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그녀를 마주쳤다

by 안나B


모든 일이 일어나고 난 후 내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수십 번도 넘게 꿈에서 만나온 그녀를 실제로 마주쳤다.


그렇게 자주 꿈에서 마주치고도 현실에서 그녀를 보게 되는 날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하던 차였다. 갑자기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져 확인하니 친구가 내가 있는 곳에 그녀가 왔음을 문자로 경고하고 있었다. 피해서 도망가면 내가 패자라는 인식을 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나는 그 문자를 읽고서도 그녀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두리번거렸을 뿐 그 자리에서 그대로 서 있었다.


꿈속에서는 언제나 그의 곁에서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 날은 나의 지인이자 그녀의 지인 뒤로 혼자서 문을 열고 그 공간으로 들어섰다. 누구보다 당당하게 그녀에게 인사하고자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막상 그녀를 마주치자마자 나의 온몸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발톱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없던 신경도 극한 상황에 처하니 나의 감정을 따라 급속도로 자라나 내 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그녀의 출현에 반응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며 뒤를 돌아보던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꿈에서처럼 웃지 않았고 당황한 얼굴빛을 거름 없이 그대로 드러냈다. 나와는 달랐던 그녀의 색깔. 내가 붉었다면 그녀는 하얬을, 각기 다른 감정과 그 감정이 담겼을 얼굴빛. 그녀와 내가 눈이 마주치던 순간, 우리의 거리는 일 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서로를 못 본 척 지나칠 수 없는 가까운 거리. 만약 우리의 거리가 멀었다면 나는 그녀를 못 본 척했을까? 아마도 나는 여전히 그녀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그 날 이전에 마지막으로 본 그녀는 나를 보고 어색해했지만 나는 그곳에 숨은 진심을 모르고 그녀를 안아주며 잘 지냈냐고, 정말 사심 없이 반겼으니까. 당시의 그녀는 내가 좋아하던 여인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바뀐 지금, 나의 본심은 꿈에서도 찾을 만큼 그녀를 다시 보고 싶었었나 보다. 그녀는 나를 본 순간 눈을 깔고 피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붙잡았다. 왜 붙잡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저 나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그녀가 알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담겨있었으리라 짐작해본다. 나에게는 그녀에게 딱 한 마디를 건넬 용기와 기력만 남아 있었다.

“사과해”.

그녀는 그저 나와의 대화에서 빨리 빠져나오고 싶다는 눈빛으로,

“나중에 이야기하자.”

라고 내뱉고는 몇 명 되지 않던 무리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오랜만에 본 그녀였지만 내가 맞닥뜨린 그녀의 두 눈은 나에게 너무도 익숙했다. 바로 그가 나에게 늘 보이던 눈빛이었으니. 이 순간에서 그저 벗어나고 싶을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표정.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 그걸 모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얼굴.


내가 그의 그녀를 마주친 곳은 나의 슬픔과 분노를 토해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곳은 지난가을, 희망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저버리고만 한 사람을 기리는 자리였다. 우리는 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친구가 얼마나 소중했고 아름다웠던 사람이었는지를 서로에게, 그리고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친구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모였다. 그곳에 그의 그녀에게 분노할 수 있는 나는 없었다.



감정의 밑바닥까지 던져지고 나면 그 바닥에서 나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암울함에 갇혀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보다 더 쉬운 선택이 되고 만다. 그 고통 외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고 변화를 추진하는 뇌가 정지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절망하고 울부짖었던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고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수많은 날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 선택을 하기까지 너무도 힘들었을 친구의 아픔이 나에게 생생히 전달되었다. 그 아픔은 이제는 스크린에서만 볼 수 있는 친구의 미소를 거쳐 오히려 배로 늘어났고, 나의 마음을 쑤시고 난자하여 처절한 괴로움 속에 날 처박았다. 모든 의식이 끝날 때까지 친구가, 그리고 내가 안쓰러워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친구는 사진 속에서 우리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저 문을 열고 들어와 ‘서프라이즈!’라고 외칠 것만 같이.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항상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어딘가에는 저 나무의 등처럼 작게나마나 빛이 있으니, 동트기 전도 마냥 암흑만은 아닌게다.


가슴에 멍울이 져서 숨을 쉬는 게 쉽지 않았다. 무엇이든 상관없었지만 의지할 것이 필요했다. 거대한 무게가 나를 누르고 있어서 그저 가벼운 들숨과 날숨이 아닌 심호흡을 통해 의도적으로 산소를 나에게 공급하고 정신을 유지해야 했다. 반쪽 심호흡이라도 좋았다. 그러자 모든 게 끝난 것처럼 여겨지던 나의 세상에 산소 방울이 둥둥 혈관을 타고 움직이며 아직 괜찮다고, 나는 잘 버틸 수 있다고 온 몸에 외치는 것만 같았다. 나를 누르던 그것은 슬픔이었을까 아니면 분노였을까. 뭐든 상관없었다. 그저 이 무게에서 벗어나 편하게 숨을 쉬고 싶었다.



떠나기 직전, 모든 힘을 끌어모아 그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나의 지인들이었다. 한 명씩 안아주며 인사를 하던 중 그녀에게도 똑같이 인사를 했다. 미소와 함께 안아주며 “좋은 시간 보내”라고 말했다. 혹자는 나에게 ‘속도 좋다, 바보냐.’라고 말하리라. 아,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보다, 그녀보다 나은 사람이 아니라 이전의 나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절망과 각자의 아픔이 있다. 본인이 아닌 이상, 그 크기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받아들이는 자세와 치유하는 방법 역시 모두가 다르다. 나는 나의 방식으로 깊은 암흑 속에서 살아남고자 발버둥 쳐왔다.


그 날, 나는 나의 고통의 본질에 미소를 보이고 포옹을 하는 것으로 그 암흑으로부터 한걸음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