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말했다. 때로 인생은 어디로 가느냐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를 결정하는 순간이 많다고. 그래서 공간을 결정짓는 장소의 자기결정권은 중요하다고 했다. 어디에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날지는 대부분 장소가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그러한가? 나는 지금까지 내가 만나온 사람들을 떠올렸다. 나는 그 사람들을 어디에서 만났지? 공간보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중요했던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제외하면 내가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온 사람들은 내가 선택한 장소에서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댄스학원, 독서모임, 글쓰기 모임 등등. 대부분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장소였고,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대부분 어느 정도의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나는 내가 선택한 장소에 갈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내가 선택한 곳인가. 인생의 대부분이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로 채워지고, 그것을 얼마나 슬기롭게 견디느냐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것도 어느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기어코 자유를 찾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내가 선택한 곳에 가기 위해서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견뎌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최대한 일을 안하고 살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하고, 그 대가로 지금 여기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살아갈수록 가고 싶은 곳들이 더 많아지고, 내가 마음을 먹는다면 그 곳에 언제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선택한 장소에 갈 수 있는 것.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현실의 갖가지 제약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우리는 늘 나 아닌 다른 무언가를 책임져야 하고, 돌보아야 하므로.
늘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유년시절, 유일하게 내 숨통을 트이게 했던 것은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어두운 밤의 골목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 순간 한정적이고도 무한한 자유를 느꼈다. 이 길의 끝에는 집이 있고, 결국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그 시간만큼은 마음껏 생각하고 노래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나를 숨막히게 했다.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곳. 지금 나의 집은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마찬가지로 언제든 돌아와도 되는 곳이다. 스스로 노동을 해서 밥벌이를 하고, 하여 나의 의식주를 책임지고, 운전을 할 수 있는 지금이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이 삶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만 같다. 더 이상 죽도록 하기 싫었던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가지 않아도 되고,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되고, 스스로를 갉아먹는 곳에 나를 방치하지 않을 수 있는 삶. 그게 무엇이든 나를 고립되게 한다면 벗어날 수 있는 생각과 의지와 두 다리와, 차키를 나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더 좋은 공간, 더 충만한 곳에 가고 싶다. 그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고, 그 사람들을 알고 싶다. 우리는 가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 진짜 대화를 할 수 있으니까.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싶다. 새로운 장소와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은 유일하니까. 해보지 않으면, 가보지 않으면 절대 그 세계에 대해서는 모른다. 나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싶고, 경험하고 싶고, 내가 가는 곳을 내가 택하면서 삶의 수많은 갈래를 결정짓고 싶다. 누가 안내해주고 누군가를 따라 가는 길이 아닌 내가 가고 싶은 길, 내가 가고 싶은 곳. 누군가의 허락 없이도 갈 수 있는 곳.
더 이상 누군가에게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할 필요가 없는 지금,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다음주 월요일 아침, 나는 다시 운전대에 올라 핸들을 쥘 것이다. 죽을만큼 싫은 월요일 출근이지만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답답하면 잠깐 점심시간에 드라이브를 할 수 있고, 퇴근 길에 친구를 태우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실 수 있으니까. 운전 핸들을 쥐고 나서야 비로소 삶의 방향키를 내가 쥐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게 참 묘하지만, 어찌됐든 나는 자유롭다. 나의 선택은 더 이상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