라에 있었으면 나는 주저 없이 그곳을 선택했을 걸 알고 있다.

그는 나에게 사랑, 그 자체이자

나의 목적지였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이별에 마음 아파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문득 십오 년 전에 알고 지냈던 대학 선배가 생각났다. 친한 선배였는데도 불구하고 한동안 학교에서 볼 수가 없었다. 우연히 마주친 그는 얼굴이 많이 핼쑥해져 있었다. 나는 그가 열렬히 사랑하던 그녀와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은 상태였다.
“선배, 괜찮아요?”
“나 일주일 동안 소파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어. 그런데 어머니께서 나에게, ‘그래도 너는 사랑을 했잖아.’라고 말씀하시더라. 그 말을 들으니 일어날 기운이 생겼어”

사랑, 이 죽일 놈의 사랑.


상처를 주고받은 일만 기억에 남으면 이별이 쉬웠을 텐데 왜 헤어지려고 하니 마치 한 번의 말다툼이나 섭섭했던 감정이 없었던 것처럼, 사랑하고 좋았던 기억만 생각나는 건지. 그에게 상처 받고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지금도 안 좋았던 일들은 사실이 아닌 것처럼 사랑에 의해 왜곡되어있다. 아마도 그 뒤틀린 기억이 그를 붙잡을 수밖에 없도록 나를 조종했던 게 아닐까.


맑던 하늘만큼이나 아름답던 결혼식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본 딴 하트 모양의 풍선이 달린 자전거를 세워두고 모두의 앞에서 사랑의 선약을 하였다.


You can erase someone from your mind. Getting them out of your heart is another story.
(당신의 생각으로부터 누군가를 지울 수는 있지만 당신의 가슴으로부터 없애는 것은 다른 이야기예요.)
- 영화 이터널 선샤인 중-


만약 기억을 지워도 그와 사랑했던 그때의 감정을 못 잊고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그건 영화 속에서 드라마적 요소를 가미하기 위해 짜낸 스토리일 뿐, 나는 절대 그를 다시 사랑하지 않으련다. 같이 있음에 감사하고 표현해주는 사람과 영화보다 더 절절한 사랑을 하고 싶다.



지금 내가 아는 건 딱 세 가지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던 사랑을 했었다는 것,

많이 힘들고 아팠지만 이 경험을 통해 내가 성장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언젠가 이보다 더 사랑할 사람을 만나 원 없이 사랑하리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