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서울에 입성하여 강남역을 찾았을 때의 충격은 잊을 수가 없다. 부산의 도심에서도 높고 큰 건물들은 있었지만, 정말 크고 세련된 분위기의 그 거리는 실로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한동안은 내가 나고 자란 부산이라는 도시는 어쩐지 건물들도 오래되고 촌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부산을 가는 것도 추석과 설날 딱 두번 뿐이었고, 그나마도 가지 않는 일들이 늘어났다. 고향에 대한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부산을 잊고 싶어했고,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된 서울이란 공간에 더 애착을 가지고 더 알고 싶어했었다. 서울 곳곳 안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돌아다니고, 이사도 많이 다녔었다.
그렇게 3~4년여를 지난 어느 날, 서울에 대한 '피로감'같은 것이 느껴지는 순간이 왔다. 지하철을 타도, 한강을 지나도 예전같은 호기심이나 신비로움 같은 것이 없어지고,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지긋지긋함만이 밀려왔다. 한번은 2호선 열차를 기다리다가 스크린도어에 붙어있는 광고를 보고 짜증이 확 솟구쳐올 정도였다. 새로운 것들이 계속해서 쏟아져나오는 도시. 지루할 틈이 없는,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 서울. 고향을 벗어나 무척이나 오고싶어했고 사랑했던 도시였는데, 내가 왜 이렇게 느낄까?라는 생각이 들때 쯤 상황상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그렇게 부산으로 돌아갔다. 서울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니 너무 갑갑했고 서울에서 누렸던 자유들을 그리워했다. 그렇게 돌아간지 4개월여만에 다시 고향을 탈주했고 지금은 또 다른 도시에서 삶의 터전을 꾸리고 이 도시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쨌든 부산이란 도시는 죽을 때까지 나에게 의미있는 곳일 것이고, 가장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그 곳을 기억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제 부산을 비정기적으로 오가며 생활한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부산에서 살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도 보이고, 관찰자의 시선으로 이 도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에서 다시 보는 부산은, 기억과 역사를 품고 있는 도시처럼 느껴진다. 촌스럽다고 느껴진 오래된 건물들로부터, 바다와 산 등 자연까지. 여기서 풀어낼 수 있는 기억과 역사는 나 개인의 것일 수도 있고, 부산이라는 도시 자체, 그리고 대한민국의 것일수도 있겠다.
서론이 길었는데, 부산의 기억과 기록을 담은 공간들, 그리고 앞으로 조성될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 국가기록원역사기록관(부산도시철도 3호선 종합운동장역)
이 곳은 교통이 좋지 않은 곳에 위치하기에 한번도 제대로 찾아본 적은 없다. 또한 대출이나 자유 열람이 가능한 공간이 아니므로 아주 오픈된 공간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공간이 중요한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중요 기록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 즉 역사를 기록하여 보존하고, 남기는 일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공간과 기록이 오래오래 남아서 후세대들이 지금의 우리 모습을 기억하고 연구하여 평가해 줄 날을 기다리며. 개인 자격으로 찾아가서 볼 수 있는 공간은 많지 않고, 견학도 평일에 10명 이상만 된다기에 딱히 찾을 생각을 못하고 있긴 하다.
2. 한국영상자료원 부산분원(영화의 전당 BIFF홀 2층)
2008년 개장한 곳인데 자료가 그렇게 많진 않다. 한국 영화 VOD 및 디지털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고 한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및 시나리오 등도 일부 열람할 수 있다고 한다. 영화의 전당 극장에서 영화보는 것 말고 이곳에서 고전영화들을 볼 수 있고, 자료실에서 영화영상 관련 도서들과 정기간행물을 볼 수도 있으니, 부산에 방문할 때 꼭 들러볼 것을 추천하는 곳. 센텀시티의 멋진 전경을 바라보며 책과 영화를 즐기다보면 오랜 역사를 지닌 부산이지만 마치 미래도시에 와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오랜 영화자료들을 누구나 볼 수 있게 조성된 공간이니만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영화의 전당 비프홀 2층, 영화의 전당 자료실과 한국영상자료원
3. 국회도서관 부산분관(2020년 말 개관 예정)
부산이 고향이지만 대체 이것은 무슨 조합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뉴스였다.
국회도서관 부산분관???그것도 명지신도시 끄트머리의 외딴공간???
대체 여기에 왜 이런 것을 만드는지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배경을 좀 더 찾아보았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임시수도로서 서울의 많은 기관이 부산지역에 살림을 꾸렸고 국회도서관 또한 그러했다. 피란수도에서 국회도서관이 처음으로 막을 연 것이다. 즉 국회도서관의 시작이 바로 부산에서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차원에서 부산에 건립되며, 명지신도시의 넓은 부지에서 확장성을 유연하게 고려할 수 있기 때문에 낙점되었다고 한다. 뉴욕에서 갔던 매트로폴리탄 박물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런 확장성을 더해간 공간이라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세월이 흘러 큰 규모를 갖게 된다면, 그 위용과 규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 할 수 있겠다. 후손들이 이 공간을 통해 우리 세대를 어떻게 기억할지를 생각하면, 정보와 생각과 느낌들을 열심히 남기고 기록하고 펴내야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부산지역에 많은 도서관들이 있지만 국가 공식기관 산하의 체계적인 공간은 없었기에, 국회도서관처럼 큰 규모의 국가기관산하 도서 및 자료를 다루는 문헌정보기관 및 아카이빙 공간에 대한 요구사항이 있었을 것이다. 2000년 밀레니엄도 벌써 20년이나 흘렀고, 시간은 계속 흘러갈 것이다. 사반세기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이러한 공간이 부산에 조성된다는 것이 참으로 의미있고 뜻깊다고 할 수 있겠다.
도서관으로서의 기능 외에 오랜 문헌을 보존하고 아카이빙하는 기록관, 그리고 부산과 도서관의 역사를 담는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함께 하게 된다고 한다. 아직 구체적인 윤곽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개장하자마자 가볼 참이다. 어떠한 자료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보관되고 활용될지, 그리고 기록관과 박물관은 어떻게 조성될지, 너무나 기대된다.
피셜 조감도. 해질녘의 낙동강변을 바라보며 이 공간을 누빌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이 공간들을 앞으로도 더욱 아끼고 사랑하고 지켜보아야겠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된 책이나 컨텐츠도 이 공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열심히 쓰고 펴내야겠다는 각오도 다시 한번 되새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