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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Studio Nov 24. 2017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 2011년 대학 도서관에 제출했던 독후감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지만, 나에게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더욱 와 닿는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쓰인 이 책 속의 ‘시대’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 참 이상하다. 나는 전쟁이나 학생운동 등을 겪지 않았음에도 와타나베나 기즈키, 나오코, 미도리의 마음이 내 마음처럼 느껴진다. 사실 전쟁이나 학생운동은 아무래도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역사적, 정치적 사건이 있었던들(혹 없었던들) 상실의 시대는 과거 에나 지금이나 영원할 테니까.


책은 서른일곱이 된 와타나베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그는 그 당시(스무 살 무렵)에는 너무나 선명해서 어찌할 바 몰랐던 그 이야기들을 지금에서야 차분히 적어 내릴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나오코는 ‘나를 잊지 말아줘’라고 부탁한다. 스무 살의 와타나베는 결코 잊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이제야, 그러니까 서른일곱이 되어서야 그때 스무 살의 나오코가 왜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그리도 간곡하게 부탁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절대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여겼던 많은 것들을 잊어가며 살고 있다. 그녀는 그걸 알고 있었다.


나오코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훨씬 전에 그녀의 언니가 자살했고, 남자 친구 기즈키 역시 열일곱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들은 왜 그래야만 했을까? 나와 관계했던 어떤 사람을 잃는다는 건 그 ‘사람’을 잃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함께한 시간, 공간과 같은 어떤 한 시대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와타나베 역시 하나뿐인 친구 기즈키를 잃고 난 후 세상과 자신 사이에 뭔가 어색한 공기가 끼어들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가장 익숙하고 편안했던 시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오코가 언니와 기즈키를 잃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림짐작해 볼 수 있다. 태어나서부터 언니를 줄곧 좋아했던 나오코는 아홉 살쯤 그녀를 잃었고, 세 살 때부터 친구와 연인 이상으로 마치 샴쌍둥이처럼 둘 이어서 완전할 수 있었던 기즈키를 열일곱에 잃었다. 그 후 나오코는 자신을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여러 번 표현한다. 그 ‘사람’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들과 공유했던 ‘세계’를 잃어버린 탓이다. 나오코는 너무나 외로운 사람이었다. 서른일곱의 와나타베는 나를 잊지 말아달라고 고백하던 그녀를 생각하면 한없이 서글퍼진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와타나베)를 사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면, 난 기즈키를 생각하면 참 서글퍼진다. 와타나베에게 기즈키는 존재 자체로 완전한 인간이었다. 둘은 친구가 될 수밖에 없었고 와타나베는 기즈키의 모든 면(기즈키가 와타나베에게 선택적으로 보여주었던)을 좋아했다. 나오코가 사실 기즈키는 굉장히 연약하고 불완전한 사람이었다고(그녀는 그의 그런 면까지 사랑했다) 고백하는 순간 와타나베는 혼란스럽다. 그는 ‘나랑 함께 있었을 때는 그러지 않았잖아’, 나오코에게 묻는다. 그녀는 대답한다. ‘그건 바로 네 앞이었기 때문이야’. 나는 그 순간 큰 바늘이 가슴을 쿡쿡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기즈키 역시 와타나베를 너무나 좋아했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만약. 기즈키가 와타나베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줬더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기즈키가 자동차 안에서 가스 밸브를 열었던 그 밤의 일을 막을 수 있었을까? 나를 포함한 세상 속의 수많은 와타나베(살아남은 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만약 기즈키(역시 세상 속의 수많은 죽거나, 잃어버린 자)에게 어떤 한마디를 했더라면, 기즈키의 모든 고통을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하고. 결국에는 살아서 책을 읽고 있는 우리 와타나베들에게 무라카미 하루키는 주인공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그건 아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을 거라고. 그러니 우리, 그들을 언제 까지고 기억하자고. 잊지 말자고.


물론 당구대만 보면 죽은 기즈키를 떠올릴 줄 알았던 와타나베가 한 경기가 끝날 때까지도 그를 기억해 내지 못했던 것처럼, 그래서 왠지 모르게 그를 저버린 것 같은 자책감을 느꼈던 것처럼. 그들을 매 순간 기억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당구장에서 하나뿐인 친구와 함께 마시던 펩시 콜라를 보았고 결국 그를 떠올렸다. 기즈키는 아직, 그리고 언제까지나 열일곱이고 와타나베는 스무 살이 되었다. 그 간극에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와타나베는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혼란(카오스) 가운데 나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와타나베는 책의 마지막에서 미도리를 찾는다.


미도리는 이름처럼 싱싱하고 생그러운 여자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도 사랑했고 미도리도 사랑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나오코에 대한 마음은 한 인간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데서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미도리는 멋진 여자다. 정말로. 아버지는 아파서 누워있는데 밥도 잘 먹네, 자신을 비난하는 주위 사람들에 대해 ‘그런데 와타나베, 결국 아버지의 오줌을 받아내는 건 나야. 입으로는 무슨 일이든 못해?’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사람들에겐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미도리는 별난 여자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주지 않는 (비교적) 유일한 여자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와타나베를 선택하기 위해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반면 와타나베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고 ‘노력’까지 하는 편이지만 결국 부지중에 상처를 주고 있다. 미도리에게도 그랬다. 싱싱하고 생그러운 여자 미도리는 ‘나에게 상처 준 너에게 화가 났어. 그렇지만 너를 용서하고 사랑해.’라고 솔직하게 표현한다. 와타나베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미도리와 와타나베가 처음 만났던 수업 <연극사Ⅱ>에는 카오스(혼란) 속에서 서로 얽히고설켜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그것이고, ‘상실의 시대’ 속 주인공들의 모습도 그것이다. 이 시대에 우린 많은 것을 잃는다. 나오코를 잃은 와타나베가 여행 중 ‘나도 어머니를 잃었지’라고 자신을 위로해주는 남자에게 ‘어머니? 난 사랑하는 여자를 잃었다고!’ 하며 격렬한 분노를 느꼈던 것과 같이 나의 고통이 세상의 전부인 것 같을 때도 있다. 연극에는 이 순간 돌연 하늘에서 내려와 어지러운 세상(나)을 교통정리해주는 마키나가 있지만, 우리에겐 없다. 그저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인가 혼란스러워하면서 자신에게 관계된 사람들과 끊임없이 부딪치고 섞이고 가끔은 그들을 잃어버려 깊은 슬픔에 빠지기도 하면서 지금을 살아가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언젠가는, 가령 서른일곱의 내가 스무 살의 내게 일어났던 일을 ‘알 수 있게 되는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건 어쩌면 지금과는 또 다른 ‘상실의 시대’의 시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상실의 시대>와의 세 번째 만남에 대한 기억을 이제 마무리 짓는다. 나는 내게 가슴으로 다가왔던 두 번째 만남 이후부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한다. 내가 받았던 위로를 그들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너와 함께한 시간, 공간 - 나의 상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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