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워 말레이시아

천천히 천천히.. 아이와 관련된 건 무엇이든지 조급해하지 말자

by 리나

"잘못했어"

나의 이 한마디로 내 조급함으로 인해 상처 받았을 아이의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나라면 미안해하는 엄마의 모습에 이때다 싶어 몇 날 며칠을 당당하게 투정 부렸을 거 같은데

5살 딸내미는 그저 꼭 안아주면서 싱긋 웃어주더니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단다.

정말 멋진 아이다.




말레이시아 입국 후 집에 들어온 지 보름 정도가 흘렀을 뿐이지만 나의 조급함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나무랑 꽃 좀봐 정말 멋지지 않니? 왜 나가는 게 싫어? 나가서 말레이시아를 즐겨야지!!"

나는 다른 나라라도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한 걸 아는 어른이고 딸내미는 이제 겨우 5살 아이라는 걸 자꾸 잊어버린다. 말도 잘하고 호탕하게 웃는 아이의 모습에 다 컸다고 나랑 똑같은 어른이라고 착각하는 거 같다.

나가자고 자꾸만 보채는 2살 아기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한 번씩 산책을 할 때면 첫째는 고개만 푹 숙이고 걸었다.

마치 못 볼걸 본 사람처럼.

처음엔 적응이 안돼서 그런가 보다 괜찮아지겠지 했다.

하지만 점점 더 나가고 싶어 하지도 않고 나가더라도 집에 가자고 보챘다.

딸내미의 징징 거리는 말투에 최대한 짜증을 참고 있었던 나는 결국 왜 그러냐며 화를 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딸내미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무서워서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무섭다..

무섭다...

뭐가 무섭다는 거지?

무섭다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큰 나무랑 많은 벌레가 무섭고 지나가다고 자꾸 나오는 도마뱀도 무섭고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듣겠고 등등

그냥 아이에게 이곳은 세상이 뒤집어진 거 같은 경험을 주는 곳이었던 거다.

더군다나 나 때문에 더 무서워하고 있었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한다.

그걸 딸내미 앞에서 너무 자주 말했는지 길도 모르고 영어도 못하는 엄마가 불안했던 거였다.

엄마란 모름지기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 같은 존재로 느껴져야 하는데

말도 못 하고 길도 모른다니 얼마나 불안했을까.

아차 싶었다.

그날 밤 자려고 누워있는 아이에게 대뜸 잘못했다 말하고

천천히 익숙해지자고 했다.

그리고 처음에 쓴 것처럼 용서받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둘째 아이 때문에 마냥 집에만 있을 순 없고 코로나로 재밌는 장소를 갈 수도 없는 이 상황에 답답함을 느낄 때쯤 정말 단순한 일로 아이의 가장 큰 두려움이 사그라들었다.


며칠 전 그저 아이 기분을 좋게 하려고 근처 식당에서 음료를 사 가지고 와서 아파트 단지를 산책했는데 그게 정답이었다.

딸내미는 내가 식당까지 잘 찾아가고 영어로 주문했단것에 엄청난 안도감을 느낀 거였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우리 엄마 여기서도 주문도 하고 대화도 할 수 있어!

심지어 길도 헤매지 않잖아!!

Two Orange juice. Please. No ice


영어라기엔 "오렌지주스 주세요"라는 단어의 나열일 뿐이고 산책이라기엔 집 코앞에 있는 가게를 간 것뿐이지만 그날 저녁 아이는 내일도 주스를 사러 가자는 말을 하며 즐겁게 웃어주었다.

내가 얼마나 믿음직하지 못했던 건가 싶어서 어이가 없었지만 혼자 걱정에 쌓여 무서워했던 아이에게 안도감을 주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이날 이후 매일 식당에 들러 주스를 사고 짧은 영어를 하며 아이에게 칭찬받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아이의 입에서 밖에서 더 놀고 싶어요란 소리를 들었다


들어가기 싫어, 더 놀고 싶어!

이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사실 딸내미가 이 말을 한 거엔 큰 이유가 있다.

바로 한국사람을 만난 거다.

그동안은 왜 못 만난 건지 한국 아이가 있는 가족을 단지 안에서 세 번이나 만났다. 나도 오랜만에 이웃과 인사하고 짧은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딸내미한테는 한국사람을 이렇게 많이 만난 게 엄청 좋았던지 한국 같다며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했다.

여기 한국사람 엄청 많다고 영어 안 해도 친구 많을 거라고 그렇게 말해줘도 모르더니 이 날 지나가는 곳마다 만났던 한국사람들을 보며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한국처럼 똑같이 신나게 놀 수 있는 곳이구나 생각한 거지 싶다.

떨어진 꽃잎과 함께 하는 물놀이




이제는 매일매일 산책 가자고 난리다.

킥보드, 자전거, 공 등등 가지고 놀고 싶은 것도 많아서

유모차 밀고 자전거 끌고 공들고 참 바쁘다.

그래도 아이가 즐거워하니 나도 마음이 편하다.

역시 아이에겐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경험이 필요하고

천천히 배려하며 기다려주어야 한다.

이걸 알고 있으면서 또 기다려주지 못하고 화내고 사과하면서 잘못을 반복했지만

앞으로 우리가 경험할 다양한 일들에 있어서는 내가 아이들에게 언제나 배려하며 기다릴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