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상 : "너, 내 동료가 되라!" 를 남발한다
에디터로 입사했으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업무능력은 작문 실력이었다. A사는 사전과제를 통해 확인한 내 글 몇 편과 열정을 보고 나를 뽑았으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회사가 주력으로 판매하고 있는 상품인 향수에 대한 나의 이해 정도. 당시 내 코는 향기가 난다/나지 않는다 정도만 겨우 파악하는 수준이었다. '나에게 어울리는 향수 고르는 방법' 이나 '꽃향기를 베이스로 둔 향수들' 같은 무난한 글만 작성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입사한지 일이주쯤 지난 어느날, 열일하던 나를 스윽 빼내 카페로 데려간 김루피 대표.
"여름 씨가 쓰는 글들은 뭐랄까, 소울이 부족해요."
"네?"
"우리 앱은 향수를 팔아야 수익이 나잖아요. 그러면 좀 더 향수에 대한 매력이 느껴지도록 글을 써야 하는데 여름 씨 글에는 그런 게 없는 것 같아."
"아... 아직 제가 향수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데, 계속해서 정보도 찾아보고 조언도 얻고 있습니다. 더 노력할게요."
"노력은 좋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걸 물어보고 싶어요. 여름 씨는 명품 향수를 살 생각이 있어요?"
"음... 그게, 가격이 많이 나가고, 제가 아직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서..."
"그렇게 말은 하지만 만약에 싸구려 향수가 있고 명품 향수가 있으면 뭘 더 갖고 싶겠어요? 가격과 상관없이."
"그야 명품 향수겠죠."
"그렇죠. 그리고 유저들은 우리 앱을 통해서 다른 곳보다 저렴한 가격에 명품 향수를 살 수 있어요. 나는 10대 때부터 향수를 좋아해서 니치 향수를 모아 왔는데, 그때도 용돈 모아서 향수 정도는 살 수 있었거든요. 몇십만 원 정도면 사실 누구든 쓸 수 있잖아요."
"(그...그런가?)"
"몇십만 원짜리, 그것도 못 사면 진짜 거지고. 그 사람들은 우리 고객이 아니니까 상관없지만."
김루피 대표는 외국에 있는 좋은 대학을 졸업한 수재였고, 부모님은 부자였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사이였다. 비교하기도 초라하지만 당시 내 유일한 수입원은 과외였고, 그나마도 한 달 후 수능이 끝나면 통장 잔고는 먼지만 날릴 예정이었다. 그래서 더욱 '그것도 못 사면 거지'라는 말이 충격이었다. 내가 거지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진짜 거지'가 되다니 당황스러운데...?
A사의 다른 구성원들 또한 부모님이 대기업 임원이라던가 사업가라던가, 속칭 금수저들이 대부분이었다. 회사 급여는 최저시급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는데 점심 저녁마다 맛집을 찾아다닐 수 있는 부러운 사람들. 나는 한 달에 월세가 43만 원에, 교통비가 10만 원에, 벌써 월급의 절반이 나가는데... 그나마도 첫 달은 월급도 없고.
직원 수가 적은 스타트업일수록 개개인이 회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특히 대표의 성향은 회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구성원들이 어딘가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대표가 그런 사람만 골라 뽑았기 때문이다. A사의 경우 대표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중산층 가정의 똑똑한 사람들'을 회사에 모아 둔 것이었다. 어쩌면 회사의 아이템인 '향수' 자체의 특성 때문일 수도 있겠는데, 백화점에서 몇십만 원짜리 향수를 척척 사는 사람들이라면 경제력 등이 나와 크게 차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이 사람들 사이에서 잘 지내볼 수 있을까? 대화 주제부터 노는 방법까지 완전 다른데. 프라이빗 파티에서 연예인 만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과 집에서 폰게임 하며 뒹굴거리는 내가 어떻게 하루의 절반을 함께할 수 있지. 나 같은 '거지'가 고오급 향수를 소재로 글을 쓴다는 게 아이러니하기도 했고.
금수저 김루피 대표에게는 사업이 '실패해도 괜찮은' 도전이었을 것이다. 이미 자기 명의로 된 재산이 꽤 있어서 회사가 어떻게 되던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본인이 직접 말한 적 있다). 살면서 자기 인생에 실패란 없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사람인만큼 회사를 운영하고 직원을 뽑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실패 없는 직관을 강하게 믿었다. 대표의 "사업을 하려면 인재가 필요하지!" 라는 생각 덕에 아직 출시도 하지 않은 스마트폰 앱에는 12명이나 되는 열정적이고 똑똑한 사람들이 하루 12시간씩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직원이 모자라는 회사보다 나쁜 회사는? 직원이 너무 많은 회사다. 직원이 모자라는 회사에서는 일이 넘쳐나는데 일손이 없어 직원들이 죽어난다. 이것도 엄청난 문제지만, 필요 이상으로 직원이 많은 회사는 결국 회사가 죽어난다. 최저임금을 겨우 쥐여주는 초기 스타트업에서 많은 직원은 곧 지나친 경비 발생으로 이어진다. 당장 돈을 쓸 곳이 산더미인데 인건비로 한 달에만 몇천만원씩 나가는 건 엄청난 리스크다.
최저임금이라도 받으면 다행이지. A사에서 '첫 달 급여 없음'을 조건으로 일했던 나는 요즘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아예 창립멤버여서 내 미래를 이 회사에 올인하겠다! 하는 거면 몰라도 이미 직원이 12명인 회사, 심지어 외주 인력으로 대체 가능한 나의 포지션은 지나가는 엑스트라 1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내 열정을 쏟을 회사를 잘못 골랐던 거다.
요즘에야 희망퇴직이네 뭐네 직원 보기를 발부리에 채이는 돌같이 하는 회사들이 많아졌지만 애초에 그게 정상은 아니다. 회사는 급여를 지급함으로써 한 사람, 더 나아가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진다. 어엿한 한 회사의 정상적인 대표라면 자신이 책임져야 할 밥그릇들의 무게를 확실히 인지해야 한다. 시간과 열정을 쏟아 최선을 다해 일하는 직원들에게 최저 수준의 급여도 주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적어도 섣불리 사람을 뽑아 필요 없는 인건비를 지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내가 김루피 대표의 이름을 굳이 루피로 붙여준 것은 그가 앓고 있는 '루피병' 때문이다.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그럴싸한 능력자를 발견할 때마다 루피의 명대사 "너, 내 동료가 되라!"를 던지는 것이다. '그럴싸한 능력자'가 회사의 어떤 직무에 필요한지, 그가 회사 내에서 어떤 업무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까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A사에는 좋은 학교를 졸업한 똑똑한 친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똑똑하게 자신의 업무를 수행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당장 나만 봐도 직종에 대한 이해도보다 글쓰기 능력을 우선시해 뽑은 거라 '소울'없는 글을 썼으니까. 우리끼리 얘기지만 사실 내 경우는 약과였다. 당장 A사의 마케터는 포토샵도 다룰 줄 몰랐다. 페이스북 마케팅을 하는데 기본적인 이미지 수정도 할 수 없어 다른 직원들이 꽤나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모든 직무에 각자 전문가가 있으면 최고겠지만 자금이 넉넉지 않은 스타트업에서는 꿈같은 얘기다. 개인의 열정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람을 열정만으로 뽑다가는 월급날마다 한숨을 내쉬는 김루피 대표처럼 될 수도 있다. 당신이 있는, 혹은 당신이 가려 하는 스타트업에서 당신은 무슨 일을 맡게 될 것인가? 당신은 당신이 맡은 일들을 모두 해낼 능력이 있는가? 대표는 당신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가? 만약 당신이 업무를 수행할 능력이 많이 부족한데도 '열정 때문에' 뽑힌 사람이라면 선택지는 두 가지다. 열정적으로 업무역량을 쌓아가거나, 열정적으로 다른 회사를 찾아보거나.
+ 본 글은 루피의 리더십을 폄하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 아님을 밝히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