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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Jan 21. 2021

착한 예민함

무례한 사람이 쉽게 말하는 예민함

나는 천성적으로 예민한 사람이다.

청각, 후각에 모두 예민해서 소음이나 역한 냄새에 유독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예민하기에 무례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해주세요" 보다 "해주시겠어요?" 등 말투 하나하나에도 세심하려고 노력하고 또 이런 노력을 하는 세심하고 마음 따듯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나의 기분에 예민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기분 태도에도 예민하기 때문에 상대가 싫어할만한 말은 가려서 하려고 한다.(하지만 나도 실수로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말들을 은연중에 많이 했겠지) 이러한 나의 노력을 알아주고 함께 배려해주는 이들과는 좋은 관계가 유지할 수 있다.


반면에 혼자서 아무리 배려하려 해도 좋은 관계가 유지될 수 없는 자들이 있다.


부담스러운 요구를 하고 수긍하지 않을 경우 못된 사람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자.

나를 잘 알지도 못한 채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함부로 평가 해버 리거나 단정 짓고 소문을 내는 자.

가까운 사이라는 빌미로 꾸준한 가스 라이팅을 일삼거나 웃으며 위해주는 얼굴로 독사 같은 말을 툭 내뱉는 자들.


돌려 까기, 위해주는 척 상처 주는 말하며 가스 라이팅 하는 사람들은 생각해보면 한 때 나와 가까웠던 친구 혹은 친척관계에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믿었던 이들에게 받은 상처는 아물지 않고 더 아팠다.


직장에서 잠깐 스치는 인연, 길 가다 마주친 무례한 사람, 우연히 마주친 불친절한 직원, 무례한 고객 들이 준 상처는 생각보다 오래 기억에 남지 않는 반면에 가까운 이들로 상처를 받았을 땐 놀랍게도 호구의 끼가 발동되어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 , '내가 더 잘해야겠지.' , '나랑 친구(혹은 친척)인데 어떻게 그랬겠어? 나쁜 의미가 아니겠지.' 라며 애꿎은 나 자신을 바닥 속 까지 끌고 가곤 했다.


지금의 나는 적어도 맞서 싸우는 건 피하더라도 본인의 열등감 혹은 내면의 불행을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 주며 푸는 이들과는 크게 상종하지 않는 방어 기제를 행하고 있지만 20대의 나는 힘들게 인연을 끊고서도 한동안 나를 자책하곤 했다.






30대 초반인 지금 나의 마음을 방치해두었던 20대의 나에게 미안하다.


지금의 나라면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무시해버렸을 텐데. 사실 상처는 받겠지만 또 한 번 받을 수 있는 상황은 애초에 차단해버릴 텐데. 그런 인간들 신경 쓸 시간에 나를 배려해주고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나의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사랑해줬을 텐데.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었는지 실수로 상처를 주었는지는 싸한 느낌으로도 알 수 있지만 대화를 해보면 안다.

예로, 20대 초반에는 가까운 사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나를 깎아내리며 자존감을 챙기던 그녀는 본인의 언행들은 모두 장난이었으며, 받아들이는 나의 예민함이 문제라고 치부했다.


반면에, 원래 말을 신중하게 하던 지인이 당시 아팠던 나의 치부를 건드린 적이 있었다.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꺼냈고 말을 하면서도 내가 예민하다고 하려나 라며 가슴이 쿵쾅거리는 순간,

그녀의 반응은 "정말 너무 미안해!! 내가 그런 말을 했어? 내가 미쳤나 봐 나 같았어도 기분 나빴을 거야.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였다.


억지로 하는 사과와 변명 그리고 상처 받은 상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무책임함이 아닌, 상대방의 감정을 모두 헤아린 진심이 담긴 사과였다.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사람이라면 "네가 예민해서 그래.", "그냥 별 거 아닌데 왜 그래?"라는 식으로 상대방의 예민함을 무기로 본인의 실수와 잘못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한 때는 예민한 성향은 숨겨야 하고, 기분이 나빠도 쿨하게 넘기는 사람이 멋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서점을 가더라도, SNS 글귀들을 보더라도 무례한 자들에 대해 대처하는 글귀와 서적들이 많다. 그만큼 이전 우리 사회에서 무례함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했기 때문 아닐까.

대표적으로 '본인의 무례함을 상대의 예민함으로 치부하지 말라.'"라는 문구. 요즘에는 다들 끄덕끄덕하는 비슷한 문구들이 많지만 처음 이러한 뉘앙스의 문구를 접했을 땐 3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했다.


적어도 상대방에게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던지는 사람들보다 대방의 기분을 고려하고 조심스럽게 정리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마음고생해야 하는 일 없이 더 존중받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흔히 작은 수군거림도 본인 욕을 한다며 오해하고 화내는 사람, 사소한 것도 크게 반응해서 폭력적인 사람, 혼자만의 망상으로 상대방에게 폭언을 쏟는 사람을 통틀어 예민하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러한 사항 등을 예민함이 아닌 '무례함' 혹은 '인성의 문제'라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예민함 (이라기보다는 인성의 문제) 이 아닌 착한' 예민함' 은 상대방의 감정, 환경까지 고려해 더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촉매제로 작용해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린 시절, 간혹 말을 생각 없이 하는 친척들의 남녀 차별적인 언행 혹은 가스 라이팅 하는 사촌을 마주쳐 기분이 상할 때마다 내가 감정을 토로할 수 있는 상대는 '엄마'였다. 당시의 엄마는 내게 그저 "예민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무시해."라고 말하곤 했다. 항상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둥글둥글한 성격의 엄마와 달리 나는 아닌 건 아니라고, 항상 의문을 품는 아이 었다. 엄마는 내게 참 많은 사랑을 주고 키워줬고 지금도 끊임없이 사랑을 주는 소중한 분이지만, 이 말을 듣고 자란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내가 화난 감정이 들 때마다 '내가 예민한 건가?'를 골똘히 고민하느라 감정표현을 못 한 적이 많았고 그러한 부분들이 쌓여 결국 자기혐오까지 이르곤 했었다.  


이러한 섭섭함은 내가 결혼을 앞둔 직전 여러 사건이 터지면서 엄마에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원망을 토로했던 계기가 되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은 '속상했겠구나.'지, '예민하게 굴지 마라.'가 아녔다고. 그저 내 감정과 상황에 공감을 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예민'이라는 단어로 내 감정이 다 무시된 기분이었다고. 내가 진심 담아 호소했을 때, 엄마는 " 내 딸의 감정을 이해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항상 나는 네 편이었고 앞으로도 항상 네 편이야."이라는 따듯한 말로 나의 섭섭함을 정리해주었다.


훗날 나의 아이가 본인의 감정에 솔직하고 감수성에 예민하여 주위 사람들을 더 사려 깊게 살필 수도 있고 본인의 싫고 좋음을 기민하게 파악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예민한 사람들로 인해 무례한 사람들이 더 줄어들었으면, 무례한 사람들로 인해 상처 받는 건 상처 받는 사람이 예민해서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상처 받는 거라는 걸, 적어도 그 누구도 이유 없이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낼 권리는 없다는 기본적인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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