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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r 12. 2018

괜찮지만, 괜찮지 않은 스타트업

나의 실패한 첫 인턴 경험

  내가 스타트업 A사의 쩌쩌리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건 2014년 겨울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카피라이터 지망생이었다. '그래도 글은 좀 쓴다'는 근거 없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으니 다른 자리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간절히 바라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그 꿈이다. 카피라이터는 인턴조차 드물게 뽑는 직군이었고 그 몇 안 되는 자리에 지원서를 넣어 봤자 광탈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A 스타트업에 지원하게 되었는데, 이유는 그 당시 제출했던 이력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손발사라짐 #오글거림주의 #흑역사공개
   (...) 올해 초부터는 아예 일 년을 휴학하고 이판사판 자아를 찾겠다며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방황도 하며 지냈습니다. 얼마 전엔 오랜만에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친구를 만났는데, 이젠 학교에서 10학번이 최고참 축에 낀다고 합니다. “공시 준비는 건 좀 어때…?” 라는 제 질문에 친구는 “아니… 뭐… 할 만해. 요즘은 취업 준비가 훨씬 어렵다던데. 그러고 보니 너 인턴 한다 그러지 않았어?”라며 넌지시 받아쳤습니다. 그 말은 황소개구리급 잉여력을 자랑하던 저를 때려죽일 짱돌이 되어 다가왔습니다. 인턴 한다고 나대다 다 떨어졌지... 그래.

  친구와의 잘못된 만남 이후 슬슬 그동안 쌓아둔 잉여력을 에너지로 승화시킬 시간이다 싶어 하반기 인턴 자리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청년 실업률이 심각햔 수준이라지만 아무 곳에서나 제 크고 아름다운 잉여력을 떨치고 싶진 않았습니다. 제가 흥미를 가지고 할 수 있는 마케팅/광고 분야의 일이거나 잡다하고 고된 일이더라도 자부심을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 제품/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를 위해서만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2014년 10월 메일함에서 찾아낸 이력서. 의식의 흐름대로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A사는 감사하게도 저 패기를 받아주었다. 이력서를 넣은 지 이삼일 만에 A사 근처 카페에서 대표와 마케팅부 팀장을 만났고, 일주일 후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언제부터 출근 가능하시냐기에 내일 당장 갈 수 있다고 설레발을 칠 정도로 기뻤다. 드디어 나도 일한다! 월급 받는다! 신난다! 내 인생 첫 직장! 마케터 라이프! 스타트업치고 꽤 규모가 있는 곳이라 기대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첫 출근 전까지는.




  그 스타트업은 '괜찮은 곳'이었다. 2030 사이에서는 이름을 대면 알 정도로 인지도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고, 마침 내가 계약서를 쓸 때는 대규모 투자를 유치한 직후였다. '투자를 받았으니 마케팅에 돈을 쓰겠지? 경력 제대로 쌓고 나가야겠다. 이력서 쓰고 바로 다다음 날 면접까지 봤고, 일주일 만에 뽑혔으니까 회사 사람들도 내가 맘에 들었단 얘기겠지? 열심히 해봐야겠다 히히힛...'


  ...같은 들뜸은 딱 일주일 갔다. 회사 건물 깨끗하고 동료들만 좋으면 만사 오케이였던 쿨타임이 지나고, 서서히 알게 된 A사의 현실은 스타트업에 대한 내 꿈과 희망을 박살 냈다.


  1. 야근은 필수, 야간 귀가는 선택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면접 때 '우리 회사는 야근이 필수다. 버틸 수 있겠냐'는 말을 듣고 0.5초만에 패기 쩔게 "넵, 저 튼튼해요!!" 했던 게 화근이었다. 면접 당시 팀장의 말인즉슨 '야근이 필수일 만큼 일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일이 없어도 일단 야근을 하면 일이 생긴다' 였던 것. 아침 열 시 출근 저녁 일곱 시 퇴근이라는 하는 내 근무시간은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었다. 저녁 아홉 시쯤 가방을 챙기기만 해도 "왜 이 시간에 퇴근하시려구요?"라는 질문을 들어야 했다. 그런 식으로 나올 거면 야근수당이라도 주던가! 밤 열한 시까지 꾸역꾸역 야근하면 주는 건 택시비가 고작이었다. 택시 안 타도 되니까 걸어서라도 집에 가고 싶었다.


  2. 자기의 일은 스스로, 자기의 일이 아니라도 알아서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으니 기획이나 광고 카피라이팅은 스스로 해내야 한다지만, 제법 큰 규모의 이벤트에 쓰일 배너 디자인까지 내가 맡을 줄은 몰랐다. 회사 직원이 스무 명 남짓이었는데 그중 디자이너는 단 한 명. 그 디자이너는 일이 너무 많아서 서비스 UI 외에는 돌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디자인뿐이 아니었다. CS 전화도 전화기 옆자리 인턴이었던 내 담당. 기대했던 마케팅 업무는 몇 넘겨주지도 않으니 내가 대체 뭐 하는 인턴으로 들어온 건지 혼란스러웠다. "하고 싶은 걸 말하면 컨펌해 줄 테니 진행하시면 됩니다." 라지만 '할 일'이 산더미인데 어떻게 '하고 싶은 걸' 떠올리고 진행할 수 있겠냐고요.


  3. 수평적인 문화, 그 속의 권위주의

  후배가 선배에게서 체계적으로 배울 것이 없는 곳이었기에 수평적인 문화가 만들어진 것은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수평 문화래 봐야 직급 대신 사람들의 이름에 ‘님’을 붙여 부르는 것이 전부였다.

  회사에서 외주로 맡긴 일이 끝나 업체에서 몇 분이 방문해 관련 PT를 진행했던 적이 있다. 전 직원이 참여할 정도로 중요한 안건이었는데 특정 부분에서 반복적인 오류가 있었다. 아무도 그걸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아 내가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을 던졌다. 업체 측에서는 의견을 수용했는데 정작 나는 PT가 끝나고 호되게 혼났다. 팀장에게 한 번, 대표에게 또 한 번.

 "그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해서 자료를 만들었겠어요, 그런데 거기에 대고 그렇게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어떡합니까. 그 회사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온 거잖아요. 차라리 저(팀장과 대표)에게 PT 끝나고 따로 이야기하지 그랬어요."

  라는데... 수평적인 문화니까 자유로운 비판이 오갈 수 있겠지 했던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중요한 문제는 '윗선'에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차마 알지 못했다.     


  아... 못해먹겠다.

하지만 A사를 그만두기로 한 데에는 다른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맛있는 커피로 유명한 카페가 있다고 하자. 좋은 원두를 쓴다고 소문이 자자한 데다 세계대회에서 상 받은 바리스타가 운영하는 카페. 주말 데이트는 그곳에서 해도 괜찮겠다. 커피를 좋아한다면! 커피에서 쓴맛밖에 느끼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이라면 케이크나 스무디로 유명한 카페를 다시 알아보는 게 나을 거다.


  내가 다닐 회사를 고를 때도 마찬가지다. 대기업이야 부서가 체계적으로 나뉘어 있고 운이 좋다면 그 안에서 나와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다. 돈 많이 주고 복지도 괜찮다면 일이 좀 재미없더라도 참고 다닐 수도 있을 거고. 스타트업에선 그런 거 없다. 마케터가 디자인을 할 때도 있고 디자이너가 카피라이팅을 하기도 한다. 일손이 부족하니까. 니 일 내 일을 따지는 게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건 큰 단점일 수도 있지만 다양한 일을 한 직장에서 경험할 수 있는 건 스타트업이기에 가지는 장점이기도 하다.


  스타트업에서 커리어를 쌓으려는 취준생들이라면 이런 장단점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을 거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로켓펀치를 살펴보는 그들의 스타트업 지원 동기 중 하나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어서' 일 테니까. 그러니 이력서를 넣어볼까 고민할 때 가장 먼저 살피는 건 회사의 사업 아이템이지 싶다.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에 들어가야 일할 맛도 나니까.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열심히 알아봐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


그 회사는 뭐로 돈을 벌지?   

  내 첫 직장이던 A 스타트업은 분명 매력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래서 별 망설임 없이 자소서를 넣었던 거다. 내 생각이 짧았다. 망설였어야 했다. 회사를 다니고 1주, 2주가 지나다 보니 그제야 회사의 수익 구조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유저들이 인지하고 있는 그 서비스의 대표 기능만으로는 서버비도 충당할 수 없었다. 한편 실제 수익이 나는 기능은 내가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무료 가계부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수익은 생활비 대출을 중개하고 수수료를 받는 식이랄까. 거기에 마케터로서 그 수익 창출 기능을 홍보하는 일까지 함께해야 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스타트업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일만 하기는 어렵다. 전문성이 부족한 신입이라면 더더욱. 자부심을 가질 서비스를 마케팅하러 왔는데 자괴감만 느끼는 나날이었다.


  성공한 스타트업에는 일과 생활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밤낮없이 일해온 팀원들이 있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함께하는 일원이 되고자 박봉이며 늦은 퇴근이며 버텨내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렇게 버틸 힘을 갖고 싶다면 내가 선택하는 회사가 무슨 서비스를 제공하는지는 물론 무엇으로 돈을 버는지도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좋든 싫든 나는 그 일을 도와야 할 것이고, 그 일이 정말정말 싫다면 당신은 결국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처럼.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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