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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리 Jan 22. 2023

잘 넘어가는 딱지 접기

34살에 딱지 접는 법을 배웠다. 양면딱지

말레이시아에서도 설날은 중요한 명절 중 하나다. 당연히 첫째 아이의 학교도 긴 연휴를 맞아 들썩들썩 신이 났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내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첫째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한 학기가 지났다. 일단 학교에 입학하면 아이가 영어 때문에 힘들겠구나란 생각은 했지만 내가 힘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며 가며 말하는 정도야 대충 하면 되겠지 뭐 이랬다. 하지만 그건 나의 섣부른 판단이었다. 한국과는 확연히 다르게 부모의 참여도가 정말 높았다. 크리스마스나 핼러윈 등 무슨 날이다 하면 학부모들이 학교를 꾸미고 아이들에게 선물꾸러미도 돌리며 일 이주에 한 번씩 미스터리 리더가 되어 책도 읽어준다.


저번 학기는 주저주저하다 행사에 적극 참여하지 못하고 다른 학부모에게 준비해 줘서 고맙다며 땡큐만 연발하는 나날들이었다. 행사날은 빠짐없이 갔지만 내가 게임을 준비한다거나 선물을 나눠주는 건 하지 못하고 쭈뼛쭈뼛 교실 구석에 서있었다. 아 정말 민망했다. 영어도 자신이 없고 원래도 뒤에서 조용히 있는 걸 좋아해서 내가 한다며 손드는 게 쉽지 않았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처음 맞는 명절. 그것도 설날! 이번엔 복주머니라도 돌려야지 마음먹었다. 한국에서 예쁜 복주머니를 주문하고 나는 할 일을 다 했다 생각하며 뿌듯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보내신 전체 메시지에 또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즐거운 설날! 금요일에는 아이가 빨간색 옷이나 전통 복장을 하고 등교합니다. 그리고 게임 자원봉사를 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할 거예요!'라는 메시지가 한국, 중국 부모님 도와주세요!로 읽혔다.


반 아이 12명 중 중국인 2명, 한국인 1명. 중국인 엄마들은 당연히 뭐라도 할 건데 내가 아무것도 안 하면 한국과 중국 둘 다의 명절에 대해 배우는 첫째가 실망할 거 같았다. 그때 2학년 엄마들이 미리 진행한 행사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여러 전통놀이 중 '딱지'가 정말 한눈에 확 들어왔다.

이거다 이거. 딱지라면 내가 쉽게 만들 수도 있고 한 20분 정도 아이들이랑 신나게 놀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도 성급히 선생님께 연락은 드리지 않고 일단 딱지를 만들어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나 딱지 접는 법 모르는구나.."

유튜브를 보고 쉽다고 생각하며 금방 아이 손바닥 만한 딱지를 여러 개 만들었다. 그런데 시험 삼아 쳐 봤을 때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딱지란 건 정말 잘 안 넘어가는구나. 6살 애들은 이거 못하겠다."


두꺼운 종이로 만들고 얇은 색종이로도 만들어보고 그 안에 두꺼운 종일 넣어보기도 하고 이 방법 저 방법 다 써봤는데 안 넘어간다. 이렇게 어려워서 오징어게임에도 나온 걸까. 하다 하다 안 돼서 다시 검색해 봤다.

이번엔 '잘 넘어가는 딱지'로 검색어를 바꿨다. 당연히 절대 안 넘어가는 절대 딱지 이런 것만 나오지 아이들이 쉽게 넘길 수 있는 건 찾기가 어려웠다. 포기할까 하다 양면딱지라는 걸 봤다. 한 면이 평평한 딱지와는 다르게 양쪽이 딱지로 되어 어린아이들도 손쉽게 뒤집을 수 있다.


아이들이 쉽게 즐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서 다음날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한국의 전통놀이인 딱지치기를 설명해 주고 싶어요."

선생님과 약속시간을 정하고 나서 밤마다 종이를 자르고 접으며 24개의 양면딱지를 만들었다. 어릴 때도 안 해본걸 34살이 되어서 열심히 하고 있자니 정말 웃겼다.

내가 이 나이에 말레이시아까지 와서 딱지를 접고 있다니!


그리고 드디어 금요일. 아이들에게 할 말을 중얼중얼 연습하며 황금초콜릿으로 가득 채운 복주머니를 챙기고 소중한 딱지도 챙겼다. 이게 뭐라고 어찌나 떨리던지. 신입사원 때 전사 직원교육을 담당했던 때만큼 떨렸다. 고작 12명의 아이들 앞에서 하면 되는 거였는데도 말이다.


막상 아이들 앞에 서니 떨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 6살 아이들은 저 딱지를 치고 싶다는 생각만 하는 거 같았다. 조그만 양면딱지는 스페셜하게 만든 거라는 나의 설명이 무색하게 큰 딱지를 도전하는 남자아이들이 더 많았다. 어쨌든 20분은 눈 깜짝할 세에 지나갔고 해피 뉴이어라는 인사와 함께 복주머니를 첫째 아이에게 부탁하고 나왔다.


생각보다 재밌었다. 한 번이라도 넘기면 신나서 방방거리고 못 넘겨서 입술이 뿌루퉁해져서 나와있는 모습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전혀 달랐던 것도 있었다.

애들은 복주머니를 훨씬 좋아했다. 물론 그 안에든 초콜릿 때문이 컸을 거다. 아이들의 부모님들도 주머니가  예쁘다며 인사를 하는 걸 보니 딱지는 놀 때만 재밌었던 거 같다. 아무렴 어떤가 잠깐이라도 좋았으면 된 거지.




학교활동에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4월에 미스터리 리더도 신청했다. 재밌고 따뜻한 책을 잘 골라서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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