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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리 Feb 13. 2023

식집사는 뿌듯하다

아보카도야 잘 다녀왔니

우리 집 베란다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다. 꽃과 나무였지만 이제는 나무들만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식집사가 되기 전 다른 집의 베란다를 보며 왜 녹색의 나무들만 가득한가 가 궁금했다. 나의 베란다에 꽃이 만발할 때는 그 궁금함이 알록달록한 나의 꽃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꽃은 금방 저버리고 지저분해진다는 것을. 베란다에 꽃이 늘 만발하려면 엄청난 수고가 있어야 한다.

예쁘게 핀 꽃이 져버리고 나면 어느새 힘없이 축 쳐진 줄기들이 바닥에 널 부러져 있다. 최대한 버텨보다 치우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서 나무들만 남았다. 알록달록 화려한 꽃에 비해 눈길이 덜 가던 나무들이 어찌나 반짝반짝 예뻐 보이던지. 남의 집 마당에 있는 나무도 길가에 우뚝 솟은 나무도 예뻐 보인다.


우리 집 나무들은 전부 씨앗부터 길렀다. 첫째가 길에서 주은 나무 씨앗 하나, 애들이 먹은 열대과일 씨앗 두 개, 나와 남편이 먹은 아보카도. 아주 작은 씨앗에서 나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는 건 정말 흥미롭다. 봐도 봐도 그 작은 게 언제 저렇게 컸나 싶어서 신기하다. 이 중 아보카도는 좀 특별하다. 화분에 키우기 까지가 오래 걸렸다. 깨끗이 씻은 씨앗을 이쑤시개를 이용해 물속에 반만 잠기게 담아놓고 계속 기다렸다. 정말 계속 기다렸다. 3주가 지나고 나서야 단단한 씨앗이 갈라지고 거기서 일주일 정도 더 기다리고 나서야 뿌리가 조금씩 자랐다. 이런 게 바로 밀당인가 보다. 남편이랑도 밀당을 안 해봐서 몰랐는데 기다리는 게 참 애가 타는 거더라.


뿌리와 줄기가 어느 정도 자란 아보카도를 화분에 옮겨 심는데 씨앗에 공기가 통해야 한다는 글을 어디선가 봤다. 그래서 잘 자라라고 씨앗의 윗부분이 보이게 심었다. 덕분에 누가 봐도 아보카도 나무라 자랑하기가 참 좋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사람들은 다른 나무는 그런가 보다 하고 보지만 아보카도는 신기해한다.

"우와 저거 아보카도예요?"라는 질문이 나오면 나는 신이 나서 조잘조잘 대답을 하게 된다. 사실 내가 한건 물에 넣어놓은 것 밖에 없는데 왜 이리 뿌듯한지. 매일매일 물만 마시며 쑥쑥 자라는 나무들이 내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걸 알면 좀 어이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나의 나무들을 자랑할 준비가 되어있는 나에게 엄청난 기회가 왔다.

첫째 아이의 저번주 학교 수업 주제가 식물의 성장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씨앗을 가지고 와서 심어 보는 수업을 했다. 우리 집 나무들은 전부 씨앗부터 기른 거니까 얼마나 학교 수업과 주제가 딱 맞는 건가 싶어서 선생님한테 메일을 써볼까 고민고민하다 그냥 안 했다. 내가 또 그 정도의 적극성은 없다 보니 용기가 파스스 사라졌다. 그러다 첫째가 자기도 뭔가를 소개해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매주 금요일에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자기가 소개하고 싶은 물건을 가지고 와서 친구들에게 보여주는데 첫째도 그걸 해보고 싶어 하는 거였다.


친구는 본인의 게임기를 소개했다며 자기도 그런 걸 하고 싶다고 하는데 우리 집에는 딱히 보여줄 만한 게 없었다. 게임기를 부러워한다고 남편 플레이스테이션을 들고 가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니까. 남편 RC카를 들고 가라고 할까 예쁜 공주옷을 가지고 가라고 할까 고민을 하다 갑자기 아보카도 나무가 생각났다. 수업 주제랑도 딱 맞고 누가 봐도 아보카도 씨앗이 보이니 아이들도 재미있어하지 않을까 싶어서 첫째에게 나무를 가져가는 건 어떤지 제안을 했다. 첫째는 단번에 정말 좋겠다며 그다음 날 선생님의 허락도 받아왔다. 그리고 드디어 금요일 나의 작은 아보카도는 유모차 아래 바구니에 실려 학교로 나들이를 갔다.


아이들과 학교에 온 최초의 아보카도 일 거라며 아보카도가 굉장히 뿌듯해하고 있을 거다. 집을 벗어나 학교까지 나와서 참 신나겠다 같은 말들을 하며 학교로 갔다. 그런데 하필 담임선생님이 학교에 못 오셨다. 첫째가 설명할 때 도와주시라고 메일에 아보카도를 어떻게 키웠는지도 써서 보냈는데 자녀가 아파서 못 오셨다. 이걸 다음 주에 또 들고 와야 하나 이게 그렇게 2주 동안 끌고 갈 일도 아닌데 싶어서 당황했다. 다행히 집에 와서 보니 선생님이 보내신 메일이 와있었다. 다음 주에 해도 좋고 대신 와주신 선생님이 첫째를 도와서 진행할 수 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나는 커버티쳐가 도와주면 굉장히 감사할 거 같다는 내용으로 답을 보냈다.


하루종일 첫째가 잘했을까 아님 담임 선생님이 없어서 아보카도는 구석에 쓸쓸히 있었을까가 정말 궁금했다. 다행히도 첫째는 친구들에게 신나게 아보카도를 소개하고 왔다. 엄마가 심었고 나는 아보카도를 싫어하지만 엄마 아빠는 좋아한다 이런 말들을 했다고 했다. 속으로는 내 아보카도가 큰 일을 했구나 싶어서 뿌듯했지만 첫째에게는 그걸 영어로 소개하다니 정말 대단하다며 폭풍 같은 칭찬을 해 주었다. 고생하고 온 우리 아보카도 영양제 하나 놔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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