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원하는 것을 가져봐야 그것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말. 근데 그렇게 따지면 저는 그것조차 실험할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이죠. 원하는 걸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으니까.
목표했던 대학이 있었고, 전공이 있었고, 그 전공을 해서 가지고 싶은 직업이 있었죠. 저는 그 때까지 제 미래가 너무 뚜렷하다고 생각했어요. 공부도 대충했는데 성적이 꽤 나왔고, 교우 관계에 그렇게 스트레스 받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바른 생활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무언가를 원해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 같아요. 흘러가는대로, 그냥 주어진 거 열심히 하면서 살자. 그렇게 살았죠.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성적이 미친 듯이 떨어지는 거예요. 당연했죠. 지역에서 난다긴다하는 애들만 모아 논 곳이었으니까. 중학교 때 날림으로 공부했던 실력이 바로 들통이 난 거였죠. 그때부터 공부를 잘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가고 싶은 대학이 생겼고. 생애 처음으로 갖고 싶은 것이 생겼는데, 마음처럼 안되는 거예요. 성적은 오르다가도 다시 떨어졌고, 고3 때 성적이 가장 안 좋았어요. 그래서 뭐 대충 점수 맞춰서 대학에 갔죠.
제가 대학을 다닐 때 까지만 해도 그 약간 논스톱에서 나오는 분위기 있잖아요? 그런게 어느정도 남아 있었어요. 출석도 막 대신 불러주고, 출석 부르고 바로 뒷문으로 나가고, 시험인데 자랑처럼 백지 내는 사람이 대다수고.. 그런 분위기였는데 저는 그게 너무 싫고, 아 진짜 이 대학을 빨리 벗어나고 싶다.. 좋은 대학이면 이런 분위기는 아닐텐데...되게 열등감에 시달렸어요.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죠. 벗어날려고. 근데 그것도 결국 안돼서 그대로 대학 졸업했고, 가고 싶은 대기업을 2년을 계속 도전을 했는데 안뽑아주더라고요? 나 진짜 잘할 수 있는데.. 그래서 2년 동안 백수로 있다가 모교에서 행정직원 뽑는 공고가 나서 거기에서 일을 시작했죠. 계약직으로. 대부분 인생의 성취를 이야기할 때, 원하는 학교, 직장 뭐 그런 거잖아요? 그런걸로 치면 저는 성취를 한번도 못해본 인간인거죠. 실패의 집합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20대의 꽤 오랜 시간을 열등감과 싸워왔던거 같아요.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괜히 비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저것들이 제가 진짜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몰라요. 못 가져봤으니까. 근데 지금은 알아요. 원하는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더이상 제게 중요한 것들은 아니에요.
[실패에 실패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제 그 실패의 연대기 안에도 작은 성공들이 생기기 시작했죠. 실패에는 실패만 있는 줄 알았는데 실패 안에도 또 다른 성공이 있더라고요. 아주 사소한 성공들. 저는 책 읽는 걸 어렸을 때부터 좋아해서 독서모임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었는데 제가 20대 때까지만 해도 독서모임이 지금처럼 활발하게 있지는 않을 때였거든요. 이제 거의 10년 전이네요. 처음으로 독서모임이란 것을 만들었어요. 일주일에 한번 같은 책을 읽고 와서 감상을 나누는 거였죠. 물론 이것도 쉽지는 않았어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핵심 없이 구구절절 얘기하는 거, 헛소리 하는거, 자기도 잘 모르면서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를 자기 것인마냥 이야기하는 거 진짜 극혐하거든요. 근데 독서모임은 이런 사람들의 집합소라고 보시면 돼요. 그니까 저는 좋아했던 걸 시작한 거였는데 거기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거죠. 처음에는 진짜 맨날 속으로 욕하고 그만 얘기해라..닥쳐.. 이러고 사실 잘 듣지도 않았어요.
근데 이걸 한 3년을 넘게하다 보니까, 좀 바뀌더라고요. 사람의 말을 듣는 게 이렇게 어려운거구나, 재미 없는 이야기를 끝까지 참고 버티는 게 정말 힘들다.. 이런 걸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이 때 가장 많이 깨지기도 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또 하나의 실패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 시간들로 인해서 처음으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 거니까, 제 안에서는 어떤 성숙이 일어난 거죠.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알았는데, 아 실패 속에서도 이런 성공들이 있구나. 그리고 어쩌면 내가 삶에서 진짜 성취해야 하는 것들은 이런 성격의 성취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서른, 공회전하는 삶에 대해]
그리고 서른이 됐죠. 서른은 여러모로 저에게 고비였던 시간이었는데, 가장 힘들었던 게 주변 친구들의 결혼이었어요. 주말 오후에 침대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어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는 느낌. 결혼식에 가면 저 사람들은 목표가 뚜렷해 보이는데 갑자기 저는 아무런 목표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저는 되게 오랫동안 비혼을 생각해왔고, 굉장히 견고한 신념이라고 믿었는데, 사실 아니었던 거죠. 물론 그렇다고 결혼을 하고 싶다거나 한 건 아니에요. 다만 갑자기 옆자리에 같이 타고 가던 사람들이 나도 모르는 정거장에서 다 내려버린 느낌.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나는 계속 같은 버스를 타고 가는데 어느 시점에서 사람들이 나만 빼고 우르르 내려서 갈아타버리는 거죠. 내가 탄 버스는 계속 가고 있는데. 근데 나도 이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그러니까 갑자기 불안해지더라고요.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비혼을 생각해와서, (그 때는 비혼이라는 말도 없었어요. 독신주의였지.) 이 신념은 절대 흔들릴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저런 상황에서 흔들리는 걸 보고 되게 충격을 먹었거든요. 그러니까 사실 굳건하다고 믿는 신념일수록 더 의심해봐야 해요. 내가 이거 진짜 하고 싶은 거 맞는지. 그리고 사실 흔들리면 또 어때요. 그때의 최선을 찾아 가는거지. 고정된 형태의 나를 지키려고 하는 것들이 사실은 아무 의미 없을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죠. 그러니까 흔들리는 순간이 오더라도 너무 자책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인간은 언제나 모순적이고 그래서 쉽게 흔들리니까.
[절반의 세상에서 행복하기]
저는 지금 너무 좋아요.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성취한 게 없지만, 이대로 좋아요. 오늘 퇴근하는 길에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걸 봤는데 오늘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이었어요. 일상이 너무 충만해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게. 가끔 내가 고3으로 돌아가면, 내가 대학 졸업할 때로 돌아가면 다시 죽을만큼 열심히 할텐데. 한동안 그런 생각으로 괴로웠는데, 요즘에는 다시 돌아가도 나는 똑같이 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냥 그런 결말이었던거죠. 너무 많은 의미부여를 하기 시작하면 인생을 결국 짊어져야 하고, 그 시간들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거든요. 20대의 대부분을 실패로 끌려다녔다고 생각하면 또 너무 아쉽지만, 다시 돌아가도 저는 또 그렇게 하겠죠. 그 시간들을 통과해야만 지금으로 올 수 있는 거니까. 영화 소울에서 주인공이 멋진 공연을 한 뒤에 허무를 느끼는 것처럼, 사실 그게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었어도 허무를 느낄 수 있거든요. 삶은 성취가 아닌 반복이니까.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 평범한 삶이어도 그 안에서 수 많은 성공과 실패, 그리고 충만과 허무가 교차되는 거죠. 그래서 어떤 하나에 너무 목을 맬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아니 어떤 것이든, 그게 뭐든, 절대 어느 하나에 목 매지 마세요.
[인생은 의외로 빨리 결정나지 않는다]
스무살 때는 대학이 내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했고, 이십대 중반에는 직장이 내 인생을 결정지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리고 삼십대에는 결혼이 인생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하죠. 근데 인생이 그렇게 빨리 결정나는 게 아니더라고요. 어쩌면 죽어야만 그 인생이 어떤 인생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저는 지금 삼십대 후반이지만 아직 제 인생이 결정 안났다고 생각하고, 제가 아직 유망주라고 생각해요. 얼마든지 더 성장할 수 있는 거죠. 일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개인적인 부분에서도 그래요. 저는 제가 아직도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하거든요. 죽을 때까지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가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인간은 절대 혼자서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없거든요. 타인을 겪어야만 내가 어떤 모양인지를 알게 되죠.또 좋아했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싫어지기도 하고, 싫어했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좋아지기도 해요. 이건 절대 변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변해버려요. 저는 그래서 삶이 참 재밌다고 생각해요. 한번 결정지었던 것들에 대해 다시 결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싶어요. 지금의 저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요. 나의 변화, 내 삶의 변화, 그리고 내 주변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탐구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근데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나”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해야하거든요? 진짜 “나”와 시간도 많이 보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 저한테는 비혼이라는 삶의 방식이 안성맞춤인거죠. 내 인생에 제일 중요한 게 저이니까요. 저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주면서 존재 증명을 하는 인간은 아니에요. 진짜 남한테 관심 없거든요. 그냥 사는 동안 나에게 잘하고 싶어요. 여기까지 이야기하니까 알겠네요. 역시 결혼은 안하는 게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