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제 Jan 21. 2023

픽션을 써보고 싶은 초심자라면, 「동화 쓰는 법」

저자 이현 / 출판 유유 / 2018

수학 공부를 해야만 했던 고등학생 시절, 나는 [수학의 정석]이나 [개념원리]를 독파하지 않았다. 잠이 많은 나로선 저렇게 두껍고 빽빽한 참고서는 도전할 수조차 없었으니까. 호기롭게 시작한다 해도 첫 단원 ‘집합’만 열심히 풀고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농후하고, 엄청난 시간을 들여 끝까지 풀어낸다 쳐도 돌아서면 다 까먹어 구멍이 숭숭 날 게 뻔했다. 수능에는 도형의 탈을 쓴 방정식 문제처럼 여러 단원의 개념을 결합한 문제들이 자주 나온다. 도형에 빠삭해도 방정식을 모른다면 그 문제는 못 푸는 거다. 중요한 개념들은 모두 숙지하고 있어야 응용이란 것이 가능하다.


내가 선호한 방법은, 중요한 개념과 원리를 보기좋게 잘 정리한 얇은 문제집 한 권을 정해서 여러 번 반복하는 거였다. 수학 문제집은 단원별로 ‘기본’, ‘응용’, ‘실전’ 식의 단계가 나뉘어 있는데, 처음에는 개념 설명과 기본 문제만 집합부터 통계까지 쭉 훑으면서 개념을 이해하고, 그 다음은 응용만, 그 다음은 실전만, 그 다음은 틀린 문제만 하는 식으로 여러 번 돌리는 것이다. 그래야 겨우 개념들이 머리에 들어온다. 정석이나 개념원리는 모르는 게 있을 때 사전처럼 찾아보는, 그야말로 '참고서'였다.


작법서 추천 글에 웬 수학 얘기냐고? 요는, 내가 ‘얇은 기본서’를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이 책 「동화 쓰는 법」이 동화뿐만 아니라 픽션 쓰기 분야의 얇은 기본서가 될 만한 책이었다는 거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 이현 작가도 탱고 얘기로 서두를 열었으니, 수학 얘기로 시작하지 말란 법도 없지.


사실 딱히 동화를 쓸 생각은 없었다. 어린시절로부터 너무 많이 떨어져 나온 데다, 요즘 어린이들이 어떤 생활과 생각을 하는지도 잘 모른다. 코로나19로 인한 줌 수업을 경험했다는 것, 나로서는 이름조차 생소한 캐릭터 장난감이나 공룡 인형을 사 달라고 조른다는 것 등 단편적인 풍문이 가끔 들려올 뿐이다. 「웨이싸이드 학교 별난 아이들」처럼 엄청 재밌는 동화를 보면 나도 써보고 싶은 충동이 솟기도 했지만, ‘아, 나는 아이들 모르지’로 되돌아오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내게 숨은 보석처럼 다가왔다.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두께 3.5cm)」, 「소설 쓰기의 모든 것(전 5권)」 같은 책들이 정석이고 개념원리라면 「동화 쓰는 법」은 동화든 소설이든 픽션을 써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입문서였다. 이야기를 쓰는 데 필요한 원리와 방법을, 다년간의 창작·강의 노하우가 묻어나는 쉬운 예시와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가볍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중요한 지점들은 놓치지 않는다.


이렇게 주인공의 욕망이 걸림돌을 만나 갈등을 겪던 어느 날, 주인공을 움직이게 하는 도발적인 사건이 벌어지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폭탄이 정체를 드러내고 타이머가 작동되기 시작한다. 주인공을 당장 움직이게 하는 폭탄이어야 하고, 이야기의 크기에 맞는 타이머여야 한다.


작가는 모든 걸 알고 있다. 이야기에서 드러난 것 이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걸 다 털어놓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극적 질문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며 딱 필요한 만큼, 독자의 궁금증보다 조금 ‘덜’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가 실제로 사람을 만났을 때도 그렇다. 만나자마자 출생의 비밀부터 프로이트적 트라우마까지 다 털어놓는 사람은 부담스럽다.


이런 식으로 인간에게 이야기란 어떤 의미인지부터 시작해서 인물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사건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설정이 구체화되는지, 결말은 어떻게 내고 퇴고는 어떻게 하며 원고료 얘기는 어떻게 하는지까지 짚고 넘어간다. 부록으로 동화·청소년소설 추천도서 100권이 수록되어 있는데, 내가 이 100권을 다 읽을 일은 없겠지만 어떤 줄거리가 재미있어 보이는지, 좋은 이야기는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등을 참고하며 영화제 프로그램북 읽는 느낌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작법서 작가가 말하듯 이 책은 진리가 아니고 무조건 이렇게 써야만 한다는 법칙도 아닐 것이다. 얇은 책인 만큼 ‘퇴고할 땐 이런 문장을 고쳐야 하고’ 식의 아주 구체적인 방법까지 실려 있지는 않다. 하지만 다 읽고 나니 아주 재밌고 알찬 한 학기 강의를 수료한 느낌이 들었다. 여러 번 읽어 내 것으로 만들고, 내 식대로 응용해보고 싶은 욕심이 났다. 이런 작법서, 참 오랜만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