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영어 자신감이 막 생기고 있던 차였다. 새로 다니게 된 학원 선생님은 꽤 괜찮다는 식으로 말했고 왔다 갔다 하면서 만나는 학부모들이랑도 간단한 대화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처음으로 첫째 아이의 엄마들과 만나는 날 깨달았다. 아 나는 귀가 막힌 게 틀림없다. 스피킹이 문제가 아니구나
이곳에 도착하고 나름 열심히 영어공부를 시작한 지 일 년 정도 되었다. 처음에 아무 말도 못 하던 것보다는 많이 늘긴 했다. 그동안 영어과외도 온라인으로 5개월 정도 했고 영어 관련 유튜브 영상도 보고 프렌즈도 봤다. 그래도 자신감이 생기진 않았다. 맨날 만나는 사람들이 한국 엄마들이다 보니 영어를 쓸 일이 없어서 무서웠다. 더구나 가끔 만나는 일본인 엄마도 나와 수준이 비슷해서 내가 맞게 하는 건지 확신이 없었다.
이런 상태로 아이가 학교에 입학했고 심지어 반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당연히 다른 학부모들과는 눈도 마주치기 힘들었다. 먼저 인사를 했을 때 표정이 조금이라도 굳어 있으면 내가 싫은가부터 시작해서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까지 혼자 끙끙거렸다. 이렇게 온몸으로 자신감 없음을 표현하며 학교 관련한 건 아무것도 안 하려는 나를 남편이 좀 어이없어했다.
이럴 거면 공부를 왜 하냐며 메일도 직접 쓰게 하고 궁금한 건 직접 물어보고 오라고 시켰다. 그땐 진짜 좀 섭섭했다. 거의 공부시키는 부모님의 자세였다. 남편이 안 해주니 내가 직접 하긴 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외국 엄마들과도 어울릴 수 있겠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긴 계기가 있다. 백투스쿨 나이트! 첫째 아이의 학교는 입학 후 얼마 안 있어 초등학교 부모님들과 선생님이 모이는 자리가 있다. 근데 문제는 오후 6시 이후, 아이들을 데리고 오면 안 된다는 것.
베이비 시터가 없는 나는 당연히 못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위의 많은 한국 엄마들도 안 간다고 하고 나도 영어도 못하는데 굳이 거길 왜 가나 싶어서 안 간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런데 정말 깜짝 놀라게도 남편이 오후 반차를 쓰겠다며 꼭 가라고 연락이 왔다. 그때부터 내 표정은 공부하나도 안 하고 시험을 맞이한 수험생이 따로 없었다. 말이 반차지 5시가 다 되어서 온 남편에게 애들을 부탁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로 갔다.
근데 막상 가니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행사가 아니라 모든 부모가 다 와있었다. 그리고 강당에서 교장선생님 말을 듣고 교실에서 담임선생님 말만 들은 후 다른 학부모들과 그냥 간단한 인사만 하면 되는 거였다. 어려울 게 없었다. 심지어 재밌었다. 아이가 공부하는 교실에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보니 구석구석 살펴보며 이렇게 즐겁게 지내는 구나도 느끼고 아이가 학교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선생님의 말에 감동도 하며 설레는 시간을 보냈다.
그날 저녁부터 자신감이 생겼다. 간단한 인사를 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친근함을 느꼈다고나 할까. 덕분에 늘 긴장됐던 등 하원 시간이 편해졌다. 아이를 데리러 가서 간단하게나마 인사도 하고 정말 좋았다. 근데 영어도 엄청 늘었구나란 착각도 같이 생겼다. 난 이제 일상 대화 정도는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정도인가 생각했다. 새롭게 다닌 학원에서 들은 선생님의 칭찬도 내 어깨가 한 껏 올라가게 하는데 큰 일조를 했다.
그러다 반 엄마들 모임날 깨달았다. 아 나는 귀가 막혔구나. 영화나 드라마가 안 들리면 일반 대화도 안 들리는 거구나. 그동안 내가 했던 대화들이 너무 간단하기도 했고 영어를 못하는 나를 다들 배려해주고 있었던 거였다. 와 정말 드라마를 보고 있는 거 같았다. 그래도 학교 이야기나 애들 이야기다 보니 50% 정도는 알아들은 거 같기도 하다. 엄마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으려고 집중을 하다 보니 1시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정말 온몸에 기가 다 빠진 거 같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터덜터덜 걸어가며 남편에게 연락을 했다. 나는 귀가 막힌 거 같다고 하나도 안 들린다고.
남편은 딱이 다른 말도 없이 계속 듣다 보며 들린다는 말을 했다. 그게 정말 좋았다. 네가 그렇지 뭐라던가, 니 실력에 알아들으려고 생각한 게 웃기다던가, 아니면 이제 공부한다고 유난 그만 부려 이런 말이 아니라 저렇게 말해준 게 엄청 고마웠다. 내가 뭘 하던 묵묵하게 지지해주는 사람이라 정말 좋다. 엄청 위로가 됐다.
나의 영어 자신감은 급격히 상승했다가 다시 내려왔지만 그래도 뭐 괜찮다. 언젠가는 들리겠지 그날이 좀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그렇게 빨리 오지 않을 거란 것도 안다. 그래도 괜찮다. 아줌마가 되고 나서 좋은 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나 자신을 감정의 바닥까지 끌고 가서 좌절하고 있는 게 아니라 금방 평범한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왜냐면 그러고 있기엔 너무 바쁘다. 애들하고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나면 조용한 밤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재밌는 게 이렇게 많은데 왜 굳이 좌절하고 있겠는가. 열심히 육아하고 공부하면서 또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다 보면 다다다 다다다음 반모임쯤에는 더 나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