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외출 10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나무 Mar 18. 2018

시간이 머무는 곳, 트리니다드

쿠바 트리니다드 1




느리면 고요하다. 

빠르면 대체로 부산스럽기 마련이다.

적막함을 좋아하면 느린 곳을 찾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머물러있는 것은 멈춰있는 것과 다르다.

트리니다드, 그곳에는 떠나는 방법을 모르는 시간이 머물러 있다.

그게 뭔지 모른다.

그러나 맘에 든다.


어제에 머물러있는 땅, 

트리니다드는 사람 조차 느리고 고요하다.

원래부터 그 나이였던 것 같은 노인의 주름이 어색하지 않다. 

트리니다드 역시 광장이 중심이다.

마요르 광장은 어느 저택의 정원이라고 해도 믿을법하게 소박하고 자그맣다.

혈관처럼 뻗어나간 골목길엔 어디나 호박돌이 깔려있다. 



쿠바의 집들은 담이 없다.

그러나 어느 집이나 창살이 있다.

집의 안쪽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사람들이 많다.

밖에서 볼 때는 영락없이 가두어진 모습이다.

이곳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두고 사는구나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창을 둘러싼 창살이 새장의 프레임과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에스메랄다가 부르는 '새장 속에 갇힌 새'의 슬픈 멜로디가 생각나게 한다.

까사의 나무 덧창을 안쪽으로 당겨서 열었다.

굵은 쇠창살이 있지만 바깥을 내다보는데 답답하다거나 갇혀 있는 느낌은 없었다.

사람 구경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다.

한 동안 창턱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새장 속에 갇힌 새라 해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물고기 비늘처럼 덮여있는 주황색 기와지붕,

세월이 만들어낸 벗겨지고 빛바랜 담벼락,

핑크, 코랄, 블루 등 아무렇게나 쏟아놓은 파스텔처럼 줄지어 서 있는 집,

유럽의 수많은 도시에는 대부분 올드 타운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하지만 트리니다드는 어딜 가도 올드타운이다.

트리니다드에는 적어도 100년이 넘지 않은 집이 없기 때문이다.



산책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프롬나드(promenade)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그러나 정작 산책을 즐기지 못하고 산다.

여행지에서의 프롬나드, 아껴둔 초콜릿을 야금야금 꺼내 먹는 기분이다.

하루 중 가장 어둡다는 시간인 해뜨기 직전의 새벽 산책이거나

이슬비 내리는 인적 없는 길을 걷는 시간이 좋다.

그렇다. 여행은 장면이 바뀐 곳에서 살아보는 일이다.



이토록 해맑은 미소를 가진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이토록 편안해 보이는 얼굴을 본 적도 없다.

밭 이랑 같은 주름, 애기 쥐똥같은 검버섯, 석 달 열흘 물 구경 못한듯한 꼬질꼬질한 옷,

헤져서 잘랐는지, 일부러 잘랐는지, 그렇다면 누가 잘랐는지 모를 구두 한쪽,

그 사이 드러난 까만 발가락,

다리가 불편하신지 앉은 자리 뒤로 오래된 목발 한쪽이 뉘어있다.

이 모든 초라함과 더러움을 한 쾌에 상쇄시킬 수 있는 건 할아버지의 순수한 미소였다.

그 아우라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의 곁에 앉은 또 한 사람.

새하얀 셔츠에 영화제 레드 카펫을 밞아도 손색없을 만큼 광나는 구두, 그는 단정하게 다리를 모으고 신문지를 깔고 앉아있다.

하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 세월의 서글픔이 잔뜩 들어있다.

그는 무엇을 추억하는 중일까?

두 사람은 바둑판의 백돌과 흑돌처럼 대조적이다.

불 꺼진 시가를 입에 물거나, 손에 든 두 남자는 나의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프로다.

 


혼자 여행 중인 한국 여인을 우연히 만났다.

진주에 살고 있단다.

혼자 여행하니 사진 찍는 게 어렵다 하여 몇 장의 사진을 찍어드렸다.

그녀가 할아버지의 시가를 느닷없이 빼앗았다.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보통 솜씨가 아니다.

시가를 뺏긴 할아버지는 기막히다는 듯 소리 없는 너털웃음을 쏟아냈다.



거리 악사들이 연주를 준비하고 있다.

벽에 기대진 패널을 보니 'Los Pinos Cuba'(스페인어로 소나무)라는 이름의 그룹인가 보다.

나는 그들의 배경인 뼈(돌)를 들어낸 벽을 찍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악사들은 카메라를 의식한 탓인지 모두들 시선을 피하고 있다.

공연히 미안한 맘이 들었다.


50년 전에는 우리나라에도 말 수레가 다녔다.

트리니다드에는 여전히 마차가 운송 수단으로 쓰이고 있었다.

사람도 싣고, 벽돌도 싣고 다닌다.

친구들과 어울려 클럽에 다니거나, 대학 캠퍼스에서 공부를 하고, 스마트 폰으로 게임을 즐길 나이의 청년이 짚단을 실은 마차를 타고 간다. 착한 얼굴 때문에 맘이 더 짠했다.



결혼식을 했는지, 영화를 찍는지, 풍선을 주렁주렁 매단 오픈 카를 타고 카 퍼레이드를 하는 아가씨,

세상 행복한 얼굴로 사람들의 시선을 즐긴다.

'참 좋은 때지, 나도 한 때는 예뻤는데~ ' 하듯 바라보시는 할머니의 은발이 더 곱다.



한쪽 안경다리가 없다.

렌즈도 한쪽만 있다.

그나마 남아있는 한쪽에는 금이 가 있다.

헝겊 쪼가리들이 뭉쳐진 보퉁이를 들었는데 무엇이 쓰는 물건이지 모른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는 질문에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성미 풀풀 나는 크린트 이스트우드 뺨칠만한 얼굴이다.

그러나 세상 슬픈 눈이다.

뷰파인더로 들어온 그의 깊은 눈동자 때문에 눈물이 날 뻔했다.

눈물이 삼켜질 때까지 연신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전 09화 겨울이 꽃 피는 곳, 오비두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