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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ynthia Nov 02. 2019

2019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영화와 부산,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감각적인 소묘

2019 부산국제영화제 후반부의 4일을 함께했다. 고향에서 열리는 국제적인 큰 행사임에도 이번이 첫 방문이었다.


영화제가 열리는 해운대 혹은 남포동이 생활 반경과 가깝지 않으면 사실 영화제가 열리는지도 마는지도 모른 채 시간이 지나가 버리기 십상이다. 특히 학창시절에는 시험기간과 늘 겹쳤기 때문에 선뜻 시간을 내어 참여하기가 쉽지 않았다. 타지 사람들이 와서 즐기는 축제라는 느낌도 늘 있어왔고.


그러나 서울 및 외국에서 열리는 영화제를 몇 번 다녀보니, 영화제에서만 느끼고 누릴 수 있는 것들도 많기에 고향에서 열리는 이 특별한 행사에 꼭 한번 참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한글날 연휴와 이후 휴가 일정으로 시간적 장벽을 넘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망설임없이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표를 끊었다.


시작은 폐막작 광클이었다. 기나긴 로딩 끝에 삽시간에 차버린 좌석들을 아쉬움으로 바라보면서, 사이드보다는 좀 뒤쪽이 되더라도 중앙 쪽 좌석을 택했다. 그리고 번들로 5매짜리 예매권과 카카오톡 예매권을 구매하여 총 7편의 영화를 접했다. 


여성영화제나 독립영화제같이 비교적 소규모에 정체성이 뚜렷한 영화제와는 달리 이런 대규모 영화제에서는 관람객이 어떻게 영화를 고르고 선택하는지에 따라 영화제를 어떻게 규정하며 바라볼지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여성주연, 여성감독 영화 위주의 영화들로 구성해 보았다. 어차피 한정된 시간 안에 볼 수 있는 영화는 많지 않게 마련이니까. 평소 관심있고 궁금했던 주제를 다룬 작품들을 집중해서 보기로 했다. 


하루에 다섯 편을 연달아 보고 나와 마치 장거리 비행을 하고 난 듯 절절거리는 허리와 하체를 이끌며 영화관을 나오던 기억에, 이번 영화제는 딱 하루 두 편씩만, 이동과 식사를 위한 텀을 두고 여유롭게 즐기기로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부산으로 향하는 설레는 길! 현실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도망치는 기분이라 더욱 짜릿하게 느껴졌다. 부산에서 학업을 할 때는 갑갑하게만 느껴졌는데, 이젠 부산에 가는 길이 쉬러 가는것이 되다보니 갈 때마다 기분좋고 즐겁다. 이번은 영화제에 참여한다는 기대로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도착한 날은 밤이 늦어 영화 관람은 하지 못하고 친구와 남포동에서 잠깐 만나 시간을 가졌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영화제 일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7편의 영화를 보고 이에 대한 개인적인 소감을 남겨본다.


<잔 다르크> 2019/드라마/프랑스/브루노 뒤몽(감독)/르플라 프휘돔므(주연)


잔 다르크라는 캐릭터를 이렇게 재구성 할 수 있나? 하는 놀라움을 선사한 영화. 상상하던 전투장면이나 영웅적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잔 다르크가 이렇게나 어리고, 인간적이고, 진솔하고, 모든 제약을 뛰어넘을만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는 걸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엄청나게 긴 컷들이 몇 장면 연이어 나와 일반적인 영화의 기법과는 많이 다르다고 느껴졌다. 그런 탓에 조금 지루하긴 했지만 동시에 신선하고 특이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 어린 배우가 어떻게 잔 다르크를 표현해냈을지 궁금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연기와 카리스마도 엄청났다. 잔 다르크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저 전쟁을 일으키고 권력 다툼을 한 어른들의 잘못일 뿐.


주연 배우의 눈빛이 정말 큰 역할을 했다.


<시빌> 2019/코미디/프랑스/저스틴 트리엣(감독)/비르지니 에피라, 아델 엑사르쇼플로스(주연)


여기서부터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혹시 프랑스영화제를 온 것인가...?11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는 시빌을 조금 일찍 볼 수 있었다. 시작은 꽤나 어둑어둑한데 점점 뒤로 갈수록 반전에 반전, 웃음에 웃음이 터지는 의외의 작품이었다. 괜히 코미디가 아님.


 가/따/블에서 허공을 응시하며 침을 흘리던 아델은 이제 없어...아우라와 품격을 내뿜는 대배우로 성장한 마고 역(영화에서도 유망 배우 역할)아델 엑사르쇼플로스의 진정한 매력을 엿볼 수 있었다. 시빌 역의 비르지니 에피라의 열연 또한 돋보였다. 저렇게 남의 인생에 지독하게 얽히기도 쉽지 않은데, 그 과정 속에서 무너져가는 시빌의 내면을 정말 처절하게 잘 표현해냈다. 남의 내면을 치료하는 의사였지만 그에게도 치료와 치유가 필요했으며,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렇게 운명의 굴레에 더럽게 얽혀가면서 웃고 울고 상처받으며 살아갈 것이리라. 이러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로하는 영화.


대망의 11월 국내 개봉작. 포스터도 너무 맘에 든다.


<소녀 안티고네> 2019/캐나다/드라마/소피 데라스테(감독)/나에마 리치(주연)


2019 BIFF의 최고 입소문 화제작. 어쩐지 수강신청부터 만만하지가 않았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면서 확신했다. 난 아무래도 불어를 배워야 할 것 같다. 캐나다 퀘벡 배경으로, 역시 불어 영화였다.


이 영화에는 여러 어워드를 주고 싶은데 가장 큰 어워드는 후춧가루 상. 너무 몰입하는게 스스로 부끄럽다고 느껴져 원래 영화를 보면서 안 우는 편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손수건을 챙겨갔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큰일났을 뻔 했다. 그리고 나만 그런게 아닌 것 같았다. 관내에 있는 모두가 같이 오열했다.


안티고네가 현대에 태어나 난민으로 살아간다면?이라는 명제에서 시작한 영화. 사회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그에게 현실은 지독하게 아프고 잔인했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그의 삶과 그의 내면을 염세로 가득차게 끌어간다. 


다시 한 번 꼭 보고 싶고 주변에도 널리 알리고 싶은데 국내에서 개봉 계획이 아직은 없는 듯. 이렇게 영화제에서 만나 열병처럼 앓고 다시 못보는 영화들이 너무 많아 아쉽다. 앞서 소개했던 영자원 부산분원에서 볼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 같이 보면 좋은 책: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


난 누구고, 왜 여기에 있는가. 정체성과 사회의 굴레 속에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갈등하고 저항히던 안티고네의 모습에서 현대사회의 비극을 발견했다.


<비밀의 정원> 2019/한국/드라마/박선주(감독)/한우연(주연)


GV가 있어서 더욱 알차게 즐길 수 있었다. 객석의 질문도 상당히 수준이 높아 영화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높은 분들이 많이 찾으셨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래 전 성폭력 피해를 입은 '정원'이 그간 숨겨왔던 상처를 마주하고 내면을 드러내는 과정을 그린 작품. 같은 여성으로서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많았다. 모든 실마리가 정원의 비밀에 점점 다가가면서 억눌렀던 기억과 상처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다.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정원은 좋은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


영문제목 'Way back home'도 가슴시리게 좋았다. GV에서 관객분이 주인공 부부의 직업 설정에 의도가 있었는지 물어보셨는데 '활력'과 '자연'의 속성을 부여하고 싶었다는 감독님의 대답에 감탄했다. 아픔을 그린 서사라는 사실을 뛰어넘어 놀랍도록 잘 만든 작품이다. 국내 개봉이 성사되기를 바라는 또 하나의 작품. 안되면 영자원 가서 또 볼 것.


이제 자신의 상처와 떳떳히 마주할 수 있게된 정원. 그와 우리 모두가 더 행복하기를 바라며.


<패뷸러스> 2019/캐나다/드라마/멜라니 샤르본느(감독)


부산은행작 수상 및 내년 국내 개봉 확정. 다큐st일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꽤 스케일 큰 극작품. 유튜버로 시작한 멜라니 샤르본느 감독의 첫 장편데뷔작. 그렇다. 감독의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또 퀘벡 배경 영화이다. 이쯤되면 불어를 정말 배워야겠다 싶음.


앞서 만난 안티고네에게 미안할 정도로, 2010년대 후반을 살아가는 현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낸 수작. 2030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재미있게 볼 수 있을 작품이다. 빵빵 터지는 흥미로운 전개에 맘을 빼앗겼다. 내년에 개봉하면 친구들이랑 보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내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은 진솔한 우정 그리고 나 자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그리고 아무리 영상 기반 1인 컨텐츠 시대라지만, 난 절대 영상 혹은 SNS 기반해서는 활동을 못하겠다고 확신을 준 작품. 나라면 이런 상황 아마 못견디고 말거야..


'패뷸러스'하지만은 않은 우리의 삶. 그렇지만 우리에겐 '인생'이라는 영화를 함께 울고 웃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불> 1996/인도/드라마/디파 메타(감독)/샤바나 아즈미, 난디타 다스(주연)


최근에 넷플릭스에 진출하신 디파 메타 감독의 <불>,<물>,<흙> 원소 3부작 중 첫 작품. 이런 작품은 VOD 구하기도 힘들어서 이번 기회에 꼭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 시대에 받아들여지기 힘든 서사였음에도 이렇게 성공적으로 그려내다니 감격이. 감히 말할 수 있다. <캐롤> 이전에 <불>이 있었다고.


그들의 사랑은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일환 그리고 함께하겠다는 결심과 다름없었다. 눈물겹고 가슴아팠지만 끝까지 응원하고 싶었다. 남편들의 말대로 그들이 선택한 길이 고난의 가시밭길이라는 건 후속 이야기가 없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시타는 갑갑한 사리보다 남성들이 입던 바지를 입고 싶어했다. 라다는 오랫동안 금욕을 실천하는 남편에게서 떠나 자신의 욕망을 마주할 용기를 얻었다. 그렇지만 이것이야말로 바로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삶이었다. 가정을 떠나 받을 불이익과 사회적 제약이 다 무슨 소용일까.


두 주연배우의 눈빛연기가 너무 생생하게 담겨있어 더 가슴 절절했다. 특히 인도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좋은 향기를 위해 먹인다는 환 같은걸 주고받는 장면. 엄청나게 섹슈얼하면서도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사랑이 남의 눈을 피한 섹슈얼한 욕망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거부하지 않은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아니야, 이건 플라토닉이야, 그들의 사랑은 사회저항적인 성격이야, 라고만 말하지 않고 직설적이어서 더 좋았음.


이 영화를 이제야 알게 되다니. 3부작 다 보고 싶음.


그리고 대망의 폐막작 <윤희에게>


11월 14일 개봉. 곧 볼 수 있는 따끈따끈한 영화. 이건 이미 평이 많아서 굳이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잔잔한 장면들이 마음을 저미면서 딸 새봄 역할이 서사에 생기를 부여한다. 야외극장에서 보았던 기억이 아주아주 오래 남을 것 같다.


영화관 공기는 퍽이나 갑갑한데, 야외에서 시원한 공기를 쐬며 영화를 보는 맛이 이거구나 싶었다. 그리고 5천석 규모다보니 많아봤자 몇백여석 규모인 실내관에서의 관객들 리액션을 뛰어넘는 군중의 리액션 스케일에도 놀랐다. 5천명이 같이 반응하는데 어떻게 반응을 안 할수 있겠는가.


하얀 설원이 주는 고요함이 마음을 스민다. 추워지기 시작하는 이맘때쯤에 정말 잘 어울릴 작품.


폐막식과 폐막작을 보고 나오는 밤 10시의 영화의 전당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눈물이 다 났다. 평소에 가보면 휑한 공터에 마을 꼬마들이 보드나 롤러 스케이트같은 걸 타고 있던데. 이런 아름다운 공간일줄은 꿈에도 몰랐네.


내년에도 이맘때의 부산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마음으로는 이미 내년을 기약하고 있었다. 내 고향 부산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꼽아보라면, 서슴지않고 10월을 꼽겠다. 이 시기에 부산에 있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고, 이때의 풍경과 공기를 지금 다시 떠올리면 가슴이 절절할 정도이다. 그래, 나는 내 고향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구나. 세월이 많이 흐르고 할머니가 되면 어쩐지 이 곳으로 다시 돌아와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영화를 보는 것 이상으로 부산을 즐기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고 호흡하며 영화를 본 기억 때문에라도 다시 영화제를 찾고 싶은 마음이 끊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은퇴를 하면 시간표를 짜가며 온갖 영화제를 누비는 시네필 할머니가 되어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천성이 감정이 풍부하게 태어난게, 좋은 것 많이 보고 많이 누리고 많이 나누라는 천명같은 것이란걸 최근에 느꼈다. 물론 이 감정 때문에 그르치고 실패한 일들도 많지만, 남들이 못보고 못느끼는 것까지도 보고 느낄 수 있게 타고난 건 어쩌면 축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렇듯 오롯이 혼자였기에, 나에게 더 집중하고 나를 더 잘 알아가고 나와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일상에선 느끼기 힘든 일이다. 마치 꿈결같은 시간이었다.


해운대 영화의 거리 그리고 영화의 전당 준공 전 영화제가 열렸다는 수영만 요트경기장. 난 어릴 때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지조차 몰랐다. 알았으면 여기서도 영화를 많이 즐겼을텐데.
수쳔명의 관객과 함께 시린 바람을 맞아가며 즐긴 영화의 기억은 평생 남을 것이다.
머리로는 가능할까 싶지만, 마음으로는 절로 내년을 기약하게 하는 특별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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