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부터인가 세탁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쿵쾅거리는 게 꺼림칙스럽긴 했지만 언제나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다른 중요한 일이 너무 많으니까 빨래만 되면 뭐가 중요하랴 싶었다. 그렇게 애써 모른 척 하기를 며칠이 지나자 정말 정말 큰 소리가 나면서 움직이질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큰일 났다.
여권 신장에 가장 큰 도움을 준 발명을 하나 꼽자면 그건 분명 세탁기일 거다. 내 가족을 꼬질꼬질하게 보이게 하지 않겠다는 어마어마한 목표의식이 없으면 손빨래는 절대 할 수 없는 거다. 오죽하면 드라마에서 사랑하는 여자 주인공이 차가운 물에 손빨래를 하는 걸 보며 분노하는 왕의 모습이 나왔을까. 이렇게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손빨래는 정말 하기 싫은 것 중 하나이다. 그런데 세탁기가 고장 났다.
세탁기가 멈추자마자 수리기사를 불렀다. 금방 고치겠거니 하는 기대와는 다르게 부품이 없어서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답변을 들었다. 심지어 그것도 확신을 할 수 없어했다. 내가 요즘 영어공부를 위해 보고 있는 프렌즈에서도 마침 라디에이터가 고장 났는데 부품이 없는 이야기가 있었다. 세탁기를 못쓴다는 상황에 놀라면서도 내가 공부한 영어를 그대로 써먹어서 신기했다. 물론 신기한 건 잠깐이었고 곧 엄청난 좌절에 빠졌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만든 게 정말 백 퍼센트 나였다. 나의 머리핀이 세탁기에 들어가서 고장 낸 거였다. 바지 주머니 한번 뒤져보지 않은 내 탓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수리기사를 불러준 남편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내 머리핀 때문에 고장 났다는 이야기는 쏙 빼놓고 했다. 민망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수리기사가 이미 상황을 이야기한 거였다. 거기다가 퇴근한 아빠를 보자마자 첫째가 "엄마 핀 때문에 세탁기 고장 났대!"라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첫째의 그 말에 내 탓임을 모른 척해주려던 남편도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우와 엄마 이제 어깨 엄청 튼튼해지고 빨래하느라 힘들어서 잠도 일찍 자겠네~~"
갑자기 호텔에서 격리하면서 2주 동안 손빨래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도 고무장갑이랑 세탁세제도 있고 손빨래를 할 수 있는 편한 공간도 있으니 그때보단 상황이 좋다며 나를 다독였다. 처음 3일은 어떻게든 웃으면서 했다. 시어머님이 애들 이불 겸 수건으로 쓰라고 챙겨주신 거즈 수건이 없었으면 그마저도 불가능했을 거다. 보통 수건과는 다르게 손으로 빨기가 훨씬 수월하다. 사실 사이즈가 작고 얇은 애들 옷은 쉬웠다. 나와 남편의 옷이 정말 너무 힘들었다. 어떻게든 빨래 거리를 안 만드려고 조심조심해서 생활했다. 이 더운 나라에서 땀 안 흘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손빨래로 버텨보자던 내 결심이 무너진 건 고장 나기 직전 사용한 커다란 수건에서 나던 쉰내 때문이었다. 이건 도저히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손빨래를 했다가 애들이랑 놀아줄 힘도 없을 거 같았다. 결국 같은 동에 살고 있는 언니에게 세탁기 좀 빌리겠다는 연락을 했다. 우리 집 세탁기가 고장 났다는 소식을 들은 주위의 엄마들이 여기서는 고치려면 일주일 넘게 걸릴 거라며 하나같이 자기 집 세탁기를 쓰라는 제안을 했었는데 그중 한 엄마였다. 어서 와서 세탁기를 쓰라는 대답에 냅다 달려가 그동안 묵혀두었던 어른 옷을 세탁기로 빨았다. 막혔던 속이 뻥뚤린 기분을 느끼며 세탁기의 소중함과 동네 주민의 고마움을 마음 깊이 느꼈다. 심지어 언니의 딸이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은 장난감까지 카트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받았다.
그렇게 한 번을 더 언니에게 신세를 지고 나니 수리기사에게 연락이 왔다. 한국 같으면 늦어도 3일이면 고쳤을 거 같지만 어찌 됐건 고치고 나니 너무나 행복했다. 아이들은 내 마음은 모르고 장난감 많아졌다고 즐겁다. 아이들이 재밌게 노는 걸 보니 일주일간 고생했던 게 또 가물가물하다. 그렇다고 또 경험하고 싶은 건 아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옷을 빨 때 이상한 물건이 있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진작부터 이랬어야 하는 건 알지만 이제라도 배웠으니 앞으론 조심해야겠다. 손빨래는 정말 너무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