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외출 12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나무 Mar 06. 2019

운전 25년 만에 첫 사고를 냈다, 그것도 골웨이에서.

아일랜드 골웨이




"어 어어~~"

조수석에 타고 있던 M이 우려섞인 그러나 대단하지는 않은 듯 소리를 질렀다.

그 모음 속에는 '설마'의 믿음과 '괜찮겠지'의 위안이 함께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 "어 어어"  불과 2~3초?

아니, 찰나라는 말이 적당하겠다.

뭔가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만화를 즐겨 보는 사람이라면 이럴 때 어떤 효과음을 넣어야 할지 잘 알 거다.

'콰과가가강~'

처음 들어보는 마찰음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기도 했다.

주차된 차를 들이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내가 사고를 낸 것이다.


비상등을 켰다.

들이받은 차에서 떨어지려고 후진을 하는데 앞 차 범퍼에서 우드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갓길에 주차되어 있던 그 차는 장애인 차량 표식이 붙어 있다.

안 그래도 미안한데 더 죄스럽다.

친구들은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은 듯했으나 모두들 많이 놀란 표정이다.

그런데 정작 사고를 낸 나는 덤덤하다.

겁 나지도 떨리지도 않았다.

운전 25년 만에 첫 사고를 쳤다.

하물며 골웨이라는 아일랜드의 낯 선 도시에서 말이다.


렌트한 차를 타고 시내를 막 벗어나려는 참이었다.

영국처럼 운전석이 오른쪽이니 차는 왼쪽 통행이다.

도로의 폭이 좁다.

맞은편에서 커다란 트럭이 오고 있었다.

물론 서행 중이었다.

내가 진행하는 방향에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은 알았지만 부딪힐 정도로 좁아 보이지 않았다.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으니 왼쪽의 감이 익숙지 않았던 것이다.


출발하기 전 찍은 계기판




모허 절벽으로 가는 길이었다.

차를 받아 운전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다.

그곳으로 가는 대중교통은 없다.

자동차나 1일 투어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정해진 코스를 도는 투어 버스보다 내키는 대로 가고 멈출 수 있는 렌트 쪽을 택했다.

몇 년 전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류블랴나를 거쳐 두브로브니크까지 예닐곱 개의 도시를 다녔었다.

캐나다 로키의 벤프와 재스퍼에서는 일주일을, 퀘벡에서도 렌터카를 이용했다.

그러나 이번엔 단 하루.

운전석이 반대쪽에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모든 상황에서 풀 커버가 되는 보험을 들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마침 근처 주택에 사는 부인이 밖으로 나오다가 우리를 보았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렌터카 사무실에 전화를 부탁했다.

통화를 마치자 차는 그곳에 그대로 두고 렌터카 사무실로 가보라고 알려 주었다.

그녀의 친절이 고마웠다.

자동차 트렁크에서 주섬주섬 배낭을 챙겨서 맥 빠진 사람들 모양새로 사무실로 향했다.


렌터카 사무실에서 사고를 당한 상대방 차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남자는 차량 넘버로 뭔가를 조회하더니 사고 차주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에서 온 여행자가 당신 차를 망가트렸다...'

통화를 끝낸 남자는 처리가 끝났으니 가도 좋다고 말한다.

맘 같아선 차주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으나 그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풀 커버가 되는 보험을 들었기에 별도의 보상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사이에 차 키를 받고, 사고를 내고, 처리까지 끝이 났다.

우리는 일단 숙소로 들어가기로 했다.

마음 좀 추스르고 일정을 어찌할지 다시 정하기로 한 것이다.

허망했다.

정신적 충격이 뒤늦게 밀려들었다.


친구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나를 위로했다.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게 다행이고,

우리가 다치지 않은 것도 다행이고,

인적 드문 시골길에서 사고가 난 게 아니라 다행이고,

종합 보험을 들어 다행이고...

하지만 여행을 망쳐버린 자괴감이 심하게 밀려왔다.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모허는 다음 날 투어 버스로 가기로 했다.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다.

아일랜드 더블린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였다.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여행 가방들이 하나둘 주인을 따라갔다.

하지만 빈 벨트만 돌아갈 때까지 우리의 캐리어는 나오지 않았다.

네 개 중 한 명 것만 나오고 세 개가 행방불명이다.

분실물 신고를 하고 머물게 될 숙소 주소와 전화번호를 남겼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자정이 넘어서야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한 개의 캐리어나마 찾아서 아쉬운 대로 도움이 되었다.

친구의 옷가지를 한 개씩 빌려 입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골웨이로 이동한 후 급한 대로 속옷과 신발, 필요한 소지품을 샀다.

캐리어는 더블린이 아닌 골웨이에서 가까스로 받을 수 있었다.

그 또한 한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다.

우리의 수하물을 찾았으니 7시까지 숙소로 배송을 하겠다는 문자를 받았다.

7시가 넘어 밤 10시가 되어고 짐은 오지 않았다.

공항 사무실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음 날도 여전히 전화는 자동 응답기로 넘어갈 뿐 연락이 되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호스트에게 우리의 상황을 알려주고 도움을 청했다.

'아뿔싸~'

그가 우리의 캐리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20분 내로 가져다준다고 한다.

반가우면서도 화가 났다.

그러면 대체 왜 여태 가져다주지도 않고 연락도 안 해 준 거냐고 물었다.

호스트 왈, 그 캐리어들이 누구의 것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가 관리하는 숙소가 여러 곳이고 게스트 수가 25명이나 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행 캐리어에는 엄연히 네임텍이 붙어 있고 영문 이름이 다 쓰여있었다.

성의만 있다면 얼마든지 찾아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사흘 만에 찾은 캐리어가 잃어버렸던 아들 찾은 것만큼 반가웠다.



모허로 가는 동안 작은 케이브에 들렀다.

아윌위 동굴(Aillwee Cave)은 한 농부가 토끼를 쫓아가는 개를 따라가다 발견했다고 한다.

거의 40년 동안 동굴에 대해 함구하다가 1970년대에 세상에 알렸다.





아일랜드 클래어 주의 해안에 200미터 높이의 거대한 절벽이 있다.

절벽은 8킬로미터나 이어진다.

그곳이 모허 절벽(Cliffs of Moher)이다.

날씨가 심상치 않다.

아니나 다를까 모허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하나둘 듣기 시작했다.

비옷을 입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과연 매머드 급 절벽이 저 멀리 큰 몸집을 드러내고 있다.

절벽 위에는 손톱만큼 작아 뵈는 사람들이 아스라이 보였다.

길이 미끄러워 빨리 걷기가 쉽지 않았다.

뭔가 다가와 시야를 뿌옇게 가린다.

그게 안개인지 구름인지 알 수 없다.

순식간에 모허는 모습을 완전히 가려졌다.

게다가 바람도 거세어 우산을 펼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한기가 느껴졌다.

7월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절벽이 순식간에 보이지 않았다.

족히 한 시간은 걸어야 절벽에 오를 수 있을 텐데 이 상황이라면 굳이 갈 필요가 없겠다 싶었다.

  






그래도 좀 더 가보겠다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혼자 터덜터덜 내려왔다.

비지터 센터로 들어가니 기념품샵, 카페, 화장실 등이 있다.

비바람을 피해 그곳으로 몰려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올라가겠다던 친구들이 금세 포기하고 나를 뒤따라 왔다.

커피와 쿠키도 잠시였다.

버스 문은 잠겨 있고, 기사는 없고, 추운데 딱히 시간을 보낼 곳이 없었다.

말과 양 떼가 태연히 풀을 뜯고 있다.

그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날씨였을 터였다.




어찌어찌 시간이 지나 버스 승차 시간이 되었고 두린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뭔가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고 단지 식사 시간을 주기 위해 들른 곳이다.

카페테리아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내내 비가 내렸다.

운석을 닮은 바위들이 깔려 있는 해변의 느낌이 이국적이라기보다 다른 행성 같았다.

오랜 침식과 퇴적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지형이라고 한다.

빗 속을 달리는 바이커들의 모습이 싱그러워 보였다.

 



버스가 골웨이 코치 스테이션에 도착했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숙소는 그리 멀지 않기에 걸어가기로 했다.

먼저 배낭을 메고 그 위에 비옷을 입었다.

배낭이 젖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아기 업은 것 같기도 하고 노트르담의 콰지모도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웠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른다.

웃음보가 터진 것이다.

가랑잎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깔깔거린다는 여고생은 비교할 바가 못될 정도였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웃음의 파도타기를 하고 있었다.

호흡이 곤란하고 오금이 저려 발 떼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웬 동양의 부인들이 저렇게 길거리에서 천박하게 웃을까 생각할까 싶어 자제를 하려 해도 도무지 그치질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울 게 하나 없는데 그 시간 우리는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다.

그렇다.

즐거움이나 기쁨, 행복은 커다란 것에서 오는 게 아니다.

사소함 하나로도 그렇듯 깔깔대며 웃을 수 있다.

그게 삶이다.

 


골웨이는 <작은 섬들이 있는 항구>라는 아일랜드어에서 유래했다.                                    

더블린을 대표하는 펍이 Temple Bar라면 골웨이에는 King's Head가 있다.

킹스 헤드는 1649년에 영업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왜 술집 이름이 킹스 헤드일까?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계속 의구심이 들었다.

알고 보니 그곳엔 역사 속의 잔인한 사연이 있었다.

                                                               




King's Head의 건물 벽에는 찰스 1세라는 글씨와 함께 그의 초상이 걸려 있다.

찰스 1세가 바로 그 펍의 주인공이다.

찰스 1세(1625 ~ 1649년 재위)는 제임스 1세의 아들로 대 영국과 아일랜드의 왕이었다.

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할 만큼 전제적 군주였다.

그러나 의회의 권리청원과, 세금과 종교로 인한 내전에 패했다.

그 후 찰스 1세는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단두대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크롬웰은 참수한 찰스 1세의 머리를  영국 전역을 돌리며 참람한 짓을 했다.

그 당시, 왕의 머리를 걸어두던 몇 군데가 King's Head Inn으로 남아있다.

골웨이의 그곳이 바로 찰스 1세의 머리가 걸렸던 곳이다.

그렇게 그해에 King's Head라는 이름으로 펍이 영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그곳에 술을 마시러 가던 사람들은 왕을 추모하기 위해서였을까? 왕을 비웃으려고 했을까?

 


찰스 1세
올리버 크롬웰


골웨이에는 펍이 많다.

노랑 빨강, 파랑 등 원색의 컬러가 산뜻하여 눈에 잘 띈다.

진홍색 피튜니아, 보라색 스타치스,  노란 물양귀비들이 창틀에 조랑조랑 매달려 향기롭다.

알록달록한 꽃들과 여행자들이 입은 밝고 경쾌한 티셔츠와 반바지들이 주는 청량함이 여름 여행의 매력이다.  

생각보다 여행자들의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다.

아기자기한 골목들이 많고 한적할 거라는 짐작은 보기 좋게 틀렸다.

사람이 많으면 가장 불편한 것이 사진찍기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아일랜드는 맥주 강국이고 펍의 천국이다.

대낮부터 노천카페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는 모습은 일상의 풍경이다.

아일랜드에서 펍은 단순히 술을 마시는 장소가 아니다.

온갖 비즈니스와 시시콜콜한 모임이 이뤄지는 사교의 장이다.

골웨이의 펍 역시 저녁이면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이다.

저녁 무렵 펍을 즐겨 보자고 나갔다.


Tig Coili 역시 문틀에 빨간 칠을 해놓았다.                                    

Tig coili의 'Tig'는 게일어로 ‘집’이며, 코일리 Coili는 아일랜드 가족의 성(性)이다.

다시 말해, 코일리의 집이란 뜻이다.

영어로 the home of traditional music, 즉 아일랜드 전통음악을 연주하는 술집이라는 글씨도 쓰여있다.

1894년부터 문을 열었다는 그곳에 들어가 보니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TV 프로그램인 비긴 어게인에서 우리나라 가수들이 노래를 부른 펍이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는 채 틱 콜리에 갔다.

아이리쉬 전통 에일 맥주와 기네스 생맥주를 마셔볼 요량이다.

말 그대로 선술집이다.

퇴근하면서 잠시 들러 선 채로 맥주 한 잔 마시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감자칩 같은 스낵을 들고 온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지인과 대화를 나누며 생맥주를 마셨다.

질펀하게 앉아 고기 굽고 얼큰한 국물을 떠먹으며 얼근해지도록 술을 마시는 우리네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우리는 아이리시 에일과 기네스를 각각 주문했다.

바텐더에게 돈을 주고 맥주를 받아오는 방식이다.

안주 메뉴는 따로 없다.

그러니까 우리식으로 말하면 깡술 마시는 곳이다.

크림보다 더 부드러운 기네스의 거품이 입술과 혀를 어루만지며 넘어간다.

맥주를 즐기진 않지만 자유분방하고 허식 없는 술집의 분위기가 평화롭다.






비긴 어게인 중


그런데 친구 D가 뭔가 이상하다.

갑자기 말이 어눌하면서 꾸벅꾸벅 조는 게 아닌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 정신은 말짱한데 한 없이 졸리다는 것이다.

게다가 혀가 꼬여서 아예 말을 거의 하지 못하며 실실 웃는다.

본인도 너무 이상하다는 것이다.

술을 마시기 전부터 그런지라 술 탓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고작 세 잔 뿐인 맥주는 아직 비워지지도 않았다.

밖은 어둡고 어찌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M과 J가 양쪽에서 팔을 끼고 부축했다.

뒤따라가며 보니 D의 발목이 흐물흐물 제멋대로다.

의지가 전혀 없는 발걸음이다.

마취한 사람 같다.

약사인 J가 별 이상 없을 거라며 걱정하지 마라고 한다.

D는 수영과 걷기로 다져진 근육이 아름다운 친구다.

신체 나이가 30대로 측정되는 친구이기에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졸리다고 하니 일단 자게 두었다.

혹시 밤새 무슨 일이 있을까 염려 속에 몇 번씩 깨어 지켜보았다.    


휘청거리는 친구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D는 벌써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언제 내가 그랬냐는 듯 멀쩡하다.

다행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날의 미스터리는 아직 풀지 못했다.


메인 스트릿을 따라 쭉 걸어가면 코리브 강이 보인다.                                                                                         

성벽에 작은 반원형 문이 있는데 그걸 일명 스페인 아치라고 부른다.

스페인 상선이 입항하고 스페인 사람들이 그 문으로 들락날락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스페인 아치 라는 이름에 대한 기대치가 있었다.

그 소박함에 다소 실망감이 있었다.                          






골웨이에는 유난히 빈티지 샵이 많다.

3유로의 반 소매 티셔츠, 1유로의 스카프, 10유로의 린넨 재킷 등 모두들 한 두 가지씩 쇼핑을 했다.

예상치 못한 날씨 때문에 옷이 없어 불편할 때가 있다.

그때는 현지의 빈티지 샵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Twice as nice라는 간판이 참으로 적절하다.





우리의 빵 사랑은 유난 맞다.

골웨이에서도 귀신같이 맛있는 수제 빵집을 찾아냈다.

슈퍼 마켓에 가니 신선하고 질 좋은 양갈비가 있다. 게다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값도 싸다.

누가 양갈비는 누린내 때문에 별로라고 했던가.

적절하게 시어링 한 양갈비는 어느 스테이크 집 보다 더 훌륭했다.

J는 종류를 막론하고 고기 굽기 선수다.

 




오후엔 특히나 여행자들이 넘쳐났다.

다음날 일찍 아침 식사를 하기 전 다시 메인 거리로 나갔다.

젊은 아가씨가 탭댄스를 추던 에버 그린 앞, 킹스 헤드 앞도 사람 하나 없다.

단지 펍마다 빈 생맥주통을 거두고 채워진 맥주통을 들이느라 분주하다.

각각의 집마다 들여놓는 맥주통의 양이 어마어마하다.

그것들이 하루에 다 소비된다는 게 실로 놀랍다.








"앗! 이것은?"

에스토니아 타르투에 갔을 때  보았던 두 작가가 벤치에 앉아있다.

똑같은 동상이 아일랜드에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런데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타르투에 다녀온 지 고작 2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두 사람은 오스카 와일드와 에두아르드 빌데이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 : 1854-1900 아일랜드)와 에두아르드 빌데(Eduard Wilde : 1865-1933 에스토니아) 두 사람은 동시대의 작가이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은 없다.

단지 성씨 Wilde가 같다는 의미로 두 사람의 고향에 똑같은 동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언젠가 아일랜드에 가서 같은 동상을 봐야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듯 두 곳의 와일드를 마주 볼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골웨이의 오스카 와일드와 에두아르드 빌데
에스토니아 타르투의 오스카 와일드와 에두아르드 빌데


어제 오후에 지났던 길인데 아주 다른 느낌이다.

사람들이 있고 없고 차이밖에 없는데 말이다.

여행자들이 넘쳐나서 즐거운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의 주민들은 복잡하고 소란스러워진 게 불편하기도 하겠다 싶다.


아침
전날 오후
골웨이의 메인 스트리트인 라틴쿼터 벽화
라틴 쿼터 벽화 앞에서 버스킹 중인 윤도현




                                              

골웨이의 메인 스트리트에는 버스커와 댄서, 화가들을 비롯해 카페와 상점들이 즐비하다.

이 거리들을 뭉뚱그려 ‘라틴쿼터’라고도 부른다.

독일 비평가 그림 남작이 말했다.

'카페에서는 자유가 속삭이고 혁명이 농담을 즐겼다'

카페에서 맛보는 여유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베짱이 시간은 여행이 주는 큰 즐거움의 하나이다.
영국처럼 아일랜드 역시 피시 앤 칩스가 유명하다.

보통 대구살을 튀겨 만들어 담백한 맛이라 누구나 무난하게 즐길 수 있는 음식이다.

붉은색이 칠해진 골웨이의 카페에서 피시 앤 칩스와 함께 마시던 에스프레소 마티니가 생각나는 밤이다.




fish & chips


에스프레소 마티니




이전 11화 여행은 낯선 문으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