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는 언제나 내가 가득 담겨

과거의 나를 오늘의 내게 보내며

by 그랑

18호 출력을 보냈다. 고대하던 주제라서 조금은 들뜬 마감을 완주하고 아직 숨도 고르지 못한 상태다. 올해 5월부터는 기존 웹을 리뉴얼하고 웹과 모바일 전용 콘텐츠 생산을 병행 운영하고 있다. <볼드저널> 편집부에 새로 붙여진, ‘미디어 탐구(ME-Media Exploring) 유닛’ 내 시간표는 더 촘촘해졌다. 굵직한, 때로는 소소한 변화를 시도하며 미디어의 의미와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 뉴미디어 환경과 독자의 니즈를 고려하며 콘텐츠를 기획하며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막히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회사 안팎으로 기나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요즘, 직업인으로서 두뇌 가동을 온전히 놓고 제대로 휴식을 취해본 기억이 잘 떠오르질 않으니 치열한 분기를 보내고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여름휴가와 마감대휴를 붙여 사용하려던 야심 찬 계획을 잠시 미루고 노트북을 연다. 모든 것이 격변하는 시대에 고군분투하는 한국 출판업계 동료들과 경험을 나눈다면 좀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열여덟 권의 아버지를 위한 잡지

(일부 중략)

모던 파더를 위한 잡지 <볼드저널>은 이 시대의 보편적인 삶 속에서 감탄할 만한 영감을 발견한다. 창의적이고 대담하게 일상을 일궈가는 현대 가정의 오늘을 수집하고, 이들에게 필요한 삶의 주제를 탐구하며, 함께 향유하고 싶은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한다. 인터뷰이는 사회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위치에 있으며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젊은 생각을 탑재하고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다정다감하며 취미생활 정도는 즐기며 자신을 가꾸는 ‘이상적 아버지’가 아니다. 유명세, 성공의 유무, 얼마나 더 가정적인지를 척도로 삼지 않는다. 앞서 말한 누구도 등장할 수 있지만 <볼드저널>이 정한 호별 주제 안에서 ‘그 인물과 이야기해야만 하는 이유’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 하지만 잡지가 가진 속성에서 모든 아버지의 이야기를 콘텐츠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독자로부터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아픈 비판을 받은 적도 있다.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아버지의 얼굴과 목소리를 담는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어바웃어 파더’, 카카오 브런치와 공동 공모전을 통해 5호 집(House)의 인터뷰이를 선정하는 등의 활동은 우리가 놓친 보통 아버지들의 목소리를 담으려는 시도였다.


12호 반려동물(Animal Companions)까지가 창간 당시 잡지의 콘셉트가 심화되고 정비되는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2019년 6월 출간한 13호 주말의 발견(Discovering theWeekend)을 기점으로 판형과 제호 디자인은 물론 콘텐츠 구성과 콘셉트를 재정비하는 대대적인 리뉴얼 작업을 거치게 된다. 한글 제목을 중심으로 표지 콘셉트를 바꿨고, 인터뷰와 에세이가 목차의 메인이 되고, 100페이지 분량의 특집을 세웠으며, 호별 주제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부록을 함께 기획했다. 잡지와 단행본 사이 어딘가에서 소장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콘셉트를 다듬어 나갔다. 리뉴얼 이후 독자의 반응은 비교적 긍정적이며, 실제로 판매율에도 조금씩 영향을 보이고 있다. 특집 페이지 분량을 확 늘려 주제별 기획을 더 구조적이고 촘촘하게 만들게 된 것은 단행본 기획에 가까운 접근이다. 리뉴얼 이후 성과를 자문한다면 국내에서 대안교육에 관한 이해를 돕는 단 하나의 책으로 자신 있게 권장할 만한 14호 대안교육(Let Children Grow up), 미혼부터 기성세대 부부까지 소통에 대한 뜨거운 독자 반응을 이끌었던 15호 부부 위기(Dear My Beloved Enemy), <볼드저널> 자체 캐릭터인 볼드씨 일러스트를 전면으로 내세워 현대백화점과의 기업 콜라보를 시도한 16호 필환경 생활(Green Survival Lifestyle), 실용적이고 위트 있는 접근으로 직장인과 젊은 세대의 관심을 이끌어 낸 17호 사이의 세대(The In-Between Generation)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대가 되는 호는 2020년 9월 23일 발간되는 18호 오늘의 패션(Outfits Of Me, Today)이다.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에서

나는 오랫동안 잡지를 만드는 카테고리 안에서 직업을 유지했지만, 내가 선택해 읽고 보는 잡지는 극히 드물었다. 해외 유수의 라이선스 패션지부터 각종 라이프스타일 명품지가 쏟아지던 잡지 호황기에는 기자 생활을 시작한 <행복이 가득한 집>을 가장 사랑했다. 해외 판권에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고 집과 건축, 문화 예술을 중심으로 독보적인 코리안 라이프스타일의 영역을 쌓아나가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주거문화팀 기자로 일하던 시절, ‘스커트’를 ‘치마’로 표기하며 패션팀 선배들은 난감해 했지만 영문과 한글을 맥락 없이 섞어 쓰는 있어빌리티(남들에게 있어 보이게 하는 능력을 뜻하는 신조어)에 합류하지 않는 것을 자부심으로 생각했다. <밀크>의 한국판 창간 멤버로 합류했을 때는 <밀크> 고유의 아름다운 비주얼 라이징 방식을 국내에서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며 밤을 지새곤 했다. 화보 촬영 전날에는 스타일리스트와 남대문 시장, 고속터미널역을 돌며 유럽이나 일본에는 없는 우리만의 소품을 찾아 헤맸다. 땅콩집으로 대변되는 보통사람들의 단독주택 짓기의 열풍이 일던 2012년도에는 라이프스타일 에디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첫 저서 『고친 집, 새로 지은 집』(나무수)을 출간했다. 이후 프리랜서 에디터로 활동하는 시절 당시 블로거였던 윤소연 저자(현 아파트멘토리 대표)를 섭외해 기획서를 만들고 『인테리어 원 북』(디자인하우스)을 책임 편집했다. 30평대 아파트 직영공사의 합리적인 A to Z를 담은 단행본으로 의미 있는 판매고를 올렸고, 실용 단행본 출간과 기획 경험을 통해 대중이 소장하고 싶은 정보와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감을 익힐 수 있었다.

<볼드저널>을 만드는 방식 안에는 자연스럽게 내가 가진 경험치들이 깃들어 있다. 보편성에서 출발하지만 모호함이 아닌 날이 선 기획, 현상을 다각도로 관찰하고 맥락을 읽어 정교하게 구성 다듬기, 추종하고 싶은 힙한 잡지적 감수성 그 사이를 어딘가를 오간다. 마무리하는 시점에는 기획의 시작부터 끝, 그 과정의 면면을 찬찬히 점검한다. 전하려던 메시지가 잘 담겼는지, 그 안에서도 판단하거나 재단하지 않고 독자가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구멍들이 충분히 확보되었는지, 각각의 원고가 얼마나 적절히 작용하고 있는지, 표지와 내지 종이 재질과 컬러의 조화, 글과 이미지의 적절한 리듬감, 서체와 디자인 메타포의 역할 등 모든 것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지를 본다. 작은 귀퉁이 사진 하나까지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또 너무 멋을 부리지는 않았는지도 점검한다. 마지막으로는 우리 팀이 세심하게 설계한 메시지가 독자에게 온전히 닿아, 각 개인의 인생에서 작은 부분이라도 적용되고, 변화를 시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를 희망한다.


3040 모던 파더부터 밀레니얼 세대 아버지까지

2016년 창간호를 만들 당시 나는 육아서가 불편했다. 심리상담가부터 소아정신과 교수까지 전문가라는 타이틀로 부모란, 엄마란, 아버지란 이래야 한다고 꾸짖고 있었다. 물론 육아는 힘들었고 그래서 다시 육아서를 찾았지만 내게 필요한 건 이론이 아니었다. 그해 둘째를 낳으며 나는 그것이 위로와 공감, 그리고 실제로 지금 시대에 육아를 경험하는 딱 나와 같은 사람들이 터득한 약간의 삶의 기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린 모두 어느 정도는 각자의 삶에서 정답에 가까운 선택을 하고 있으니까.

‘아버지로 살아가는 당신의 하루는 어땠나요?’ 정기구독자에게 공식적인 뉴스레터로 인사를 전할 때, 반복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문장이다. 이 문장에는 일터와 가정에서 오늘도 무사히 별탈 없이 잘 버텨냈나요? 라는 뉘앙스가 함께 담긴다. 실은 입술 끝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독자를 향해 가장 하고 싶은 위로와 공감의 말이다. 결혼과 출산을 꺼리는 시대, 현대사회가 만들어 낸 새로운 고충을 안고 살아가는 3040 아버지들의 삶은 실제로 더 팍팍하다. 7호 유산(Heritage)에서 오찬호 작가가 언급한 것처럼 3040 한국 남자들은 청년기를 지난 30대 중반 이후부터 30년간 중년 세대라는 이미지에 갇히지만, 기성세대 아버지로 살 수 없는 새로운 중년이다. 그는 ‘모던 파더’에 대해 청년 다음의 삶을 중년이라는 포승줄로 미리 묶지 말고 젊음을 오랫동안 즐기라는 좋은 뜻처럼 보이나, 실상은 중년처럼 보이면 경쟁력을 상실해버리는 참혹한 노동 현실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사람들의 생존 전략이 상품화되었을 뿐이라고 썼다.

창간 당시 설정해둔 모던 파더도 나이가 들었고 그들의 라이프스타일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요즘은 이제 막 아버지가 되었거나, 아버지가 되기를 아예 포기하거나 혹은 더 간절히 아버지가 되기를 기대하는 2030 밀레니얼 세대가 새로 쓰는 아버지 상을 더 자주 그려본다. 정지우 작가는 17호 사이의 세대(The InBetween Generation)에서 불안과 위험이 증대되고, 공고한 공동체 의식이 약해진 현대사회에서 가족이란 오히려 더 필사적으로 지키고 매달리고 싶은 곁의 존재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더 진화된 아버지들은 지금도 새로운 유형으로 태어나고 있다. 이들은 맘스 카페의 엄마들만큼이나 공감과 연대의 능력이 뛰어난 이들일지도 모른다.

명확한 타깃 독자 설정, 아버지의 삶 속에서 끌어올린 주제를 다루는 방식 등 이 화제가 되며 신문 방송을 비롯한 다양한 미디어에서 <볼드저널>을 조명한 기사를 꾸준히 다뤄 주셨다. 하지만 여전히 출판시장은 어렵다. 잡지와 책이라는 물성으로 독자를 얼마나 더 오래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하기 힘든 시기다. 물론 준비하고 있다. 온라인 환경에 적합한 웹 콘텐츠 기획을 강화하고, 지금 시대에 맞는 방법으로 독자와 긴밀히 소통하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와 언택트 시대에 핏한 뉴 노멀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문제는 ‘과연 어느 영역까지 손댈 수 있을까’인데, 그래서 선택과 집중이 더 중요해졌다. 종이책을 제작하는 일 너머의 영역이 어디까지 확장될지 때로 두렵다. 이제는 계절도 월도 아닌 주 마감에 허덕인다. 바닥까지 탈탈 털리는 마감 노동자의 시간을 지나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탐구 영역을 향해 돌진하는 에너지가 꺼지지 않기를 바란다. 수백 번의 마감 중 또 한 번이겠지만 여전히 묵직한 책 한 권이 손에 도착하기까지 쫄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결국 어떻게든 마감은 끝이 있고, 이 사랑스럽고 소중한 미디어(그 형태가 무엇이든)가 더 많은 사람에게 온전히 닿을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오늘도 고민할 뿐이다.



이 글은 2020년 <기획 회의>에 실린 기고문 중 일부를 발췌한 글이다. 발행인, 에디터, 사진가, 스텝의 실명이 언급된 부분 일부를 제외하고 옮겼다. 캄캄호 커뮤니티 운영을 앞두고 그동안 내가 일에 대해 가졌던 오래된 생각을 꺼내 본다. 꽤 시간이 흘렀고, 출판, 미디어, 브랜드 환경이 격변했다. 매거진이 가졌던 권력은 커뮤니티, 구독, 커머스로 옮겨갔고 기업과 브랜드는 스스로 미디어가 되었다. 웹소설, 전자책, 오디오북 출판 시장은 다변화 되었고, 독립 출판이 뜨더니 SNS에서 영향력을 가진 누구라도 책을 출간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AI만 활용하면 한달이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외치는 한 편, 고전과 오리지널리티의 가치는 더 귀해지고 있다. 2025년, 변화하는 시장에서 앞으로의 콘텐츠는 무엇이어야 할까. 오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방향과 속도를 묻는다. 내 컴퓨터에 보관해 둔 생각들을 블로그에 SNS에 기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이건 스스로 하는 다짐 같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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