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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일 Aug 02. 2021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고

서른이 지난, 어느 평온하고 지루한 오후였다. 아무런 약속없는 주말 오후, 침대에 누워있었다. 갑자기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가위에 눌린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나는 잠을 자고 있지 않았다. 누워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분명 나는 무언가에 짓눌리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물을 들이켰다. 그 무렵, 한동안 나는 알 수 없는 질식에 시달렸다.


"그냥 막 살아보고 싶어."

그 시기, 지인들에게 습관처럼 하고 다니던 말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내 인생이 지겨웠고, 허무했고, 일상이 너무나 무거웠다. 나를 질식하게 만든 것은 내 일상이었다. 어디에 도달할 지 알 수 없으나 이미 정해져있는 길. 고속도로에서 이탈하고 싶었다. 그 때 나는 최승자에 빠져 있었고, "이렇게 살수도,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이 온다"는 시의 구절을 기도문처럼 외고 다녔다. 선택해야 했다. 살아온대로 살아갈지, 온 힘을 다해 관성의 삶에서 벗어날지를.


인생을 망치기 위해 내가 먼저 선택한 것은 나의 몸이었다. 그게 가장 쉬웠다. 혹독한 다이어트를 했고, 하루에 열두번도 더 거울을 봤고, 늘 옷과 화장품을 샀다. 전과 다르게 나를 꾸미고 싶었다. 어떤 욕망이 나를 흘러가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한 것은 그저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행동하게 두는 것이었다. 일련의 흐름들은 늘 어두운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지만, 늘 도덕적 코르셋을 입고 살았던 내게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몸과 마음이 다 닳을 때까지 몸을 굴렸다. 늘 어떤 경계에 있었다. 아슬아슬한 나를 구경했다. 망가지고 싶었다면, 완벽한 성공이었다. 늘 도덕적이고 바른 삶을 살았던 내게 그것은 완전한 흠결이었으니까.


신기하게도 그러고 나면 숨이 쉬어졌다. 자유로워진 것 같았다. 기꺼이 목을 내어준 대가는 언제나 참혹했지만, 버틸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숨을 쉬기 위해서는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왜 스스로를 망치면서 희열에 들떴는지 알지 못했다. 너덜너덜해진 삶을 수습하며 살아있음을 느꼈다. 이전에 나의 목을 죄어오던 삶을 통째로 부숴버린 것 같았다. 이제 어디에도 완벽은 없었고, 그러므로 이제 지켜야 할 것도 없었다. 그것이 나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무엇에서 그토록 간절하게 벗어나고 싶었던 걸까. 아니, 그 이전에 나를 그렇게 질식하게 만들었던 건 뭐였지?


그렇게 정성들여 망친 나를, 수습했다. 너덜너덜해진 나를 기우고 기워 다시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바뀐 것은 없었다.그런데 모든 것이 바뀌어있다고 느꼈다.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길에 왔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나를 질식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곳이 막다른 길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갈 곳이 없는 곳, 선택할 수 없는 길, 성장할 수 없는 나.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고, 어떻게 가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주변의 대부분은 결혼을 향해 가거나 준비했고, 또 어떤 이는 남자친구와 유학을 떠났다. 나만 여기에 그대로 남겨져 공회전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두려웠다. 결혼이라는 목적이 없는, 가정을 이뤄야 하는 목표가 없는, 나는 어디로 가야하지? 모두 빛을 향해 나아가는데, 나만 어두운 터널에서 제자리 걸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시점에서 내가 택한 것은 자기파괴였다. 나를 규정하고 있는 것, 나를 정의하는 것, 내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그것들이 진짜인지 실험하고 싶었고, 그래서 부숴버렸다. 그리고 남아있는 것들을 확인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해체하고 다시 만들어야만, 이것이 내 것이라 말할 수 있었으니까.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 무렵, 누더기가 된 삶을 들여다보면서 그것이 하나의 큰 서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오래된 페미니즘 의제와 맞닿아 살아 숨쉬는 것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여태껏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삭제되어 왔는가를. 그 중에는 내가 알고 싶었던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가는지, 무엇으로 버티는지, 무엇으로 숨쉬는 지 나는 간절하게 알고 싶었다.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들리지 않았던 것일까.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에. 다시 질문하고 싶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누가 판단하는 것일까.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 "나의 삶에는 특별할 것이 없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이런 자기소개서 같은 건 쓰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끝맺음된 글에 대해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며 공감하던 희원의 말을 끊고 "중요한 건 그런게 아니라 노동유연화 정책,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편이거든요."라고 말하는 남성이 등장했을 때, 나는 수치심을 느꼈다. 그 상황이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건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 강사가 그 남학생을 제지시키는 대목이었다. "내 수업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앞의 학생에게 사과하세요." 내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고, 혹은 단순히 내 말을 끊었다고, 나는 누군가에게 사과를 받은 순간이 있었을까? 생각해봤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이런식으로 탈락되어 왔을까. "나는 그가 내 말을 끊었을 때, 그리고 내 발언을 평가절하했을 때 약간 무안했을 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가 내 말을 끊고 내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상황이 내게는 익숙했다." 이어지는 소설의 주인공인 희원의 독백이 내 마음을 대신 설명해주고 있었다.



나는 어딘가에 있을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그녀가 어떻게 그 시간을 지나왔는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글이나 번역서를 찾아볼 수 없었다, 십년 전의 내 눈에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강해보였던 그녀가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글이나 공부에 무관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때로는 나를 얼어붙게 한다.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머물렀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떠나게 된 숱한 사람들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까. 이 질문에 나는 온전한 긍정도, 온전한 부정도 할 수 없다.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최은영



내 삶을 부정하고 검열했던 수 많은 시간을 지나 이 삶을 다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이 소설을 만났다. 때로 나를 너무나 슬프게 만들었던 일들은 여전히 내 일상에 존재하고, 그리하여 나는 계속 상처받겠지만, 지금 여기의 나를 지탱해주는 것들이 존재하기에 나는 다시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서로를 지탱하게 만들어 주는 것만으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나에게 온전한 나를 돌려주고 싶다. 더 나아가고 싶다.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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