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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름 May 14. 2019

네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 7일차

뒤돌아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번 트래킹의 목표였던 ABC를 정복하고 이제는 하산하는 일만 남았다.
목표를 달성하면 후련해야 하는데 어쩐지 찝찝하고 섭섭하다.
안 그래도 높아진 고도에서 이틀 연속 무리해서 고생을 했으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아름다우면서도 야속했다.
이 고생을 하고 이렇게 슝하니 내려가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우리의 체력과 일정은 한계가 있고,
계획을 변동할 용기가 없었던 나는 일정대로 하산했다.










어젯밤에는 정말 다이닝 룸에서 자려다가
거짓말처럼 숙소 사장님이 나타나 창고 같은 방 하나를 내어주었다.
등 하나 없이 캄캄한 창고에서 우리 둘과 중국인 커플이
플래시를 켜고 주섬주섬 잠 잘 채비를 하고 잠이 들었다.










밤새 중국인들은 적잖이 추웠는지 이를 달달달 떨며 밤새 추워했었다.
차라리 빨리 내려가는 게 낫겠다 싶었는지
해가 뜨기도 전부터 부지런하던 중국인 커플 덕에 일찍 일어났다.









산을 내려갔다 올라가서 저 맞은편에 보이는 마을을 지나야 한다.






산을 내려갈 때에는 올라올 때보다 빠른 속도가 요구된다.
오르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이 수월하기도 하고,
체력만 받쳐준다면 고산병의 위험도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푼힐 이후에는 고산병이 없었다.
아마 내 발로 천천히 올라가는 길이고,
또 레에서 나름 적응을 하고 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올라올 때에는 2박 3일 걸렸던 거리를
내려갈 때에는 하루 만에 가야 한다.
한 번 봤다고 아는 길이라서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지만
연속되는 내리막길에 무릎이 남아나질 않는다.










내가 히말라야산맥을 오르기 전에는 산을 왜 타는지 몰랐었다.
힘들게 올라가서 그냥 내려와야 하는 이 행위를
왜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제 정상에 오를 때까지도
이 산행을 시작한 걸 굉장히 후회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런데 정상을 등지고 내려가려고 발길을 돌리는 순간부터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그때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
‘아! 산은 올라갈 때 풍경과 내려갈 때 풍경이 다르구나!’였다.
실로 엄청난 깨달음이었다.
올라올 때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심지어 올 땐 오르막길이었는데 갈 땐 내리막길이기도 했다.
단순히 진로의 방향만 달리 한 건데도 세상을 뒤집어 놓은 듯 바뀌어 보였다.










험하고 거칠고 무섭기만 했던,
잘 데가 없어 무리한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던
이 얄미운 산속에 사랑스러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세상에 태어나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의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다른 존재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










이곳에서 말과 당나귀는 굉장히 중요한 존재인데,
롯지에서 판매하는 식음료는 기본이고
무거운 가스통까지 양옆에 매달고 나르기도 한다.
산의 한쪽 면이 낭떠러지인 탓에
딸랑거리는 소리가 나면
나귀와 말이 비켜갈 수 있게 산의 벽 쪽으로 비켜서야 한다.
절벽 쪽으로 비켜섰다간....










아무튼 주로 무언가를 배송하는 아이들을 보게 되는데,
가끔은 이렇게 풀도 뜯고 물도 마시면서
편히 쉬는 아이들도 만난다.
무려 히말라야를 누비는 나귀와 말이라니.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광경 아닌가!










내리쬐는 빛도 평소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










설산이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이제 제법 멀리 보인다.
푸른 산 뒤에 돌산, 돌산 뒤에 설산.
내가 저 길을 걸어온 것이다.










같은 풍경을 올라갈 때에는 저기까지 가야 하는구나 하고 막막했는데,
내려오는 길에 뒤돌아 보니 내가 저 길을 걸어왔구나 하고 기쁘고 처연한 생각이 든다.










내려가는 길이 왜 이렇게 슬퍼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다시 보기 어려울 거라는 아쉬움과
그간 힘들었던 것, 그러면서도 가슴 아리게 아름다웠던 풍경에 대한
회상이 뒤죽박죽 섞여 그런 것 같다.










갈 때는 바삐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꽃 넝쿨 하나도
돌아갈 때에는 더 바쁜 일정에도 한 번 더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산을 오르고 내리는 것이 마치 우리네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겪어보지 않은 길이 막막하고 무섭지만
목표까지 가는 과정이 어떻더라도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그 길을 가야만 하지 않은가.
그 길 위에서 예측하지 못한 수많은 일들을 만나기도 하고.










그 목표라는 게 내 의지로, 스스로 설정했든
혹은 사회에 의해서 설정이 되었든 간에
이 길을 왜 계속 가야만 하는지 끊임없이 문답하고
포기할 방법은 없는지 궁리하기도 하고.










나는 내 인생이 커다란 혼란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도망쳤다.
어딘가로 떠나는 일이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서 도망쳤다.
이 긴 여행에서 인생의 답을 찾는다거나 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산에서 등을 돌려 내려가던 길에 알게 됐다.
오르고자 지나가던 길을 내려가느라 얼마든지 다시 되돌아올 수 있고,
같은 길이라도 같은 것을 느끼는 길은 아니라는 것.










나는 여태 오르려고 위만 쳐다봤었다.
내려갈 것 같은 길이 있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앞만 보고 달렸었다.

그런데 뒤로 돌아가는 길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리막길과 뒤로 돌아가는 길도 보게 됐다.
앞과 뒤에 내가 활동할 수 있는 범위를 넣어두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날씨가 쌀쌀하더니 이윽고 비가 내렸다.
내리는 비를 신나게 맞아가며 청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그 순간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가이드는 비를 오래 맞으면 감기에 들 수 있으니 점퍼나 우비를 챙겨 입으라고 조언했고,
나는 이미 젖은 옷 위에 옷을 겹쳐 입는 것이 찝찝했지만
아프면 곤란하므로 외투를 뒤집어쓰고 걸었다.










숙소에 도착해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려는데 아래층에서 가이드가 뭐라고 외친다.
빼꼼 내다보니 무지개가 떴단다.
무지개를 보곤 본인도 흥분해서 네팔어로 무지개라고 외친 것이다.
엊그저께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반짝이던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나는 이날 처음으로 꼬리와 꼬리가 선명한 무지개를 보았다.
자세히 보니 쌍무지개였다.
여태까지의 고생을 보상해주는 것 같았다.
몸은 힘들었지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행복감이 몰려왔다.
















김치볶음밥에 튀긴 치킨을 시켰다.
시간이 꽤 오래 걸렸지만 맛이 좋았다.
















이제 하산하는 일만 남았고, 고산병 걱정도 잊어서 술을 시켰다.
술이 어찌나 술술 들어가던지, 거의 재산을 탕진할 뻔했다.
4000미터에서 2350미터로 내려왔더니 날씨마저 제법 따뜻한 느낌이다.
그날 저녁은 행복을 가득 안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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