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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r 19. 2018

백수로 살기 vs. 월급 100만 원 받고 일하기

다시 시작하게 된 스타트업 신입 생활

  이거 완전 최저시급도 안 되는 거 아냐...?


  출근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위액을 토한 날,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다간 정말 큰일 나겠구나 싶어 퇴사를 결심했다. 내 스타트업 인턴 생활은 채 100만 원도 되지 않는 급여와 함께 정리되었다. 헛웃음이 났다. 야근수당 따위 당연히 포함되지 않은 최저임금. 회사에 매일 도시락을 싸 오던 직원들 생각도 났다. 인턴이나 사원이나 월급 수준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던데, 혹시...


  이력서에도 넣지 못할 실패한 인턴 경험을 뒤로하고 학교로 돌아간 내 앞에는 여느 대학생처럼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대학원 진학과 취업. 공부에는 당장 뜻이 없었으니 졸업과 취업을 동시에 하는 것을 목표로 영어회화 스터디와 취업 스터디에 참여했다. 짬짬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고등학생 과외도 했는데, 그리 많은 시간을 쏟지 않고도 인턴 때보다 더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업계에서 나름의 인지도 있다는 스타트업이 고작 그 정도 근무환경인데 다른 회사는 더 심각할 수준일 게 뻔해 보였다.


  스타트업에서 많은 경험을 쌓아 내 몸값을 올리면 좋겠다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언제까지고 카페 한 번 갈 때마다 마시고 싶은 모카 대신 천오백 원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고르며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로켓펀치(스타트업 전문 구인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는 올려 두었지만 자소서는 대기업 공채 위주로 써냈다. 첫 학기에는 네 군데 자소서를 제출했고, 두 군데 필기시험을 봤고, 한 군데 최종 면접을 봤다. 면접은 미끄러졌지만 첫 번째 정식 취업 도전에 그만하면 선방한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하반기 자소서 시즌. 나는 정확히 스무 군데 자소서를 냈고 스무 군데 다 떨어졌다. 그것도 서류심사에서.


  내가 그리 오래 살아본 건 아니지만 그 시절은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한 암흑기였다. 나름대로 자소서에는 자신 있었는데 현실은 시궁창. 심지어 상반기에 면접을 본 회사에서조차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는 메일을 보내주었다. 학점이 별로라서? 전공이랑 지원분야가 안드로메다만큼 떨어져 있어서? 지원분야의 경험이 없어서? 지금 생각해 보면 셋 모두 치명적인 탈락 이유였지만 그땐 그런 걸 냉정하게 따져 볼 여유도 없었다. 낮이면 정처 없이 거리를 돌아다녔고 밤이면 눈물 젖은 라면을 먹었다. 통장에 돈은 떨어져 가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만 하면 그렇게 서러웠다.


  엉엉엉엉.

  웅웅웅웅.     

  

울음소리에 섞인 진동 소리는 새 메일 알림이었다.

'@@@님의 로켓펀치 친구 신청’




  로켓펀치에서는 각종 스타트업 구인구직 정보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자기소개 및 구직 여부를 올려둘 수도 있는데 나와 '친구'로 등록된 사용자는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아이디를 만들어 두면 종종 친구신청 요청이 오고, 수락한 후 잠시 기다려 보면 구직 의사를 물어보는 메일도 심심찮게 받을 수 있다. 우리 회사와 잘 맞을 사람을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것이 스타트업 인사 담당자의 미덕이라면, 열린 마음으로 여유를 가지고 회사의 비전을 살피는 것이 스타트업 구직자의 미덕이라 생각한다. 종종 대표분들도 직접 메일을 보내시던데 물론 감사한 일이지만 지나치게 성은이 망극하다는 저자세로 답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당시 일개 취준생이었던 내가 그런 여유를 갖췄을 리 없다. 한창 백수로 우울하게 지낼 시절, 로켓펀치에서 한 향수 관련 스타트업 대표의 친구신청에 응했는데 15분 만에 이력서를 요청하는 메일을 받았다. 내가 필요한 회사가 있다니! 나 같은 잉여를 직장인으로 만들어 줄 회사가 있구나! 심지어 에디터를 뽑는다니 완전 나한테 딱 맞는 일이네! 우와! 당장 이력서를 보내고 이틀 후로 면접 날짜까지 잡았다. 회사가 집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백수는 시간이 많으니까.


  그리고 바야흐로 면접 날.


"안녕하세요, A사 대표 김루피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공동대표 김조로입니다."

"안녕하세요, 여름입니다."


  간단한 인사말이 오간 후 바로 본격적인 면접이 시작되었다. 구글링을 해 봐도 나오지 않는 완전 신생 스타트업이었기에 궁금한 것이 잔뜩 있었다. 회사 직원은 몇 명이나 되나요? 어떤 포지션의 직원들이 있나요?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뭔가요? 제가 무슨 일을 하면 되나요? 월급은 혹시 어느 정도인지? 등등. 회사 직원은 12명 정도 되고, MD들과 마케터들과 개발자가 있고, 로켓펀치에 올린 포트폴리오를 보고 우리 회사에 필요한 사람인 것 같아 연락했으며, 주로 맡게 될 일은 A사가 사업을 진행 중인 분야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었다. 월급은 전 회사보다도 작은 수준이었지만 대신 지분을 나눠준단다.


  "사실 여름 님의 글이 마음에 들긴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 회사는 향수를 다루는 브랜드이기 때문에 앞으로 써 주셔야 할 글도 향수에 관한 것들이에요. 그런데 관련 경험이 하나도 없으셔서... 혹시 향수 좋아하세요?"


   "음, 자주 쓰진 않는데 좋은 향은 좋아합니다!"


  "관련 경력이 없는 부분이 사실 가장 걱정되어서요. 저희가 과제를 드릴 텐데, 여름 님이 과제로 써서 보내주시는 글을 보고 판단해도 괜찮을까요? 저희는 정말 분야마다 최고의 인재만 뽑으려 노력하고 있거든요."


  "지금 회사에 지원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지금도 다섯 분 정도가 과제를 벌써 받으셨어요. 중요한 얘기는 우선 오늘 모두 진행한 것 같고, 나머지는 추후 이야기 나누면 될 것 같습니다."


  "아 네,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면접을 위해 왔다 갔다 세 시간을 쓰는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이게 내 미래를 위한 새로운 발걸음이라고 생각하니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아니 그런데 나 말고도 다섯 명이나 지원자가 더 있다니 그건 부담스럽네. 내가 향수를 잘 모른다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지만 얼마 전에 투자도 받았다니까 왠지 잘 될 회사인 것 같고. 나야 글 쓰는 걸 좋아하니까 어쨌든 앞으로 잘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같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과 함께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향수에 대해 검색을 시작했다. 최선을 다해봐야지. 나한테 먼저 연락도 해 준 고마운 회사니까!




  사전과제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앱 내 매거진에 실을 수 있을 만한 수준으로 향수 관련 기사를 세 편 써서 보내는 것. 기한은 일주일이었다. 할 일이 많지 않은 백수라 과제를 받은 그 날 바로 동네에서 제일 큰 카페에 갔다. 20여 년을 살면서 향수 관련 글은 한 번도 관심을 가지고 읽어본 적이 없기에 조금 난감했지만 지금부터 알아보면 괜찮지 않을까. 카페에 비치된 잡지들을 훑어보고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을 찾다 보니 믿거나 말거나 에디터들이 지키고 있는 글쓰기 공식을 몇 개 발견할 수 있었다.


1. 문장을 미완결로 마무리할 것.
예) 고독함이 느껴지는 그의 뒷모습에 남는 잔향. 그것이 이 향수의 이미지.

2. 문장 중간중간을 외국어로 채울 것.
예) 럭셔리한 향이 글래머러스한 보디를 감싼다.

3. 어미를 '것'으로 끝낼 것.
예) 다가오는 봄 그녀의 마음을 겟하기 위한 매력적인 퍼퓸은 바로 이것, 그녀의 눈에서 하트를 읽을 수 있을 것.


  그때나 지금이나 성격이 급한 나는 저 공식을 적극 활용해 만 하루 만에 글 두 편을 완성했다. '이번 시즌 유행할 향수 best 3', '향기 속 처음, 시작 끝 - 향수의 노트를 알아보자'. 두 편 모두 향수 마니아들이 보기엔 시시한 수준일 테고 내가 봐도 썩 잘 쓴 글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은 이것보다 더 잘 쓸 도리가 없었다. 대표에게 내가 쓴 글 두 편을 보내고 피드백을 요청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여름입니다.
과제글 세 편 중 두 편을 우선 작성해 메일로 파일 첨부해 보냅니다.

지난번 말씀하신 대로 제가 가진 향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에
제가 쓴 글의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객관적 판단이 어렵습니다.

읽어보시고 조언 주시면 적극 반영해 현재 작성한 글들을 수정하고
새 글 한 편도 첨부해 다시 메일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름 올림.


  얼마 지나지 않아 대표로부터 피드백을 받았다. 세 번째 글을 보내기 전에 회사 직원들과 한번 만나보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함께였다. 내가 엄청나게 빨리 과제를 제출했고, 그 속도가 스타트업 정신에 어울리는 열정으로 보인 건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였다. 빠를수록 좋다니 바로 다음 날 회사 직원들을 만나러 한 시간 반 걸리는 사무실을 향했다. 이번엔 대표 둘은 빠지고 직원들 몇 명과 카페에서 면접을 진행했다.


  처음 면접을 보러 사무실에 갔을 때도 잠깐 느꼈지만, 그 회사 사람들은 나와 백만 광년 떨어진 세상 어디쯤에서 사는 것 같았다. 당연하겠지만 다들 몸에서 고급진 향기가 났고, 향기만큼이나 럭셔리한 삶을 사는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괜히 그들의 당당하고 부유한 분위기에 기가 죽는 기분이었지만 면접 내용 자체는 별것 없었다. 우리는 주6일 출근하는데 괜찮냐(대신 그중 하루는 오후 출근이다), 야근이 필수인데 힘낼 수 있겠냐(그래도 밤 10시 전에는 집에 간다) 정도.


  ‘별것 없는 게 아니네!’ 싶은 게 당연하지만 당시 취업이 급한 백수였던 데다 이전에 잠깐 인턴으로 일했던 곳에서는 밤 10시 30분 이후 퇴근이 당연했기에 저 조건들도 버틸 만해 보였다. 회사가 성공하면 그에 맞는 보상을 해 준다니까 '창고에서 시작했던 스타트업‘들을 생각하면 그 정도 업무 강도는 괜찮아 보였고, 무엇보다 매일 글 쓰는 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에디터로 경력을 쌓는 거니까 이 정도 근무조건쯤은 내가 감수해야지 뭐.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직원들은 사무실로 가서 대표들을 데려오겠다며 나를 두고 자리를 옮겼다. 몇 분 후 직원들과 바통 터치한 대표들이 카페로 왔다.


  "먼 길 오셔서 면접 두 번이나 보시느라 수고하셨어요. 사실 여름 님이 향수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일을 잘해나갈 수 있을까 걱정된다면서 결정 내리기 전에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희 직원들 이야기 들어 보니까 같이 일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아직 과외를 하고 있는 고3 학생이 있어서요. 앞으로 한 달이면 수능이라 과외가 마무리되는데 그때까지만 한주에 두 번 조금 일찍 퇴근할 수 있을까요?"


  "저번 면접 때 말씀하셨던 부분이라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첫 달에는 급여를 보장해서 드릴 수가 없는 데다, 계속해오셨던 일이니 마무리 잘 짓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네! 사실 형편이 넉넉지 않다 보니 당장 어떻게 생활해야 하나 고민이었거든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얘기까지 하면 내가 영락없는 호구였다는 게 밝혀지겠지만... 그렇다. A사는 첫 달 월급 없음을 첫 면접 때부터 얘기했었다. 첫 달은 일을 회사에서 가르쳐줘야 하는 입장인 데다 당장 실무에 투입할 수 없는 인력이니만큼 페이를 줄 수 없다, 대신 한 달 후 작성할 근무 계약서에서 업무성과를 반영해 지분과 스톡옵션을 고려하겠다... 라고. 그 계약서에 적힐 내 월급은 100만 원.


  어쨌든, 그다음 날부터 내 새로운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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