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

탑승자 제이, 아보, 베리베리스트로베리의 이야기

by 그랑

포스터의 문제가 아니다. '밤과 꽃' 클래스 오픈을 미뤄놓고 날짜를 특정하지 않고 있다. 아보가 포스터 이미지에서 받은 인상에 대해 말한 것이 프로젝트를 미루자는 결론으로 가버린 것에 대해 제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오래전부터 내려질 결정이었음을 알고 있다.

아파트 단지 안 낡은 벤치에 앉아 무릎을 감싸 안고 햇빛을 맞는다. 그간의 과몰입과 허무, 불안과 강박이 뒤섞인 초초한 마음들이 5월의 빛과 꽃과 나무 사이사이로 흩어진다. 롤러코스트를 탄 듯 찌릿한 진동이 멈추질 않던 심장이 조금 내려앉는다. 햇빛 샤워를 하니 이제야 살 것 같다. 길게 숨을 내쉰다. 등과 뒤통수가 점점 뜨거워지다가 귀에서 볼까지 화끈거린다. 언짢음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쏟아지는 생각들이 도저히 멈춰지지 않아 금방이라도 퍽 하고 터져 버릴 것만 같은, 의지와는 무관하게 뇌가 스스로 팽창돼 가는 이 고통을 나는 너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내가 얼마나 잘하고 싶었는지, 사실은 얼마나 많은 말들을 참았는지 제이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말해 쥐야겠다고 마음먹고 입을 열었는데 목이 먼저 매어 버린다.

단지 안을 오가는 주민들이 힐긋 댄다. 아파트 현관 유리문 위에 비친 나를 본다. 질질 짜는 꼬락서니가 하도 어이가 없어 픽 하고 웃음이 터진다. 목구멍의 울음을 삼키던 나를 가만히 기다려주던 제이는 울던가 웃든가 둘 중에 하나만 하면 안 되겠냐면서 일단 뭘 좀 먹고 밀린 잠을 자는 게 좋겠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사흘을 못 잤다.

아보는 클래스 날짜를 다시 잡기 전에 자기 작업실에서 고기를 굽자고 했다. 프로젝트고 뭐고 일단 고기 먹고 햇빛 쬐고 수다 떨고 하면 좋겠다고 했다. '신경 미학'이나 '신경다양성' 따위는 관심도 없으면서 시간도 가격도 묻지 않고 클래스를 신청한 베리가 클래스 취소 소식을 듣고 잠실에서 일산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내가 아는 가장 성실한 프리랜서 베리는 노트북을 켜고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수정 작업을 이어가며 나의 이야기를 듣는다. 타다 타닥 경쾌한 자판 소리 덕분에 주의력을 빼앗겨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도통 모르겠다.


캄캄: "베리베리스트로베리야, 근데 너 내 얘기 듣고 있는 거니?"

베리: "나 이거 수정해야 하니까 일단 얘기해. 다 듣고 있다고."


제이와 아보와 베리베리스트로베리의 덕분에 프로젝트를 내 손으로 엎고서도 나는 오랜만에 꿀잠을 잤다. 야심하게 준비한 브랜드 론칭이 미뤄지고 갑자기 공허해진 토끼 선장은 어제 새벽 바르셀로나행 비행기표 3장을 끊었다. 론칭 기념 여행을 떠나려고 했는데 론칭 취소 여행이 되어 버렸다. 갑자기 SNS에 스레드에 쓸게 없다. 이건 일기인가 소설인가 드라마인가. 아. 나도 모르겠다. 오타가 풍년인 이유는 스레드 수정 시간에 맞춰 후루루루룩 써버리기 때문이고 이 걸 이해해 준다면 오타 신경쓰지 않고 맘 편히 쓸 수 있을 것 같다. 갈길을 잃고 도파민 고갈 상태에 이른 adhd 토끼 선장에게 용기나 응원의 메세지를 남겨 준다면 나는 이곳에 캄캄호의 항해를 매일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깡충!




갑자기 쓸게 없다.

이건 일기인가 소설인가 드라마인가.

아. 나도 모르겠다.




캄캄호 첫 프로젝트 <밤과 꽃> 행사가 엎어진 지난 5월, 머리를 산발한 채로 아파트 단지의 한 낡은 벤치에 앉아있는 내 꼬락서니가 하도 우스워서 후루룩 썼던 글을 옮겨왔다. 집에서 일하는 나는 동료도 없고 출근길 낭만도 없어서 이 벤치를 나만의 햇빛 샤워 스폿으로 삼고 멍을 때리곤 했다. 오늘은 제이도 아보도 베리베리스트로베리도 보고싶은 날인데, 아직 소식을 전할 만큼 보여줄 게 없어서 연락은 참고 있다. 캄캄호 토끼 선장의 초인간 인터뷰에 대한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세상 곳곳에서 직업인으로 살아가는 신경다양이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야이기들을 다룰 캄캄호 유튜브 채널을 오픈했고, 4년을 준비한 생각들을 꾹꾹 눌러 채널 설명란에 적어 넣었다. 혹시캄캄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호기심이 생긴다면 누구든지 찾아와 주세요. :)




캄캄 이미지2.JPG
캡처.JPG 신경다양인의 정체성으로 즐거운 캄캄 유니버스를 만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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