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remy Cho Nov 04. 2017

에필로그: 내가 꿈꾸는 미래

'희망의 기술'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오랜 고전으로부터 따왔다. 사랑이라는 고귀한 가치에 기술이라는 차가운 명사가 이질적으로 함께 자리하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이었다. 아마도 세상 모든 일이 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며 불안해하고 애달파하던 어느 우울한 날들 중에 읽었을 것이다. 그리곤 때마침 첫사랑마저도 쉽지 않았던 한 청춘의 마음에 깃들어서 그 후로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그렇게 한 10년쯤의 시간이 흘러서, 희망이라는 이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어떻게 하면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떠올린 것이 바로 이 사랑의 기술이었다. 이 책을 읽던 과거의 나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겠지만, 10년 후의 나는 제법 담담하게 그 시간들을 기술하게 되었다.


'사랑의 기술'에는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념이 소개되어있다. 사람들이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을 받는 문제로, 혹은 사랑하는 대상의 문제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사랑을 잘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사랑이 내게 찾아오길 그저 바라기만 한다거나 사랑하는 대상만 있으면 사랑이 저절로 잘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기술'은 바로 이런 관념들 때문에 사랑의 실패가 반복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늘 찾아 헤매는 희망이라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희망을 구체적으로 쫓지 않으면서 희망이 내게 점점 가까이 다가올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하고, 꿈 (희망의 대상)만 있으면 저절로 희망이 생길 거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희망을 하는 데에도 기술이 필요했다. 내가 바라는 삶과 현실 사이의 혹독한 간극 인식, 꿈을 향해가는 희망의 설계,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씩 계획을 실천해나가는 그런 희망의 기술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희망이라는 게 결코 제 발로 내게 찾아 오지는 않더라는 것이다. 운이라는 그 장난 같은 것에 내가 간택당하길 그저 하염없이 기대하고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희망을 스스로 조금씩 찾아나갈 때, 그제야 조금씩 다가왔다.


나의 지난 10년은 바로 그 '희망의 기술'을 깨우쳐가는 과정이었다. 내가 어렴풋이 꿈꾸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벽을 마주한 것 같은 좌절감만이 가득 차 있던 때가 있었다. 물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내 마음속에 간절함이라는 감정이 싹텄다. 더 이상 내 꿈이 점점 작아져만 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다행히 나는 그 감정을 외면하지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미뤄두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 간절함 위에 내가 가진 모든 최선을 쏟아붇기로 했다. 계획을 세우고 고통의 시간들을 이 악물고 버텨내며,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고 부딪혔다. 외국인이랑 대화 한 번 해본 적 없는 공대생이 미국에서 넓은 세계를 온몸으로 접하고 또 일본에서 다국적의 사람들과 일하면서 살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씩 희망의 기술들을 깨우쳐 나갈 때마다 이런 드라마 같은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누군가에겐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나의 이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서른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나의 도전, 아니 우리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변의 어떤 누군가는 나보다 조금 더 앞서있고, 또 다른 어떤 누군가는 조금 뒤처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든 그 현실이 나의 가능성과 꿈의 크기를 규정지어버리게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다. 내가 10을 꿈꾸면 딱 10만큼의 가능성이 열리고, 내가 100을 꿈꾸면 100만큼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큰 꿈, 더 큰 가능성을 계속해서 열어젖히려 한다. 그게 또다시 굉장한 용기와 도전을 요하는 일일지라도 아마 또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한 뼘이라도 좀 더 나은 또 다른 10년을 만드는 법은 이번에도 역시 다르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지금껏 내가 배운 희망의 기술들을 간절한 마음으로 또 하나씩 해 나갈 때 지금은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마흔 살을 보내게 되지 않을까. 


과거의 나는 서른을 '우려'했지만, 지금의 나는 마흔을 '기대'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