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캐스트 콘텐츠를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월말 김어준>에서 다룬 <박종진만년필연구소>의 박종진 소장 편입니다.
방송에서 그는 수십 년간 마르고 닳도록 해왔을 만년필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은 듯 툭툭 풀어놓습니다. '세상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을까' 하며 빨려 들어가 듣다 보니 이건 한 덕후의 만년필 사랑스토리가 아닙니다. 한 인간이 평생 동안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한 물건에 몰빵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과학 실험 다큐멘터리에 가깝습니다.
한 사람의 현재는 과거에 내린 모든 선택의 누적 값이라는 전제에서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어떤 선택을 왜 하게 되었는지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현재를 이해할 수 있죠. 19개의 에피소드를 20시간에 걸쳐 내리 들고는 다시 첫 화를 재생했습니다. 50년간 작대기에 몰빵한 사람의 지금을 만든 결정적 장면들이 무엇일까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장면, 애호가에서 전문가로
한 아이의 편집증을 치료한 만년필
박종진 소장은 2살 때부터 이른바 '작대기 패티시'가 있었습니다. 밥을 먹든 잠을 자든 그의 왼손에는 항상 작대기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혹시 아이가 다칠까 염려한 어머니가 단단한 작대기 대신 휘어지는 철사를 쥐어주곤 했는데 이게 휘어지면 몸을 옴짝달싹 못하고 얼어버리곤 할 정도로 편집증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고 합니다. 올곧고 대칭인 물건에 대한 집착이 중학교 무렵 아버지가 쓰던 만년필로 옮겨갔고 그때부터 그의 모든 우주적 신경이 오직 '만년필' 하나에 꽂힙니다. 모든 사물에 보였던 그의 편집증이 만년필 하나로 옮겨가면서 생활이 조금 더 편해졌다고 합니다. 그는 학창 시절 틈만 나면 남대문, 동대문, 동두천, 평택 등 만년필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만년필에 관한 모든 것을 수집하고 습득합니다. 동호인들 사이에서도 '만년필 하면 박종진'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 장면, 전문가에서 복원가로
임상 2만 개가 만들어 준 아이덴티티
박종진만년필연구소는 만년필을 수리하고 연구하는 곳입니다. 박종진 소장은 고치기 어려운 만년필을 만나면 식음을 전폐하고 그것에만 몰두합니다. 만년필을 더 이해하기 위해 문, 방, 사, 우를 모두 공부하고 조선왕조실록을 뒤져서라도 궁금증을 해결합니다. 역사, 문학, 철학, 과학, 경제 등 그가 만년필을 설명하기 위해 언급하는 지식의 범위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 같은 시간이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심지어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일을 마친 평일 저녁이나 주말이 되면 을지로에 있는 3평짜리 그의 연구실로 출근합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온 고장 난 만년필을 무료로 수리합니다. 일반적인 경제활동의 산수법(투입대비성과)을 가진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불가합니다.
"지구에 있는 만년필은 다 제 거예요. 고장 나면 다 저한테 오게 되어 있거든요."
다소 억지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그의 말 입니다만 에피소드를 모두 듣고 나면 수긍이 갑니다. 그에게서 소장의 욕구는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5천 원짜리 만년필이든 1억짜리 만년필이든 다 똑같다고 합니다. 모든 욕망은 자기중심 사고에서 비롯되죠. 그의 세계에서 자아는 박종진이 아니라 만년필입니다. 길 가다 넘어져도 만년필을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특수한 낙하법을 개발할 정도입니다. 그는 왜 무료로 수리를 해주느냐는 김어준 씨의 타박 같은 질문에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좋아서.."라는 말만 반복합니다. 박종진 소장이 그동안 만난 만년필이 10만 자루, 자신이 수리한 만년필이 2만 자루이며 그중 1만 자루의 펜촉 모양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저는 임상이 2만 개가 넘어요."
만년필의 사가를 꿰고 있는 전문가 수준의 애호가는 한국에도 즐비합니다. 하지만 복원(130년간 출시된 모든 만년필의 원형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까지 해내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박종진 소장이 거의 유일합니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 들어와도 나갈 땐 마음대로 못 나가요."
유료로 수리를 한다면 값에 대응하는 기한과 퀄리티를 보장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고객의 요구 조건을 들어야 하고 시간의 재촉을 받다 보면 결국 불가피하게 적절한 합의점을 도출해야 합니다. 무료로 수리를 함으로써 박종진 소장이 얻는 것은 '권한'입니다. 고객과 수리 기한 및 퀄리티를 합의할 때 제공자가 협상 우위에 있을 수 있죠. 박종진 소장은 사료를 찾아 새로운 수리법을 개발하고 도구를 만드는 등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수리합니다. 실제로 수리에 10년이 걸린 만년필이 있다고 합니다.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한 덕분에 무차별적으로 그에게 2만 자루의 만년필이 왔고 그것을 수리한 경험은 박종진 소장을 만년필 수리/복원 가라는 유일한 아이덴티티를 부여했습니다. '저 사람도 만년필을 잘 알아'가 아니라 '저 사람만 고칠 수 있어'가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장면, 수리/복원가에서 박종진으로
김어준을 만나 완성된 박종진 만년필 유니버스
오늘날 미디어/플랫폼은 유통력은 극대화하고 생산력은 외주화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될만한 콘텐츠를 찾는 섭외력이 중요합니다. 피상적인 소재를 찾아 양으로 승부하는 미디어가 있고 범접할 수 없는 깊이감을 가진 희귀 소재를 찾아 질로 승부하는 미디어도 있습니다. <월말 김어준>은 후자에 해당하는 '덕후 미디어'를 지향합니다(김어준 씨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죠).
"만년필에 관한 모든 기사, 책, 자료를 타고 타고 가다 보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박종진 이름 석자가 있더라."
박종진 소장을 섭외한 일화를 들려주면서 김어준 씨가 한 말입니다. 이른바 그들만의 리그에서 활약하던 박종진 소장이 전국구 영향력을 가진 김어준 씨(김어준의 뉴스공장은 유튜브 전 세계 채널 중 실시간 시청자 수 10위권입니다)에 의해 발견됩니다. 필기구 전문가와 글을 쓰는 사람의 이야기를 번갈아 듣고자 첫 화에서는 박종진 소장과 캘리그래피 작가를 함께 초대합니다만 에피소드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김어준 씨는 박종진 소장의 이야기에서 남다른 질감을 캐치하고 박종진 소장 단독 시리즈 편성을 선언합니다.
10번째 에피소드를 넘어가도 박종진 소장에 대한 놀라움은 멈출 줄 모릅니다. 이상하리만치 대단합니다. 가령 3년 전 약수터에서 인사 한 번 나눈 할아버지를 우연히 길에서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거나(기억력이 대단하고 눈치가 대단히 없습니다) 수리를 위해 만년필을 건네면 손에 건네받기도 전에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알아냅니다. 심지어 그 문제는 15배 확대경으로 봐도 보일까 말까 할 정도로 미세합니다. 김어준 씨가 최근에 출시해서 박종진 소장도 처음 보는 만년필 브랜드 한 자루를 들고 와 "이건 어떤 것 같냐"라고 묻자 종이에 줄 하나를 쓱 그어보더니, "이거 OOO브랜드에 납품하던 회사인가 본데요. 밸런스가 OOO만년필이랑 비슷해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합니다. 제작진이 수소문해서 알아보니 OOO브랜드의 OEM제작 회사가 자체 브랜드를 출시한 것이었습니다. 물이 고인 트랙 위를 달리는 느낌이 좋다는 김어준 씨의 말에 손으로 펜촉을 몇 번 만진 후 김어준 씨에게 주자 정확하게 그 펄감이 구현되었다며 놀라워하는 대목은 백미입니다. 추상적/감각적 표현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물성을 구현해 내는 것을 보면 뇌의 전 영역이 발달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에도 명품 만년필 하나쯤 있으면 좋겠는데.."
대화 도중 나온 아쉬움 섞인 토로 한 마디에 김어준 씨는 급기야 박종진의 이름을 건 만년필 제작 프로젝트를 추진합니다. <프로젝트 만>이라 명명하고 우리나라의 청자 소재를 활용해 세상에 없던 만년필을 만들고 있습니다. 올 8월쯤 나온다고 하니 기대가 됩니다. 깊어지면 넓은 세상이 엄두가 나지 않고 넓어지면 깊이 있는 세상이 반갑습니다. 마이너리그에선 엄두를 못 내던 일이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 현실이 됩니다. 금속공학자, 디자이너가 합류하고 박종진 소장이 유럽을 오가며 만년필 제조사를 만나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합니다. 만년필 세상에 살던 덕후가 세상에 없던 만년필을 만들게 된 것이죠. 그것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말이죠.
만년필에 대한 혹독한 애정은 애호가를 뛰어넘어 전문가가 되게 했고 좋아서 시작한 무료수리는 그를 만년필 세계에서 유일한 아이덴티티를 가진 수리/복원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미디어는 필연적으로 그를 소환했고 더 이상 전문가, 복원가와 같은 수식어 아래에 있지 않도록 '박종진'의 이름을 가장 상단에 올려놓습니다.
축구선수가 90분간 이어지는 한 경기에서 볼을 터치하는 시간은 단 3분입니다. 나머지 87분은 3분을 위해 뛰다가 공이 자신에게 온 찰나의 순간 패스, 슛, 드리블의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87분간은 카메라도 관중도 오로지 공을 쫓느라 철저히 외면합니다만 90분 안에 공은 반드시 옵니다. 그때 패스를 정확하게 잘하는 선수도 있고 피니셔라고 불리는 슛 전문가도 있으며 드리블에 능숙한 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고 반열에 오르는 선수는 공을 받기 좋은 위치를 찾아 끊임없이 뛰어다니는 선수입니다. 박지성 선수가 그랬고 월클 반열에 오른 손흥민 선수가 그렇습니다.
최근 뉴미디어&플랫폼 사회는 87분에 카메라를 비춥니다. Unsung Hero* 찾는 것입니다. 유퀴즈가 대표적입니다. (*언성 히어로: 충분히 칭송받을 자격이 있음에도 저평가된 사람을 일컫는 말로 잉글랜드 매체가 박지성 선수를 평가할 때 사용해서 알려졌습니다.) 아무도 몰랐던 언성 히어로 박종진 소장의 87분과 월말 김어준의 패스를 받은 3분 간의 성장 서사, 꼭 들어보시길 추천합니다.
https://www.podbbang.com/magazines/1778990