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글을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쓰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백일장이나 교내 대회용 시나 산문을 썼고 스무살 이후로는 책, 영화, 드라마 같은 콘텐츠의 리뷰를 썼다. 내가 비로소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러니까 (내 기억에는) 서른이 넘어서부터였다. 진짜 나의 이야기를 하기까지 나도 1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은 늘 어려웠지만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자주 어떤 벽에 부딪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을 쓰지 않"는 기본 상태의 관성을 이겨내야 하는 일이었고, 동시에 내 속에서 들려오는 "이런 글을 써도 되나?"와 "지금 내 생각이 과연 옳은가?"와 늘 싸워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이 지루하고 반복되는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싸움에서 이겨야만 글을 쓸 수 있었다.
궁금했다. 글을 쓰고자하면 늘 마주하는 목소리. 네가 뭘 쓸 수 있을 거 같아? 넌 아무것도 아니야. 이 목소리는 대체 어디에서 들려오는 걸까. 낯설고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의 것이지만 나의 것이 아닌 목소리. 나는 이 목소리들과 싸워서 이겨야 했다. 나를 괴롭히는 목소리에서 나는 탈출할 수 있을까. 강화길의 소설 <대불호텔의 유령>에는 소설을 쓰고자하지만 쓰지 못하는 소설가가 등장한다. 그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이유 또한 '원한의 목소리' 때문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목소리가 나와,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만 들려오는 목소리일까? 대부분의 여성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나?
가끔 여성 작가나 여성 감독의 창작물을 보면, 이 이야기를 하기까지 그들이 얼마나 오랜 세월을 같은 이야기를 시도해 왔을까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장편을 써낸 여성들은 숱한 시도 끝에 마침내 그들이 가닿은 곳이었다. 그동안 시간은 여성들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목소리는,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이고, 동시에 계속 좌절되어왔던 여성들의 열망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너무나 오래, 많이 봐왔으니까. 지금 나의 희망이 좌절되지 않기 위해, 그것이 또 다시 다음 세대에게 '원한'의 목소리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쓴다. 나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쓰고있다는 불안과 늘 마주하면서 말이다.
매주 금요일 저녁 글쓰기 워크숍에서 글을 쓴다. 글을 쓰고 돌아가는 길은 늘 어둡다. 카페가 자리해 있는 곳은 골목의 어디쯤이라, 나는 항상 비슷한 지점에서 길을 잃는다. 글을 쓰면서도 항상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매주 오는 곳이고 이미 알만큼 아는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마주하면 그렇지 않다. 늘 어둡고 길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결국 글을 쓰는 일이 사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늘 비슷한 곳에서 헤매고, 익숙한 것 같은데 돌아보면 또 낯설게 느껴지고, 아주 쉬운 일도 때로는 너무나 어렵게 느껴지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성실히 헤매는 일.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쓰고 있다는 두려움과 싸워서 이겨야 하는 일. '아무것도 아닌' 것이면 어떠한가. 무엇이든 쓰면서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이야기를 쓰고 완전히 탈고시키면 그 사건은 더이상 나를 괴롭힐 수 없다. 이미 그 시간을 최선을 다해 지나왔으니까. 내가 지나온 곳을 바라보면, 조금 더 나은 길로 나는 가고 있겠지.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자고. 쓰여지는 이야기가 결국 살아남은 이야기가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